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355
355화
간절한 이에게 기적이 (5)
병실에 들어선 옥장파는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 왔습니다.”
젊었을 적 한 풍채 했을 노인은 지금, 핏기가 하나 없는 얼굴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옛 스승이 의식을 잃은 지도 벌써 1년째.
옥장파는 옆에 앉아 그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감독님. 저, 감독님 영화 ‘영웅’ 리메이크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2년 전에 저더러 해보라고 허락해주셨던, 그 영화요.”
그의 손에 잡힌 늙은 손이 꿈틀, 하는 건 착각일까.
이야기에 몰입한 옥장파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 이제는 제대로 할 거예요. 후배들 영화에 꼽사리로 껴서 뒤치다꺼리나 해준다는 말도 이제 지겹습니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두려움에 잠식돼서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휴우, 하는 긴 한숨을 내쉰 그였다.
언제나 스승 앞에서 하는 고백은 무거웠다.
그러나 각오가 되어 있기에, 그는 오늘만큼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고 굳건했다.
“저, 감독님께서 영화 관련해서 주셨던 자료들, 아직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몇 번이고 보고 분석했습니다. 거기에 제 의견을 덧대어, 영화 리메이크를 해보려 합니다.”
미동도 없는 스승에게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되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일지라도, 그래도 좋았다.
그의 스승만큼 묵묵히, 그를 지지해준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감독님이 그러셨죠? 배우 이중협 씨의 열연으로 영화의 불꽃을 화려하게 피어 올렸다고요. 저는 배우 한태주 씨의 손을 잡고 영화의 막을 올리고 싶습니다. 정말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한 그의 고개가 스승 앞에서 진심을 내보이며 떨궈졌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그 순간.
파르르.
노인의 주름진 눈이 서서히 열렸다.
* * *
“하, 역시 기적이 그리 쉽게 일어나는 건 아니지.”
병실을 나선 옥장파는 한숨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방금 병석에 누워있던 감독님의 눈이 파르르 떨렸던 건 착각이었을까.
분명 감독님의 미동 없던 얼굴이 한순간,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몇 번이고 그때를 회상하던 옥장파는 고개를 흔들었다.
어둑한 병원에서 햇살이 내리쬐는 밖으로 나온 지금.
옥장파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햇빛에 얼굴을 찡그렸다.
“하긴, 일 년째 누워있기만 하셨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그가 주차장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그때.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지잉, 하고 울렸다.
“모르는 번호인데?”
고개를 갸웃한 옥장파는 혹시 영화판 관련 사람인가, 하고 받았다.
“여보세요.”
-한태주입니다. 영화 ‘영웅’ 리메이크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제가 그 영화에 관심이 좀 있거든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다소 다급한 듯 덧붙였다.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당연…… 당연하죠! 어디에 계신가요? 제가 태주 씨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느리게 걷던 옥장파는 이제 차로 돌진하다시피 뛰었다.
아까 스승님 앞에서 잘 되게 해달라고 한 기도가, 통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 * *
그날 저녁.
회사 근처 한적한 카페에 태주는 차용석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연신 손목시계를 보던 차용석이 태주를 힐끔거렸다.
그는 ‘영웅’ 리메이크 시놉을 읽고, 또 읽는 중이었다.
“흠흠.”
차용석이 헛기침하며 그런 태주의 주의를 끌었다.
“옥 감독이 너무 늦는 것 같은데?”
태주도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이 약속한 시각보다 20분은 훌쩍 지나 있었다.
“원작자인 박용찬 감독님을 뵙고 오는 모양이에요. 지금 병원에 1년째 신세 지고 있으시대요.”
“흠. 우리가 약속을 너무 급하게 잡았나?”
차용석이 한숨을 삼켰다.
“그나저나 원로감독 박용찬 감독이 산 송장 신세라니, 정말 세상일 모를 일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왕성하게 활동하셨거든.”
“대장군 같은 분이셨죠. 저도 기억나요. 영화 ‘뻐꾸기 새끼’에서 감독님한테 직접 연기 지도도 받고 그랬었거든요.”
