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360
360화
화양연화 (3)
* * *
동 시각, KTS 방송국.
드라마 ‘굿맨’ 제작진이 한데 모여 회의하는 이때.
주인식 감독부터 조연출, 심은설 작가까지 다들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확실히 ‘굿맨’은 주인공인 한태주 씨가 매 화의 빌런들과 어떻게 대립하는가가 매력 포인트예요.”
“그만큼 각 화에 등장하는 빌런들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일단은 연기를 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번에 특별 출연한 임강현 씨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주인식이 만족스러운 듯 그때의 상황을 회상해 보았다.
유약하고 부드러운 밀크남 이미지의 임강현이 그렇게 섬뜩한 눈빛 연기를 할 수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마 한태주의 추천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선택지였을 거다.
하지만 조연출과 심은설 작가의 강력한 호응 덕분에 임강현을 반신반의하며 쓰게 되었다.
의심스러웠던 마음이 확신을 넘어 필승의 마음으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다.
한태주의 서늘한 연기에 임강현의 날 선 연기는 너무나도 잘 어울렸으니까.
“확실히 임강현도 숨겨둔 발톱이 있었다는 건가.”
“모든 배우는 자신만의 매운맛이 있는 법이니까요.”
불쑥 끼어든 심은설에게 모든 이의 시선이 주목된 순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직 제 본모습을 다 드러내지 않은 배우들이 많다는 거죠. 임강현 씨도 이제까지 밀크남, 다정한 남자로 이미지가 각인됐었지만, 날카롭고 섬뜩한 면도 있었던 것처럼요.”
“나도 심 작가의 말에 동의해. 뻔한 연기가 아닌 반전의 연기를 보이는 배우야말로 임팩트 있는 배우라고 할 수 있지.”
주인식 감독은 껄껄 웃었다.
“이제 다음 화 촬영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번 화 빌런도 임팩트 있는 배우로 가면 좋을 것 같아.”
그 말에 스태프들의 손길이 한층 분주해졌다.
“임강현 씨처럼 반전을 주는 분을 써볼까요?”
“아니면 이번에는 오디션 본 배우 중 한 명을 써도 괜찮을 것 같고요.”
종이를 넘기던 주인식의 눈이 왈칵 커졌다.
“그래, 오디션에서 이 배우 연기가 아주 마음에 들더만. 이 친구.”
그가 콕, 짚은 프로필을 다들 쳐다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주인식과 프로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분을 정말 이 역할로 쓰시겠다고요?”
“그래.”
“아니, 이미지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것 같은데요. 그보다 이 친구는 저번에 드라마에서 이미지가 실추된 바 있었고…….”
“그런데 다들 인정했잖아, 오디션장에서 연기 잘한 건.”
주인식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서 연기만 보자고.”
그 말에 스태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다시금 프로필로 시선이 향했다.
그곳에 적힌 이름은 강재하였다.
* * *
늦은 밤이 다 된 시각.
“오랜만입니다, 본부장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탁시준은 입이 찢어져라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레 연락한 탓에 태주가 안 나올 수도 있으리라 걱정했는데, 온 걸로 일단은 성공이었다.
“그래, 우리 태주…….”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저도 같이 왔습니다.”
그런데 태주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박인우의 모습에 탁시준의 활짝 웃던 얼굴이 사그라들었다.
“태주만 불렀는데……. 인우도 같이 왔네.”
“이제는 박 실장입니다.”
태주가 점잖은 소개에 박인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본부장님 앞에서 괜히 주름잡는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예전에 부르시던 것처럼 인우라고 하셔도 됩니다.”
“아니, 뭐……. 그럼 박 실장이라고 해야지.”
태주와 박인우는 눈빛을 교환하며 자리에 앉았다.
밤늦게 탁시준이 자신을 부르자, 태주는 곧바로 박인우와 차용석에게 연락했다.
그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같다며 차용석은 태주에게 박인우와 동행하라고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길래 저만 불러내신 겁니까? 본부장님은 저 말고 용석이 형하고 이야기하셔야 하는 급, 아니세요?”
능글맞게 이야기하는 태주에 탁시준은 당황스러운 듯 헛기침했다.
