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408
408화
천의 얼굴 (2)
아카데미 수상.
그의 말에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다들 상상만 해봤지, 감히 그것이 현실이 되리라 생각조차 못 했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지금.
하퍼 크로츠는 태주의 곁으로 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금 아카데미는 화이트 워싱 이미지를 벗어버리려 애를 쓰고 있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말 적격이지. 베일릭스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한국인 배우와 스페인 출신 할리우드 톱스타를 투톱으로 내세운 영화니까.”
그 말에 배급사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아요. 2년 전에 백인 주연에게만 상을 줬던 참사 때문에 아카데미가 욕을 많이 먹었죠. 그래서 작년부터는 아예 노선을 바꿔서 글로벌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에도 상을 주기 시작했거든요.”
그 말에 디에고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봤자 실질적으로 달라진 것 하나 없을걸요. 작년에도 결국 폴 벨포르 주연 영화가 상을 탔잖아요.”
“작년에는 그다지 경쟁할 만한 영화가 없어서 그랬지, 올해는 다르잖아. 자네도 있고, 태주도 있고.”
하퍼가 태주에게 자신감 넘치는 눈을 마주친 순간.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배우라면, 응당 상에 대한 욕심이 있지 않나?”
그 말에 태주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회장님의 말씀 중 틀린 게 있습니다.”
“뭐지?”
“저희 영화는 유색인종이 출연해서 수상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니라, 영화 자체가 좋고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해서 주목받을 수 있는 겁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불안감도 없는 태주의 말.
고요했던 영화관에서 여기저기 박수 소리가 튀어나왔다.
“맞는 말이네요. 사실 우리 영화는 그 자체로 너무 재밌는 영화죠.”
태주가 묵직한 한 마디를 보탰다.
“저도 사람인지라 수상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런데 저희 영화, 아카데미 트렌드를 제외하더라도 정말 좋은 영화고, 많은 관객이 좋아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야, 태주가 좀 성장한 느낌이 드는걸.]옆에서 손국영과 함께 태주를 지켜보던 이중협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항상 태주한테서 아쉬웠던 점이 바로 저 자신감이었는데. 배우로서 자기 작품에 자부심을 가지는 게, 마냥 겸손한 것보다 훨씬 낫지.] [저 회장님도 태주 씨의 저런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요?]“좋아, 바로 그 태도지! 그래서 내가 이 영화에 투자를 결심한 거라고.”
하퍼는 태주를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아카데미를 향한 우리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알지, 피셔 감독. 앞으로 자네가 선장이 되어 잘 이끌어 줘야 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앞길에 자네의 아버지가 있을 수도 있어. 이글맨으로 이번 아카데미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거, 알지?”
“압니다.”
앤디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대결이라고 굳이 긴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질 생각도 없습니다.”
그의 시선이 태주와 디에고를 훑는 순간.
그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흘러나왔다.
“최고의 배우들을 데리고 만든 영화니, 분명 관객들도 진가를 알아봐 주실 거로 생각합니다.”
“오케이!”
하퍼가 힘찬 목소리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우리 모두, 긴 여정을 시작해 보자고! 그 여정의 끝에는 달콤한 열매가 있을 테니!”
그 시선의 끝에는 태주가 있었다.
* * *
“그건 좀 아쉽단 말이야.”
제작사 현필름에서 한창 회의를 진행 중이던 신예지가 문뜩 말문을 돌렸다.
“우리가 만약 배급했다면 해외 영화도 진행해 볼 수 있었을 텐데.”
김 부장이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듯 눈을 빛냈다.
“혹시 한태주 씨가 출연한 ‘나의 미래’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니, 내가 어제 발레리하고 통화했잖아.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내 친구.”
신예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나의 미래’가 평단에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나 봐. 편집본 시사회가 어제 열렸는데, 거기서 반응이 정말 좋았다더라고.”
“웬만해서는 편집본 시사회에서는 감독 눈치를 봐서라도 좋다고 해주잖아요.”
“그 자리에 배급사 대표까지 있었는데, 굳이 그런 거짓된 연기를 했겠어? 아참, 김 부장도 알지? Readie 라고, 요즘 미국에서 떠오르는 배급사.”
“거기가 ‘나의 미래’ 배급을 맡았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요즘에 Readie가 꽤 공격적으로 배급을 하더라고요.”
