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352
352화
간절한 이에게 기적이 (2)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유모차를 향해 뛰어가던 태주가 추석대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린 순간.
태주와 눈이 마주친 추석대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태주를 피해 달아나듯, 임강현의 팔을 잡아끌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탈탈탈, 무서운 속도로 경사길을 내려오던 유모차를 태주가 낚아챈 건 그 순간이다.
유모차에서 양파가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걸 보며 안심하기도 잠시.
아뿔싸.
태주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추석대와 임강현은 온데간데없이 도망친 뒤였다.
그리고 이 모습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은 주인식 감독.
그런 그에게 조연출이 전전긍긍하며 속삭였다.
“감독님, 이거 다시 찍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잠깐만 있어 봐. 동주 씨, 거기 태주 씨 얼굴 클로즈업 좀.”
화면 속 망연자실한 태주의 얼굴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다행스러움과 의심스러운 자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이렇게 씬을 끝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데?”
만족스러운 미소가 새어 나오던 눈매가 태주를 향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였지만, 그 순간에도 연기를 놓지 않은 태주의 열연으로 더욱 좋아진 결과물에 흡족할 뿐이었다.
* * *
얼마 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흰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못내 미안한 듯 스태프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촬영을 구경하다가 너무 몰입했나 봐요. 저도 모르게 유모차를 놓쳐 버렸네요.”
“어머님, 그래도 좀 주의하셨어야죠. 한창 촬영 중인데 배우들 다쳤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셨어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조연출은 미간을 한껏 찡그리며 유모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삐죽 튀어나온 대파를 보곤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에 진짜 아기가 없어서 망정이지……. 그런데 도대체 유모차에 이런걸 왜 가지고 다니시는 거예요?”
“워낙 허리가 안 좋아서 장바구니 대신 가지고 다니는 거였는데, 오늘 놓칠 줄은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다들 심장 철렁했어요, 진짜.”
그때, 태주가 다가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조감독님, 이제 보내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놀라셨을 것 같아요.”
“큼큼…….”
“그리고 감독님께서 부르세요.”
그제야 조감독은 감독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할머니를 다독여 안심시킨 태주도 그 뒤를 따라갔다.
아까 찍은 화면을 여러 번 돌려보던 주 감독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태야, 이것 좀 봐. 더 리얼하게 잘 나왔어.”
모니터에 시선이 고정된 주인식 감독은 못내 만족스러운 듯 턱을 쓰다듬었다.
“이성용이랑 이윤철이 그냥 퇴장하는 것보다는, 신윤재가 그들을 심문하려는 도중에 유모차가 골목에서 내려와 그들이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이런 방향도 좋을 것 같아서.”
“흠……. 이 버전에서 태주 씨 표정이 엄청 리얼하긴 하네요.”
“그렇지? 밋밋하게 퇴장하는 것보다 이렇게 유모차 끼어드는 것도 괜찮지 않냐?”
잠시 생각하던 조연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임팩트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다 배우들이 사고가 났음에도 마지막까지 연기를 놓지 않아서 나온 결과물이라고.”
주인식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태주와 추석대를 바라보았다.
“석대 씨는 어떻게 강현 씨 데리고 도망갈 생각을 한 거예요? 대본엔 그런 말 없었잖아요.”
“태주 씨가 유모차 구하러 가는 그 짧은 찰나에, 저를 힐끗하더라고요.”
추석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태주 씨의 눈빛이 아니라, 신윤재의 것이었어요. 이성용이 혹시라도 도망갈까 전전긍긍하는 눈빛이랄까?”
“아, 그래서 갑자기 날 잡고 도망친 거예요?”
“강현 씨한테는 미안해요. 그런데 태주 씨 눈빛 보니까, 본능적으로 도망가야 할 것 같더라고요.”
그 순간을 회상하던 추석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도 연극을 오래 해서 이렇게 즉흥으로 받아치는 연기에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태주 씨의 연기에 저도 모르게 압도됐어요.”