“아, 그래. 그 영화에서 네가 손우현 형 아역으로 나왔었잖아! 그런데 박용찬 감독님한테 연기지도도 받았었냐?”
“그만큼 열정적이셨거든요. 그때가 벌써 70이 다된 나이셨는데 직접 배우들한테 연기지도를 하실 만큼 열정이 대단하셨죠.”
그때 카페 문이 떨어지도록 덜컹거렸다.
숨이 헉헉거리도록 뛰어온 옥장파가 주변을 둘러보자, 차용석이 손짓했다.
자리에 와 품에 든 두툼한 파일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는 연신 고개를 꾸벅거렸다.
“이렇게 만나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칸에서도 그렇고, 감독님 스타일이 참 멋지세요.”
태주가 옥장파에게 눈을 찡긋했다.
염색을 하나도 안 한 잿빛 머리카락에 검은 뿔테 안경, 베이지색 반바지에 헐렁거리는 하와이안 셔츠.
마치 보헤미안 같은 모습에 차용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유로운 영혼이라 시놉도 이렇게 감성적으로 잘 쓸 수 있었던 건가…….’
태주의 선구안을 믿고 밀어주기로 했지만, 뭔가 옥 감독의 범상치 않은 모습에 살짝 의심이 갔던 것일까.
차용석의 묘한 눈빛을 읽은 옥장파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제가 한 달 전쯤에 시놉을 보냈는데, 아직도 대답을 안 주셔서…… 반쯤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원래 이쪽 업계에서는 무응답이 거절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옥장파의 눈빛은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회사 측에서 영화 ‘영웅’ 리메이크작에 한태주를 주연으로 주기 힘든 걸 알았다.
이게 첫 단독 연출작이고, 상업 영화보다 애니메이션 영화 경력이 더 많은 자신이다.
뒷배에 베일릭스의 투자가 있기는 하나, 주연 배우 한태주의 확답은 아직 없다.
제작사 퓨처 스튜디오의 확답도.
서서히 고개가 숙여지는 그때, 태주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사실 제가 ‘영웅’ 원작을 봤습니다. 그리고 감독님의 리메이크작 시놉이랑 대본도 봤는데, 개인적으로 이 버전이 더 마음에 들더라고요.”
“네?”
벌떡 고개를 들은 옥장파의 눈에 태주의 곧은 얼굴이 보였다.
“원작은 시간의 흐름이 두루뭉술하게 흘러가는 반면. 감독님 작품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하게 보이면서 그것이 배우 지망생인 주인공의 인생과 겹쳐지는 연출이 아주 좋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차용석이 덧붙였다.
“원작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군데군데 노래를 삽입한 것도 좋았습니다. 주인공의 인생이 관객들에게 좀 더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이 좋습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태주가 옆에 있던 이중협과 에바 벨포르를 힐끔거렸다.
“이게 원작보다 훨씬 재밌습니다. 씬도 박용찬 감독님보다 감독님께서 훨씬 감성적으로, 맛깔나게 연출하실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그 말에 이중협은 재밌다는 듯한 얼굴을, 옥장파는 얼굴이 벌게졌다.
[이야, 감히 리메이크작이 더 재밌다는 칭찬을 했단 말이지? 정말 자신 있나 보네, 한태주.] [그러게요. 무슈 용찬보다 더 좋은 감독이라고 말한 거잖아요.]“감……, 감사합니다.”
옥장파는 두꺼운 안경을 벗고는 미간을 문질렀다.
붉어진 눈시울을 보니 어지간히 감동받은 듯했다.
그런 그를 본 태주가 깜빡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이걸 말씀드리는 걸 까먹었네요. 감독님, 이번 영화는 제가 주인공을 꼭 하고 싶습니다.”
“그……, 그건 당연하죠! 칸에서 봤을 때부터 제게 주연 배우는 한태주 씨뿐이었습니다.”
