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403
403화
처음 도전하는 연기 (4)
* * *
미국, 뉴욕 공항.
장장 12시간의 비행을 마친 태주는 뻐근한 몸을 이끌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아, 피곤해.’
[나도 피곤하다. 아주 귀에서 피 나겠어. 도대체 입을 쉬질 않더라.]이중협의 손가락이 손국영을 가리켰다.
[아무튼 저 녀석이 이번 비행에서 제일 신난 것 같아. 좀 조용히 하라고 해도 비행기 창문에 얼굴 딱 붙이고 얼마나 주변을 구경하던지.] [모든 게 신기하니까 그렇죠!]손국영이 냉큼 와서 끼어들었다.
[저는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제주도도 가본 적 없어? 개그맨 하기 전이나 후에도?] [개그맨 하기 전에는 먹고살기 바빴고, 개그맨에 합격한 후에는 병원에서 입원 생활하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죠.]그 말에 태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손국영의 인생도 참으로 기구했다.
7전 8기로 개그맨에 합격했는데, 합격한 지 6개월도 안 되어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았고.
그 후로 6개월도 안 되어 사망했다.
인생을 즐길 틈도 없이 그는 이 세상을 뜬 것이다.
그런 손국영을 보며 태주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의 한은 개그맨으로서 무대 위에서 환호를 받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엄청난 환호 속에서 태주 일행이 공항을 빠져나가는 그때.
[아, 다시 살아난 느낌이에요! 개그맨이 된 것도 저를 보고 웃어주는 저 웃음이 좋아서거든요!]환하게 웃는 손국영을 지나치니, 가득히 공항을 메운 사람들이 보인다.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반겨주는 저 엄청난 에너지.
절로 입꼬리가 씩 올라가는 밝은 기운에 태주도 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마중 나온 차에 앉아 있던 앤디 피셔.
“오랜만이에요, 태주!”
반가운 사람과의 조우에 태주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드디어 미국에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 실감 났다.
* * *
공항에서 빠져나온 차는 어느새 뉴욕 시내에 진입했다.
그러자 거리 곳곳에 붙어있는 커다란 포스터가 보인다.
[우와, 태주 씨 얼굴이에요!] [진짜네? 태주야, 네 얼굴 왕 크게 붙어있다.]손국영와 이중협의 외침에 태주는 고개를 길게 빼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빌딩 외벽에 영화 ‘나의 미래’ 포스터가 크게 붙어있었다.
포스터에 실린 건, 디에고와 태주가 서로를 노려보는 장면이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향연이 태주의 온몸을 뒤덮었다.
“저 장면 찍을 때 생각나죠?”
옆에서 앤디가 불쑥 끼어들자 태주가 씩 웃었다.
“그럼요. 디에고와 대립하는 저 장면을 찍을 때 얼마나 긴장했던지. 그래도 씬이 잘 나와서 좋아요.”
“며칠 후면 영화 편집본 시사회가 열릴 텐데, 그때는 더 좋을 거예요. 기대해요.”
앤디가 눈을 찡긋했다.
“적어도 저는 이 영화에 한 점 후회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기대되는데요? 어서 편집본 시사회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태주 씨, 시사회 전까지 시간 좀 있잖아요? 이번에 우리 영화 배급 맡은 ‘Readie’라는 배급사에 같이 가보는 거 어때요? 뉴욕에도 지점이 있거든요.”
앤디의 호의에 태주는 망설이며 변명거리를 생각했다.
“아, 그게……. 일정이 있어요.”
“무슨 일정인데요? 급해요? 비밀이에요?”
[마스크 스타 연습 때문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일정 맞지. 크크.]태주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의 앤디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톱 시크릿 일정이라 밝힐 수가 없어요.”
그런 태주에게 앤디가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답을 하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호텔에 짐을 푼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태주는 서둘러 뉴욕의 한 연습실로 이동했다.
당장 내일 마스크 스타 시즌 2 녹화가 있기 때문이다.
연습실로 이동하는 그의 복장은 무척이나 수상했는데, 검은색 츄리닝을 입고 얼굴은 거대한 나비 가면으로 완전히 가린 채였다.
XTV 측에서 잡아준 지하 연습실로 향하는 길.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태주를 부축하던 장진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어때요? 다른 사람 같습니까?”
태주가 미스터 버터플라이로 변장한 지금, 장진혁도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다.