“하하, 태주가 사고가 난 그 순간에도 신윤재의 탈을 쓰고 촬영 현장을 장악했구만?”
크하하 웃던 주인식이 이내 조감독을 바라보았다.
“역시 이걸 쓰는 게 좋을 거 같네. 지금 심 작가한테 연락해서 상황 설명하고 대본 수정 가능한지 물어봐.”
“네, 알겠습니다.”
조연출이 즉시 핸드폰을 들어 작업실에 있을 심은설에게 연락하더니, 곧이어 그가 환한 얼굴로 돌아왔다.
“작가님께서 이 버전이 더 임팩트가 있는 것 같다고, 바꿔 주시겠답니다!”
“오케이! 심 작가 허락도 떨어졌으니, 다시 신나게 찍어볼까?”
호쾌하게 웃은 주인식이 태주의 등을 든든한 듯 두드렸다.
“역시 짬밥 있는 배우는 다르다니까. 촬영 중 사고를 이렇게 명품 연기로 승화시킬 줄, 누가 알았겠냐고.”
그리고 동 시각.
구경하던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기자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둘러 핸드폰 메모를 켜서 무언가 적기 바빴다.
촬영 현장의 생동감을 원고를 작성해 기사로 내보낼 이들의 손놀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빴다.
* * *
그날 저녁.
잠잠하던 연예란은 기자들의 새로운 기사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퇴근 시각이 다가오는 이때.
패션잡지 회사 ‘노블’ 사무실에서는 여기저기서 마우스를 달칵거리는 소리가 활기차게 들렸다.
인터넷을 둘러보던 직원들이 태주의 기사에 목을 빼고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에는 기자들이 찍은 현장 사진과 글들로 가득했다.
“이야. 이번에 태주 씨, 연기 진짜 잘했나 봐. 공개 촬영 갔다 온 기자들이 아주 호평 일색이네. 유경 씨도 봤어?”
편집장의 부름에 한유경은 멍하니 대꾸했다.
“아, 그래요?”
“뭐야, 자기 조카 일인데 왜 모르는 일처럼 굴어? 지금 인터넷에 기사 뜬 거 못 봤어? 태주 씨 경찰복 입은 모습이 아주 멋있던데.”
한유경이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저 지금 영어로 된 이메일 읽고 있어서요.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해외에서 온 화보 제안이야?”
“네.”
한유경은 편집장에게 가서 프린트한 이메일을 전달했다.
“이번에 폴 벨포르가 한국-프랑스 교류 행사에 홍보대사로 내한하잖아요. 그 참에 한국 배우랑 같이 화보를 찍자는 제안이 와서요.”
“누구랑? 콕 집은 배우가 있어?”
“아, 그게…….”
말하기 쑥스럽다는 한유경을 보던 편집장의 눈빛이 의기양양하게 번뜩였다.
“자기 조카구나, 한태주!”
“네. 폴 벨포르 쪽에서 태주랑 페어를 이뤄서 한옥 배경 화보를 찍으면 재밌을 것 같다고, 강력하게 의견을 줬대요.”
“그럼 한태주 씨 회사에 의견을 물어야지. 그쪽도 마다하지는 않을걸? 폴 벨포르 같은 세계적인 배우랑 친해질 기회인데 얼마나 좋아?”
편집장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 * *
“글쎄, 지금 태주가 워낙에 스케줄이 바빠서 노블 화보를 찍을 시간이 날지 모르겠는데.”
노블 쪽 화보 촬영 제안을 전달받은 차용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배우 1팀 직원들과 함께한 회의.
편집장에게서 직접 온 화보 제의에 그들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생각해 보고 연락드린다고 할까요?”
“그렇게 해. 지금 태주가 ‘굿맨’ 촬영에 이것저것 하느라 너무 바쁘다고.”
“그래도 화보 촬영은 하루만 빼서 빡세게 찍으면 되잖아요.”
못내 아쉬운 듯 송유리가 끼어들었다.
“폴 벨포르 같은 톱배우랑 태주 씨가 같이 화보를 찍으면 어떤 분위기를 자아낼까, 저는 개인적으로 기대되거든요.”