“한국에서는 XJ 엔터가 배급을 단독으로 맡았잖아. 자기도 알지? XJ 엔터, 아무리 할리우드 영화라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섣불리 배급하지 않는 거.”
“하지만 한태주가 XJ의 총아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죠. 더욱이 넥스트 엔터가 XJ 계열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요. 그래도…….”
김 부장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태주의 스타성은 누구나 인정하는 거니까요. 이번 영화도 정말 기대되네요. 이글맨이랑 붙는다고 했었죠?”
“해외에서는 그럴걸. 그런데 아마 국내에서도 비슷한 기간 내에 붙을 거야.”
“올해 9월쯤 즈음에 개봉이라면, 안종현 주연의 영화랑도 정면으로 붙는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안종현이 영화를 찍었었나?”
“왜, 3년 전에 찍었던 휴먼멜로 영화인데 편집본 시사회에서 평이 안 좋았는지 그대로 창고행 된 거 있잖아요. 올해는 대진운을 살펴서 개봉한다고 알고 있어요.”
“창고영화면, 좀 걱정되기는 하겠네.”
“그래서 영화 개봉하지도 않았는데 안종현이 SNS에 엄청나게 광고하는 중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벌써부터 그렇게 불안해하면서 설칠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안종현 이름값이 있는데.”
신예지가 팔짱을 끼었다.
“그리고 그 영화, 9월에 개봉하는 거의 유일무이한 국내 영화 아니야? 9월에 이글맨 개봉하는 바람에 국내 영화들 대진이 다 뒤로 밀려졌잖아, 겨울쯤으로. 추석 연휴에 국내 영화 하나, 그것도 휴먼멜로? 그럼 가능성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이글맨이 버티고 있잖아요. 나의 미래도요.”
“그래도 추석 연휴에는 국내 영화에 관심이 쏠릴 거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만큼 외국 영화보다는 한국 영화를 볼 테니까. 더군다나 안종현 주연이고.”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나의 미래’가 복병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김 부장, 내가 말했잖아. 그 영화는 해외용이라니까? 한국을 겨냥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는데 어떻게 흥행에 성공하겠어.”
“대표님, 언제는 한태주 씨를 그렇게 아끼시더니, 지금은 꼭 경계하시는 눈빛입니다?”
“드라마 쪽으로 라이벌이라 그런가, 아무튼 마음이 좀 그래.”
“그러세요?”
“‘어제의 동지도 오늘의 적이 될 수 있다’처럼 연예계를 잘 설명하는 말은 없지. 아무튼, 이거 하나는 확실해.”
신예지가 기대와 불안감에 찬 얼굴을 들었다.
“올해 9월에는 영화계의 격변, 그리고 11월에는 드라마계의 격변이 일어날 거야.”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태주가 있을 테지.
한태주가 아군일 때는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더니, 경쟁자일 때는 이렇게 불안할 수가 없다.
떨리는 눈동자가 방 안을 맴도는 순간이었다.
* * *
다음날, 뉴욕 호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태주는 호텔 맞은편의 공원을 한 바퀴 조깅했다.
그리고 가져온 자그마한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 벤치에 앉아 읽고, 또 읽었다.
“하, 어렵다.”
그동안 많은 연기를 해왔지만, 이렇게까지 어렵다고 생각되는 연기는 처음이었다.
곧 있을 ‘웜 데드’의 첫 촬영은 다름 아닌 스탠드업 코미디 씬.
3일이 남았지만, 아직도 자신의 연기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특히 이번 씬이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건, 감독이 태주더러 직접 코미디 대본을 간략하게라도 쓰길 요구했기 때문이다.
-원래 코미디는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소화하기 힘들죠. 특히 스탠드업 코미디는 자신의 인생으로 관객들을 웃겨야 하는 만큼, 태주 씨가 서툴더라도 대본을 직접 써서 더욱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기를 바라요.
남을 웃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태주였지만, 다행히 옆에 손국영이 있어, 개그 포인트를 잘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지만, 촬영 날이 다가올수록 불안했다.
아니, 그날이 오지 않기를 어쩌면 바라는 것도 같았다.
