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44
44화
스타성과 연기력, 두 마리 토끼 (4)
대본을 받아든 태주가 종이를 넘겼다.
기회가 왔으니 잘 잡아야 한다.
매번 절실했지만, 이번에는 더욱 그랬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것이다.
비록 이게 정식 오디션이 아니라 할지라도.
한 줄의 대사가 상대편에는 평생의 울림을 줄 수도 있는 거니까.
“어떤 씬을 해볼까요?”
“음……, 10-3 해보실래요? 거기가 아역 씬 하이라이트거든요. 그 부분 오강준 대사 좀 읊어 봅시다. 라인은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어차피 느낌만 보려고 그러는 거니까.”
전영수 피디의 말에 태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을 몇 번 숙지하고, 오강준의 감정에 몰입한 다음, 곧이어 결심한 듯 조심히 입을 뗐다.
방금까지 살짝 긴장했던 21살짜리 한태주는 더 이상 없었다.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18살의 오강준만 있을 뿐.
그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보던 곽자형.
전영수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느낌 있다, 쟤.”
“그러니까요.”
“일단 오디션 한번 봐보자.”
“오디션이요?”
곽자형에게서 나오리라 상상도 하지 못한 말.
전영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곽자형이 괜히 크흠 거렸다.
“김옥현 작가도 모셔놓고 같이 보자는 거야, 그래야 내 느낌이 맞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으니까.”
* * *
만남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태주를 곽자형과 전영수 모두 흡족하게 본 모양인지, 정식 오디션 기회까지 주었다.
“제작사 주소랑 오디션 일정 보내줄 테니까, 그때 봅시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태주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곽자형이 멋쩍은 듯 코를 훌쩍였다.
기분 좋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감독님, 대표님. 두 분을 여기서 뵙네요.”
거의 화장도 하지 않은 윤수안이 놀란 듯 인사했다.
흰 티셔츠에 스키니진이 썩 잘 어울렸다.
전영수는 자연스레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이야. 나는 뭐, 드라마 미팅차 왔는데. 수안 씨는 무슨 일로?”
“저는 매니저 오빠하고 밥 먹고 나오는 중이었는데……. 어머, 태주 씨.”
태주를 발견한 윤수안이 서둘러 눈인사를 했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저쪽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온 윤수안의 매니저가 다가왔다.
전영수와 안면이 있는 듯 반가운 표정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여기서 다 뵙네요.”
“오랜만입니다, 황 팀장님.”
“근데 여기는 웬일이세요?”
전영수가 황급히 황 팀장에게 귓속말했다.
그리고는 한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편, 윤수안은 자리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순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고운 얼굴이 태주를 빤히 바라본다.
“우리. 영화 VIP 시사회 이후로 처음 같은데, 기념으로 악수나 할까요?”
그녀가 대뜸 내미는 손을 태주는 얼떨결에 잡아 흔들었다.
윤수안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전 감독님이랑 곽 대표님 만난 거 보니, ‘당신도 누군가의 봄이었다’ 작품에 합류하는 거예요?”
“아니요, 오디션 기회를 얻었을 뿐입니다. 오강준 아역으로요.”
태주의 대답에 윤수안이 목소리를 높였다.
“잘됐다, 진짜로. 꼭 합격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같이 드라마 하더라도 함께 찍는 씬은 없겠네요. 아쉬워요, ‘그림자 무사’에서도 한 씬밖에 같이 못 찍었는데.”
태주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수안 씨는 이선우 선배님과 같이 연기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부러워요?”
“네.”
태주의 솔직함에 윤수안이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이선우 선배님 팬이라 이건 가요? 손우현 선배님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태주 씨, 이선우 선배님 엄청나게 좋아한다면서요.”
둘이 어떻게 아냐는 태주의 표정에 윤수안이 흠칫했다.
“아니, 손우현 선배님이 말씀 안 하셨어요? 저희 같은 소속사예요.”
태주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말씀하셨는데 제가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래 봬도 우리 소속사 제법 괜찮아요. ‘드림액터스’라고.”
드림액터스, 최고의 배우 소속사 중 하나로 톱스타 백시영의 매니저 출신인 장희재 대표가 세운 회사다.
드라마 및 영화 제작도 병행해 매니지먼트와 제작, 투 트랙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걸로 잘 알려져 있으며 소속 배우들에 대한 지원을 물심양면 해주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거기 형 소속사 아니었어요?’
그 말에 이중협의 눈이 커졌다.
[맞아. 데뷔부터 죽기 직전까지 있었던 소속사.]그때, 전 감독과 대화를 끝내고 돌아온 황재남 팀장이 보였다.
윤수안은 재빨리 둘을 소개했다.
“태주 씨, 이쪽은 제 매니저인 황재남 팀장님이에요. 오빠, 이쪽은 제가 말했던 한태주 씨.”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네요.”
유난히 짙은 눈썹을 가진 황재남이 쾌남 미소를 지으며 태주와 악수를 했다.
그가 보내는 호감에 태주도 약간은 긴장을 풀었다.
[재남이 형도 오랜만이네.]황재남을 빤히 바라보던 이중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는 분이에요?’
[뭐, 그럭저럭. 회사 식구였으니까.]태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중협의 과거와 맞닥뜨린 건 과연 우연일까?’
“아까 전영수 감독님이 태주 씨 칭찬 많이 하시던데요. 몇 씬 안 봤는데도 연기 잘한다고. 원래 이런 식으로 오디션 기회 얻기 쉽지 않아요. 태주 씨 연기가 워낙에 좋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갑자기 훅 들어온 황재남은 태주에게 씩 웃어 보였다.