“좋습니다. 이제 저희는 한배를 탄 겁니다, 감독님.”
눈을 찡긋하는 태주 옆에서 차용석이 덧붙였다.
“저희 회사 5층에 감독님 사무실 마련해 둘 테니, 그쪽으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차용석이 저 멀리 누군가를 살피자, 그쪽에서 화답이라도 하듯 찰칵, 플래시가 비쳤다.
“조만간 감독님 얼굴 실린 연예 기사가 나가더라도 놀라시지 마세요. 이게 다 저희 쪽에서 ‘영웅’ 리메이크 선수를 치기 위함이니까요.”
* * *
그로부터 1시간 후.
밤이 늦은 시각임에도 불이 환하게 켜진 원스타 엔터 대표실.
그곳 대표, 박준택은 컴퓨터로 연예 기사를 확인하느라 한껏 집중한 상태다.
“아니, 한태주도 참 이상하네. 도대체 카페에서 옥장파 감독 만날 일이 뭐가 있다고?”
모니터를 가득 채운 사진에는 카페에서 우연히 찍힌 듯한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사진의 주인공들에 박 대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옥장파 이 인간이 왜 한태주하고 차 대표를 만난 거야?”
그리고 그 가운데 똑똑히 보이는 글자, ‘영웅-리메이크’.
“이거, 진짜 한태주 측에서 붙는 게 확실한가?”
불안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가고, 이내 발을 동동거리던 박 대표.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라도 내려오듯 전화가 걸려 왔다.
아는 사람인 듯 반갑게 인사한 박 대표는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뭐라고? ‘영웅’ 리메이크에 베일릭스가 붙었다고요?”
원스타 엔터테인먼트에 크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핸드폰을 몇 분째 붙잡고 있던 박준택 대표는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해줘요! 그거 저작권을 내 쪽에서 갖고 있다고요! 아니, 그것보다 지금 베일릭스가 ‘영웅’에 붙은 거, 아직 기사화 안 됐죠?”
상대편에서 그가 기대하는 대답이 나온 걸까.
박 대표의 눈이 만족스러운 듯 가늘게 찢어졌다.
“그래, 그쪽도 아직 간만 보는 단계네! 그럼 됐어요, 아직 오피셜도 아닌데 뭘. 판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짜증으로 범벅됐던 얼굴이 통화가 끝날 때쯤 되니 어느덧 웃음꽃으로 바뀌었다.
“그래,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 게 맞지. 이제 판은 내가 원하는 대로 새로 짜는 게 맞고.”
자신만만한 그의 말에 옆에 있던 부사장이 갸웃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아까부터 입술을 달싹거리는 그였다.
“대표님. 그런데 저희가 이 영화에 이렇게까지 매달려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갑자기 왜 이래?”
“일의 우선순위를 따지자는 겁니다. 지금 폴라리스 재계약 건도 그렇고, 처리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지호랑 강웅이 움직임이…….”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이쪽이 먼저지. 이쪽 일이 더 급하다고. 게다가 이건 돈이 되잖아, 돈이!”
이게 왜 돈이 되냐는 듯 멍한 표정을 짓는 부하직원에게 박 대표가 쯧쯧거렸다.
“재준아, 돈 덩어리가 여기 두둑이 붙어있는 거, 안 보이냐?”
“박 감독님 지장 찍은 문서가 효력이 있다는 건 이해합니다만. 옥장파 감독에게는 박 감독님의 친필 사인이 있습니다. 그럼 그쪽이 더 유리하지……”
“야, 그쪽은 남이고 나는 아들이야! 상식적으로 봐도 저작권은 아들한테 오지 생판 남한테 가지 않는다고.”
목소리는 컸지만 켕기는 게 있는 듯 박 대표는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부사장은 대표의 주장에 수긍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목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박 대표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런데 하나 걸리는 건…….”
그리고는 카페에서 찍힌, 태주와 옥장파 감독의 사진을 살폈다.
“도대체 왜 이런 미팅을 사람들 다 보는 카페에서 한 거야?”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