푸른 렌즈를 끼고 검은 수염을 빽빽하게 붙인 장진혁은, 커다란 골격 덕분에 몸 좋은 외국인으로 보였다.
절대 자신들을 한태주와 매니저 장진혁으로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했다.
“몸 좋은 스턴트맨 같아요.”
“흐흐, 그럼 됐습니다. 저희 둘 다 들키지 말고, 파이팅해요. 파이팅!”
연습실에 들어가기 전 장진혁과 열정 넘치는 인사를 한 태주.
마침내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연습실에 들어서자.
이미 대열을 맞춰본 듯, 거울을 앞에 두고 서 있던 폴라리스 멤버들이 태주를 홱 돌아보았다.
“아……. 헬로.”
그들 중 붙임성이 좋다는 하강웅도 떨떠름한 듯 고개만 까딱한 이때.
윤지호가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태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폴라리스의 리더 윤지호입니다. 오늘 연습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그가 내민 손을 태주는 잡을 수 없었다.
혹여라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챌까 봐.
그래서 고개만 까딱이고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자기들끼리 속닥이는 그들을 훑고 온 이중협이 분위기를 전해줬다.
[너 제대로 찍힌 듯. 완전 거만하다는데?] [태주 씨가 오늘 춤 못 추면 엄청나게 화낼 것 같대요.]이중협과 손국영의 첩보에 태주는 피식 웃었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저 재밌었다.
그러나 그의 미소를 거만한 여유로움이라 여겼는지, 윤지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춤은 연습하셨어요? 저희가 가르쳐 드려야 하나요?”
“아뇨, 완벽해요.”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하강웅이 뭐라 나서려고 했지만, 그런 그를 멤버들이 간신히 말렸다.
그러나 다들 태주, 아니, 미스터 버터플라이가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겠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이윽고 노래가 틀어지고, 그들이 대열을 맞추는 이때.
연습실 거울로 태주만을 빤히 바라보던 멤버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무리 잘해도 아마추어 수준일 거라는 그들의 예상과 달리.
미스터 버터플라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대열에 녹아들었다.
마치 그들과 이 춤을 이미 몇 번이고 연습한 것처럼.
대열 속 서로를 스치던 멤버들은 눈으로 말하기 바빴다.
‘왜 저렇게 잘해? 혼자서 연습한 것 그 이상인데?’
‘잘하니까 할 말이 없다.’
감탄을 이어가며 연습하던 이들은 어느새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멤버 중에는 강한 의심을 품은 이들도 있었으니.
‘꼭 춤선이 태주 형 같은데?’
자꾸만 미스터 버터플라이를 힐끔거리는 하강웅의 눈이 가늘어졌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스터 버터플라이에게 다가갔다.
“태주 형?”
연습실에 가득 울려 퍼진 한국어.
그 말에 모두가 움찔하더니, 시선이 미스터 버터플라이에게 향했다.
역시나 살짝 굳어있는 모습이, 당황한 것도 같았다.
[태주야, 당황한 티 내지 마. 어쩌면 누구보다 널 제일 잘 아는 애들이 폴라리스 멤버들이잖아. 이런 상황 정도는 예측한 거 아냐?]‘알아요. 아는데……. 아잇, 당황스럽기는 하네요.’
특히나 자신을 잘 아는 연예계 동료들에게는 안 들키려고 더 조심했는데, 위기에 직면했다.
“태주 형 맞죠? 응?”
어느새 하강웅은 굳어버린 태주의 코앞까지 다가와 킁킁대고 있었다.
태주는 안 되겠다 싶어, 그대로 몸을 돌려 연습실을 나가 버렸다.
상황을 대충 눈치챈 장진혁은 태주를 대신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연습은 여기서 끝내시죠. 그럼, 녹화 때 뵙겠습니다.”
장진혁의 통보로 갑작스레 끝낸 연습.
자칫 무례하게 보이는 미스터 버터플라이 측의 대응에 폴라리스 멤버들은 당연하게도 뿔이 났다.
“뭐야, 자기가 춤을 잘 추면 다야? 이렇게 연습을 끝내버린다고?”
“근데 춤 잘 추기는 하더라. 난 우리 멤버인 줄 알았네.”
“아니, 원래 춤을 잘 춘다고 해도 우리 동선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가 있나? 그건 실제로 함께 연습해야 가능한 건데 말이야.”