연기에 자신감이 없는 자신이 낯설고, 그런 낯섦을 느끼는 자신이 싫어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런데 자꾸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옆에서 손국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개그맨들도 어려워하는 게 스탠드업 개그예요.] [국영아, 넌 개그맨이었으니까 웃기는 팁 같은 거 잘 알 것 아니야. 그런 것 좀 알려줘라, 태주한테.] [아, 하나 있기는 해요.]손국영의 말에 태주가 동아줄을 잡는 듯 절박하게 화답했다.
‘어떻게 하면 웃길 수 있어요?’
[태주 씨나 저나 얼굴로 웃기는 타입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연기를 최대한 잘해야 해요.]‘연기를요?’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게 원래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란 말이죠. 그렇다고 대본만 달달 외워서 연기하면 된다! 이건 또 아니에요. 언제 돌발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아, 진짜 어렵네요.’
[그래서 개그가 어려운 거예요. 연기는 카메라 눈치만 보면 되지만, 개그는 눈앞의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하니까요.]손국영이 태주를 위로하는 듯 손을 얹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전 태주 씨가 부러운데요? 저는 뉴욕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하는 게 꿈이었거든요.]‘그렇지, 손국영의 한은 바로 이것이었지.’
이번에는 비단 자신의 촬영뿐만이 아닌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것도 얽혀있었다.
그 생각에 거짓말처럼 태주의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 * *
그날 오전, ATC 방송국.
드라마 ‘웜 데드’의 촬영 현장을 준비하던 제작진.
시놉시스와 스토리보드를 점검하던 피디가 고개를 들어 스태프들을 바라보았다.
“태주 씨 촬영 스케줄에 지장 없대?”
“네, 괜찮을 것 같습니다. 3일 후 촬영에 합류한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앞으로 영화홍보 때문에 부쩍 바쁘다고 들었는데?”
“이제 곧 영화가 개봉하면 홍보에 들어가긴 할 겁니다. 그런데 드라마 촬영에 전혀 문제없게, 그쪽 매니저와 저희 쪽에서 조율하고 있습니다.”
“오케이. 조지아 부근에서 세트장을 마련해 뒀으니까, 우리는 그쪽에서 올해 하반기를 보내게 될 거야. 뉴욕하고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홍보할 때도 용이할 테고.”
조연출이 어깨를 으쓱했다.
“태주 씨도 이제는 깨달았을 거예요. 미국 생활은 장거리 이동의 연속이라는 것을요.”
“그런데 조지아 세트장으로 이동하기 전에, 우리가 찍어야 할 씬이 하나 있잖아. 스탠드업 코미디 씬.”
대본을 훑던 피디가 재차 스태프들에게 확인했다.
“그 씬 촬영할 장소는 섭외 완료했지?”
“소호의 레스토랑으로 대관해 두었습니다. 하루를 통째로 빌렸으니, 혹시라도 NG가 날 경우, 재촬영하기에도 수월할 겁니다.”
“그래. 태주 씨가 이번에 코미디 연기가 처음이라니까 NG가 많이 날 것 같아. 재촬영은 필수일 거야.”
“애초에 촬영 시간을 넉넉하게 생각해야겠네요.”
“미국 배우 중에는 스탠드업 코미디 경험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던데. 어떻게 태주 씨 같은 노련한 배우가 그런 경험 하나 없냐.”
“한국은 배우와 개그맨의 분야가 엄격하게 나뉘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배우들은 스탠드업 무대는 거의 서지 않는대요.”
“거참. 그럼 촬영하라고 판 깔아주면 태주 씨가 더 긴장할지도 모르겠군. 그럼…… 이렇게 하자.”
잠시 고민하던 피디가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태주 씨가 배우 한태주가 아닌 진짜 바닥에서 시작하는 무명 개그맨에 몰입할 수 있도록. 우리는 최대한 멀리 뒤에서 빠져 있고, 가게 손님들은 일반인으로 채우는 거야.”
“그럼 손님들이 태주 씨가 실망스러운 개그를 하면, 과일을 던질 수도 있는데요?”
“그게 바로 리얼리티지.”
피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우리 드라마 속 주인공은 무명 개그맨이잖아. 모두를 웃기려고 처절하게 노력하는. 그러니 리얼리티에 집중하는 게 태주 씨의 리얼한 연기에도 더욱 도움이 될 거야.”
“세상에.”
조연출이 미치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태주 씨 엄청나게 고생하게 생겼네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