“아니, 그게…….”
“편히 말씀해 보세요. 저도 인우 형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요.”
망설이던 탁시준이 결심한 듯 입을 뗐다.
“이번에 임강현이 네 추천으로 드라마 카메오로 출연했다고 들었다. 거기서 반전의 키로 활약했다면서.”
그 말에 태주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갑자기 웬 드라마 얘기냐?]‘글쎄요.’
[저 양반,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겉으로는 유하게 나가되 단호함을 잃지 마.]이중협의 말에 태주는 한껏 각오를 다졌다.
“아, 그거요. 제 부탁으로 강현이가 카메오로 출연해 준 거예요.”
“드라마 화제성 높이려고 임강현 부른 거지? 그런 거면 우리한테 연락하지 그랬냐.”
“네? 무슨 말씀이신지…….”
“태주 이 녀석, 섭섭하다. 네가 드림액터스 나간 지 좀 됐다고 우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냐? 우리는 항상 너를 한 가족으로 생각하며 응원하고 있었는데.”
빙빙 돌리는 말에 박인우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본부장님, 말 돌리지 마시죠. 진짜로 하고 싶은 말씀은 이거 아닙니까. 태주 드라마에 누굴 카메오로 넣고 싶으신 거죠?”
“카메오? 인우… 박 실장, 내가 우리 애들을 카메오 따위로 넣자고 이렇게 찾아온 것 같아?”
결국 탁시준은 태주를 향해 몸을 숙여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드라마 작가가 입봉 작가라며? 그럼 대본 고치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하겠네.”
“본부장님.”
“드라마에 새로운 캐릭터 좀 만들어 줘봐. 우리 결이, 정말 연기 잘하는 거 태주 너도 알잖냐. 이왕이면 분량도 좀 챙겨주고.”
[아하, 이럴 작정이었군. 영화를 말아먹었으니 드라마로 이미지 회복을 해보시겠다? 그런데 방식이 틀렸지, 탁시준 씨.]벌떡.
태주와 박인우가 동시에 일어나자 탁시준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뒤따라 일어섰다.
“왜 이래?”
“배우 선정과 스토리는 제가 결정할 수 없는, 감독님과 작가님의 영역입니다.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런 부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야, 태주야. 내가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섭섭하다.”
“그리고 이런 건 결이 형한테도 실례입니다. 배우의 길은 본인이 개척하는 거지, 누가 대신해주는 게 아닙니다. 그건 형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씁쓸한 표정의 태주가 탁시준에게 덧붙였다.
“오늘 일, 결이 형한테는 비밀로 해 두겠습니다.”
* * *
다음날.
대표실에 모인 세 남자는 이른 아침부터 적극적으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본부장님께서 그렇게 뻔뻔하게 나오실 줄은 몰랐다니까요.”
박인우가 흥분해서 침을 튀겼다.
“무슨 드라마 배역 자리를 태주한테 맡겨 놓은 것처럼 뻔뻔하게 굴더라니까요.”
“그 양반이 너한테까지 연락했단 말이지.”
차용석이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조선패션왕을 화려하게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만. 그 양반이 이런 식으로 위기를 타개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결이 형한테 연락이 왔으면 좀 흔들렸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본부장님이 그런 식으로 나오시니까…….”
태주가 씁쓸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저도 기분이 좀 그렇더라고요.”
“아무튼, 태주 너는 내일 있을 화보 촬영에 집중해.”
“아, 화보!”
차용석은 태주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그를 다독였다.
태주가 정이 많은 것을 알지만, 그것이 지나치지 않도록 사전에 막는 것도 대표인 그의 의무였으니까.
“하루 찍는 일정이지만 그래도 상대가 세계적인 배우잖아. NG 내지 말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야지.”
“맞아. 내일 북촌 한옥마을에서 폴 벨포르랑 같이 화보 찍는다며.”
박인우가 태주를 듬직하게 쳐다보았다.
“내일 태주 네가 한국의 미를 똑똑히 알려주라고!”