“맞아. 춤추는 게 꼭 우리랑 오랫동안 합을 맞춘 멤버 같았어.”
흥분해서 수다를 떠는 멤버들 사이로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
“분명히 춤선이 태주 씨였어.”
“뭐?”
최우빈이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나 행동 가지는 속일 수 있지만, 춤선은 그렇지 않거든.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춤선은 자기의 아이덴티티나 마찬가지야. 미스터 버터플라이랑 태주 씨 둘 다 여자 춤선으로 의심될 정도로 가볍고, 하늘하늘하게 추는데, 그건 숨겨지는 게 아니거든.”
“우빈아, 어렵게 이야기하지 말고.”
윤지호도 답답한 듯 그를 재촉했다.
“미스터 버터플라이가 한태주, 맞아?”
“99.99%.”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온 최우빈의 끄덕임에 다들 놀랍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제껏 긴가민가했던 가설에 확신이 더해진 순간.
그들은 이상할 정도의 희열을 느꼈다.
가끔 회사에서 태주를 만나면 느꼈던 이상한 기시감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그가 회사 연습실에서 유토피아 춤을 연습하고 있던 것도.
매니저와 단둘이 무언가를 이야기하다가 다른 사람이 오면 서둘러 다른 주제로 넘어간 것도.
“이야, 한태주한테 이런 엄청난 비밀이 있었단 말이지?”
윤지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태주한테 연락해 볼까? 네가 미스터 버터플라이인 거 다 알고 있다고.”
* * *
“아직도 연락이 안 되네, 태주 씨. 일이 그렇게 바쁜가?”
아쉬운 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앤디 피셔.
그가 있는 곳은 뉴욕 중심가에 있는 영화 배급사 ‘Readie’.
‘레디’라고 읽는 이 회사는 ‘Ready’와 ‘Read’의 중의적인 뜻을 동시에 내포한 신생 영화 배급사였다.
‘준비된 자는 시장을 읽는다’라는 마인드를 가진 이 회사는 할리우드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공포 영화 제작으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한 선플라워 프로덕션이 신생 배급사인 ‘레디’와 손을 잡은 건 신생답지 않은 성과 때문이었다.
배급사 ‘레디’는 공격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설립 1년 차에 아카데미 수상작 ‘마이 보이’를 배급했고,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신생 배급사의 성공 배경에는 손 큰 투자자가 있기 마련.
통통한 몸집의 사람 좋아 보이는 남자가 콧수염을 뒤적거렸다.
“오늘 한태주는 안 데리고 온 건가? 꼭 좀 보고 싶었는데.”
배급사뿐만이 아니라 ‘나의 미래’ 영화에도 투자한 큰손 투자자, 하퍼 크로츠의 물음에 앤디 피셔는 공손하게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같이 식사나 하려고 했습니다만. 오늘 일정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뭐, 바쁘다면 나중에 봐도 되지. 영화 홍보하면서 식사할 기회는 수없이 있을 테니 말이야.”
앤디는 기분 좋게 웃는 투자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상당한 자산가인 하퍼 크로츠가 자신의 영화를 콕 집어 투자했다는 게.
하긴, 미국 내 판매량 1위인 자동차 회사를 소유한 그가 기업투자회사를 세워 문화산업에 관여한 것부터가 미스터리였다.
이미 돈은 넘치게 벌고 있는데, 왜 굳이 수익률이 보장되지 않는 엔터 사업에 뛰어든 건지.
“자네, 내가 왜 그렇게 한태주한테 관심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인데?”
눈치 빠른 하퍼의 말에 앤디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궁금하긴 했습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갑자기 저희 영화에 투자하셔서요.”
그 말에 하퍼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사실 일본의 마루야마 회장이 그렇게 한태주를 추천하더라고. 한태주한테 투자해서 실패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면서 말이야.”
“저도 태주 씨한테 몇 번 들은 적 있는 것 같긴 합니다만. 그분의 조언을 들으셨다고요?”
“그이가 추천한 종목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거든. 더욱이 이번만큼이나 자신 있게 추천한 건 더더욱 해야지.”
하퍼가 사냥꾼의 눈빛으로 씩 웃었다.
“반드시 성공할 종목이 눈앞에 있는데, 투자 안 하는 건 바보잖아.”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