“일단은 태주 의사를 물어봐야지.”
그 말을 끝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차용석이 박인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박 실장.”
“네?”
“요즘 태주, 딴생각하는 거 있지?”
갑작스런 질문에 박인우가 바짝 몸을 세웠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우리 제작사에 들어온 시놉들, 박 실장이 갖다줘서 다 읽어보고 있다며. 보통 같으면 마음에 드는 시놉이 있다며, 나한테 재잘거리면서 논의하는 녀석이야. 그런데 이번에는 어쩜 한 마디도 없어?”
“아직 시놉을 보는 중이라서 그럴 겁니다.”
“내가 태주를 몰라? 그 녀석은 밤을 새워서라도 다 봤을 거야. 진작에 보고도 남았다고.”
차용석이 박인우를 향해 의심스런 눈초리를 날렸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마음에 드는 작품이 진작에 정해져 있었던 거지?”
“아닙니다. 정말 아직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고르지 못한 거 같았습니다. 워낙에 많아서.”
“아무튼 태주, 차기작은 최고의 작품으로 골라야 해. 이번에 ‘굿맨’ 공개 촬영 때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면서, 아주 호평들이 많아.”
“이번 드라마에서 새로운 연기의 정수를 보여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차기작은 더욱 신중해야지. 괜히 어정쩡한 작품 골랐다가 이제까지 쌓아온 금자탑이 무너지는 건 원치 않으니까.”
정곡을 찔린 듯 박인우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태주와의 약속 때문에 그는 말할 수 없었다.
태주가 여전히 영화 ‘영웅’ 리메이크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 * *
한편, 드라마 촬영이 끝난 늦은 밤.
스튜디오 촬영까지 끝마친 태주는 장진혁과 함께 서동락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박인우는 회사에 늦게까지 일이 잡혀 있어, 오늘 태주의 스케줄은 장진혁이 도맡는 중이었다.
황금빛 조명이 주렁주렁 달린 서동락의 집에 캔맥주를 들고 입성한 장진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오늘 태주 배우님 친구분네 집에 방문하는 것도 스케줄의 일환입니까?”
“네, 뭐…… 비슷해요. 일단 들어와 봐요. 동락아, 우리 왔어!”
태주와 장진혁의 방문에 거실에서 빔프로젝터를 설치하며 끙끙거리던 서동락이 고개를 들었다.
“맥주는 사 왔냐?”
“당연하지. 너는 ‘영웅’ 구했어?”
“어.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이런 골동품 영화를 구해달라 한 거야?”
자신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말에 이중협이 신이 나 돌아다녔다.
[야, 이거 구하는 거 엄청 어려웠을 텐데? 동락이 능력자구나!]“이 영화 구하는 거 어려웠냐?”
“겁나 어려웠지! 내가 말이야, 졸업하신 과 선배들한테까지 다 연락 돌려서 겨우 구한 거라고!”
서동락이 생색을 내며 혀를 내둘렀다.
“원래 독립영화는 상영 끝나면 DVD는커녕 원본으로도 구하기 힘들어. 더욱이 이 영화는 상영 2주 만에 내려서 그런가, 아무튼 원본은 고사하고 복사본 찾기도 어려웠다고!”
“그래, 구해줘서 고맙다.”
“그래서 이건 왜 보려는 건데?”
수상쩍은 눈빛을 한 서동락이 태주를 훑어보았다.
“네가 이런 골동품 독립영화에 괜히 관심을 가질 리 없잖아.”
“내가 존경하는 이중협 선배님이 주연인 영화라서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럼 진작에 찾아봤어야지. 그걸 꼭 이 타이밍에 봐야겠다고?”
“야, 조용히 하고 일단 보자.”
태주가 서동락의 입을 막으며 재촉하자.
곧이어 어두워진 티비 속, ‘영웅’이란 제목이 올라오고.
태주는 기대감으로, 이중협은 그리움에 부풀어 영화에 집중했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