고개를 끄덕인 태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에바 씨가 있을 때 오셨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에이, 애초에 그 할머님은 남편에 대한 한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뭘. 와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을 거야.]‘그래도 폴 씨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거예요. 항상 모든 것을 내준 헌신적인 아내가 떠났는데, 그리움이 없을 리 없으니까요.’
태주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에바가 말한 것도 같았다.
생전에 남편과 한국은 방문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언젠가 함께 한국에 오게 된다면, 한국의 매운맛을 보여주고 싶다고.
* * *
다음날, 이른 아침.
북촌 한옥마을에 수십 명의 스태프가 바쁘게 움직이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태주와 푸른 도포를 입은 폴 벨포르는 한옥 툇마루에 앉아있다.
칸에서 봤다고 반갑게 인사를 나눈 것도 잠시.
그들은 곧이어 화보 촬영에 들어갔다.
그들 사이에는 소품으로 쓰이는 바둑판이 놓여있었다.
“자, 서로 바둑을 두는 시늉만 하면 됩니다. 그럼 슛 들어가겠습니다!”
화보 촬영은 제법 순조롭게 흘러갔다.
태주는 폴에게 바둑알 쥐는 법을 가르쳐 주려 했지만, 그는 이미 착수 동작을 집에서 수없이 연습해서 온 터.
탁, 탁, 탁.
바둑을 두는 장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 바둑알을 손가락에 끼고 착수하는 장면까지.
강건한 프랑스 노인과 젊은 한국인 배우가 보여주는 경건하기까지 한 모습에 다들 감탄했다.
“굉장해요. 외국인과 한국인이 바둑을 소재로 얼마나 컨셉을 잘 소화하려나 걱정했는데, 어색한 부분이 하나도 없어요.”
“서양화와 한국화가 섞여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뇨.”
“저 둘은 나이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오직 촬영에 몰입하는 열정으로 너무나도 완벽히 섞이는 것 같아요.”
“역시 연기에는 국경도, 나이도 상관없다니까요.”
스태프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눈앞의 촬영에 집중했다.
* * *
모두의 감탄 속에 시작된 화보 촬영.
어느덧 쉬는 시간이 되었다.
배를 채우려 식당으로 향하려는 이때.
태주는 조심스레 폴에게 제안했다.
에바가 일전에 폴이 한국에 오면 먹이고 싶은 음식이 있다고 한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한국의 ‘매운맛’.
“혹시 떡볶이 드시지 않으시겠어요?”
“우리 선생님은 매운 거 잘 못 드세요. 혀에 불날 겁니다.”
주변의 만류가 있었으나 폴은 놀랍게도 태주의 제안을 승낙했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지만, 도전해 보죠.”
“그럼 제가 근처 떡볶이 맛있게 하는 곳 아니까, 같이 가시죠.”
얼마 후.
맛있는 냄새로 가득한 떡볶이집에 태주와 폴이 마주 앉았다.
곧이어 떡볶이가 나오자, 폴은 젓가락을 들더니 떡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이 맛이었군요. 우리 아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맛이.”
그 말에 태주가 귀를 쫑긋했다.
“아내분이 떡볶이를 좋아하셨나요?”
“아내는 유독 한국 음식을 좋아했어요. 한국 친구들이 소개해준 음식 중에서도 떡볶이를 제일 좋아했죠.”
아내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듯 폴의 표정이 사르르 풀어졌다.
“에바는 항상 내게 떡볶이를 같이 먹자고 했죠. 떡볶이를 먹으러 한국에 가자는 말도 종종 했었고.”
“아마 아내분은 어르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군요. 그리고…….”
폴이 태주를 보며 슬쩍 웃었다.
“이제야 깨닫는 것 같네요. 아내가 그토록 말했던 ‘매운맛’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싶고. 화끈하면서도 동시에 달콤한, 끈질긴 이런 맛 말이에요.”
꿀떡.
폴이 떡볶이를 삼키며 차오르는 눈물을 쓱, 훔쳤다.
그러다 태주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매워서 이런 겁니다. 절대로 아내가 생각나서 그런 건 아니에요.”
“네.”
그 후로도 한동안, 폴은 떡볶이를 먹으며 코를 훌쩍였다.
그게 매운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태주는 묻지 않았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