“전영수 감독님이 그러더라고요. 태주 씨랑 꼭 함께 가고 싶다고.”
거듭되는 칭찬에 태주의 얼굴이 무안함과 경계심으로 붉어졌다.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네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요.”
[아까 전 감독하고 둘이서 뭔 얘기하던데, 너에 관한 거였나 보다.]“이제 태주 씨도 슬슬 바빠지실 것 같은데요? 취미가 아니라 직업으로 연기하시는 거면, 혼자 촬영 스케줄 감당하기도 벅차실 것 같고요.”
“아직은 그렇게까지 바쁘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아직 여유 있을 때,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황재남은 자기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태주에게 건넸다.
드림액터스, 배우 2팀, 팀장 황재남.
황재남이 그에게 확신에 찬 눈길을 보냈다.
“저희가 태주 씨의 미래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태주는 고민에 빠졌다.
저번엔 아티스타 컴퍼니, 이번에는 드림액터스.
권기도 팀장이 오퍼를 줬을 땐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강요하는 것 같아, 빨리 메이저로 빠져야 한다는 소리가 그리 달갑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비공개 오디션으로 인해 기회조차 얻지 못 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다행히 이선우가 그를 추천해서 오디션은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천운이었다.
만약 이선우의 추천이라는 행운이 없었다면 ‘당신도 누군가의 봄이었다’는 물 건너갔을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 작품을 손에 얻기란 매우 어렵다.
더욱이 그것이 모두가 원하는 좋은 작품일 경우에는, 더더욱.
소속사가 있다면 적어도 그런 기회는 놓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의문이 드는 점이 있었다.
‘황재남은 나의 무엇을 보고 내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제 어떤 점을 보고 마음에 드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황재남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희한하네, 보통 신인들은 계약조건을 가장 먼저 물어보는데.’
-애가 보통이 아니야, 신념이 확실해. 그러니 걔한테는 솔직해야 할 거야.
회사에서 만났던 손우현의 충고가 기억난 황재남.
그는 최대한 진솔하게 대답했다.
“연기자는 발전과 도전이 없다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태주 씨는 아역 때부터 지금까지,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시더군요. 그러한 모습에서 참 좋은 연기자라는 생각이 들어,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옆에서 이중협은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현재보다 미래를 보고 영입하는 드림액터스의 기조는 여전했다.
이중협은 기분이 좋은지 흥흥거렸다.
[축하한다, 태주야. 드림액터스 정말 좋은 회사야. 역시 보는 눈이 있다니까, 너 같은 좋은 배우를 단번에 낚아채다니.]“태주 씨,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네, 잘 생각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태주는 황재남과 굳은 악수를 나눴다.
* * *
한편, 차를 타고 회사로 돌아가던 윤수안과 황재남.
윤수안이 눈치를 보며 그에게 물어보았다.
“오빠, 태주 씨 어때요?”
“보통내기가 아니야. 자기 소신이 뚜렷하고 고집이 있어.”
황재남이 혀를 내두르는 모습에 윤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 씨, 아티스타 컴퍼니에서도 러브콜 받은 적 있대요. 재하 오빠 매니저가 그렇게 매달렸는데도 거절했다네요.”
“그래? 그 자리에서 거절했대?”
“‘그림자 무사’ 영화 촬영장에서 서울까지 차 태워준 적이 있는데, 그때 은근슬쩍 물었다나 봐요. 그런데 거절했대요.”
“그럼 나는 반쯤은 성공이네. 적어도 거절은 안 했으니.”
생각에 잠긴 황재남이 윤수안에게 물었다.
“‘뱀파이어의 첫사랑’ 서브남주 역에 한태주가 2차까지 올라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건 사실이니?”
“네. 재하 오빠가 그러는데, 그것도 권 팀장님이 추천해 준 거래요, 그런데 2차 오디션 보러 안 갔대요.”
“정말? 그럼, 그거 거절하고 하는 게 뭔데?”
“독립영화요. 손우현 선배님 출연하시는 거.”
“하하…… 하하하! 역시 그 과였나?”
손우현은 높은 인지도와 연기력으로 주연을 할 수 있음에도, 하고 싶은 연기를 한다며 현재 작은 독립영화에 도전하는 중이다.
한태주도 손우현 같은 소신이 강한 배우인가?
아니, 그에게선 무언가 다른 점이 보였다.
최근 ‘한태주’는 여러 기획사가 호시탐탐 노리는 배우였다.
좋은 배우가 될 재목과 스타가 될 재목이 공존하였기에.
스타가 될 것이냐, 배우가 될 것이냐.
보통 배우들은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노선을 따라가곤 한다.
그 둘을 다 잡는 건 하늘이 내려준 천운이기 때문에.
그러나 간혹 무서운 재능으로 스타와 배우, 두 가지를 모두 거머쥐는 배우들이 있다.
이선우가 그러했고, 윤수안도 그 뒤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여러 대단한 배우들을 생각하던 황재남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한 배우.
“이중협…….”
폭넓은 연기를 섭렵하며 소신을 따라가던 중, 이선우와 함께 주연으로 캐스팅되었었다.
하지만 스타가 되기 바로 직전,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거친 외모의 이중협과 고운 외모의 한태주의 결이 왜 비슷하게 느껴지는 거지?
“오빠?”
윤수안이 걱정스럽게 부르며 말간 눈을 마주쳐오자 황재남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