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451
451화
믿고 보는 배우 (3)
* * *
동 시각, 서울중앙지검.
근 몇 달간의 야근으로 초주검이 된 강승민의 얼굴에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어질러진 책상에는 그동안 모아온 ‘이중협 살인사건’의 자료들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몇 달간을 읽고, 분석하며 이제는 그의 삶의 일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이중협 살인사건’.
누구보다 열심히 수사하던 강승민은 이제 악과 깡만 남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수사관이 그에게 진한 커피를 건넸다.
“이제 한시름 놓으셔도 될 텐데요.”
“무슨 소리죠?”
“검사님, 요즘 하루하루 외줄 타기를 하는 느낌입니다.”
수사관은 피곤에 찌든 강승민과 눈을 맞췄다.
“이제 정말 마지막 퍼즐만 남았잖습니까. 이서관도 구속된 마당에 부형윤 전 검사장만 구속하면 퍼즐이 완성되는 건데, 왜 그리 초조해하시는 겁니까.”
“구속된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강승민이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저쪽에서 법무법인 ‘해신’을 쓴다고 하더군요. 전담 변호사는 우리 아버지의 선배였던, 전직 대법원장 오대인 선배님이고.”
“치사하게 인맥 찬스를 쓰네요. 부형윤 전 검사장한테 최소한의 형을 구형하라는 압박이라도 하려는 건지.”
“자칫하면 지금 구속영장, 못 나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꼬리를 끊는 식으로 이서관만 구속하고, 부형윤은 풀어줄 수도 있겠어요.”
그의 말에 수사관이 입을 씰룩거렸다.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지금 부형윤 전 검사장한테 씌워진 확실한 혐의만 몇 개인데요. 일단 결정적인 것으로 별장에서 찍은 그 동영상이 있잖습니까.”
“부형윤이 구속영장 심사에서 그랬잖습니까. 동영상 속 인물, 자기가 아니라고요.”
“그냥 헛소리하는 줄 알았죠.”
“때로는 그런 사소한 게 발목을 잡기도 하니까요. 그보다 수사관님.”
긴장을 달래려던 강승민은 다른 주제로 관심을 돌렸다.
“일전에 백산병원으로 이서관 씨를 찾아오던 입양 간 아들 있잖습니까.”
“네, 검사님.”
강승민이 바짝 허리를 세웠다.
“혹시 그 둘이 함께 있는 사진 같은 건 아직 못 찾았습니까?”
“아, 정신없어서 말씀드리는 걸 잊어버렸네요. 얼마 전에 저희가 영장 발부받아서 수색한 백산병원의 CCTV 영상에서 구했습니다.”
수사관이 자기 책상으로 가더니 한 개의 CD를 들어 달랑거렸다.
“응급실 뒤 으슥한 주차장 인근에서 대화를 나누던 이서관과 피터 그레인스키가 찍혔습니다.”
“그 둘의 얼굴도 확실히 나왔고요?”
“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던 피터가 누군가에게 입과 눈이 가려진 채, 차로 끌려가더라고요. 그리고 곧 차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일단, 그 영상부터 분석해 봅시다.”
강승민은 본능적인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피터 그레인스키의 죽음 역시, 부형윤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직감이.
* * *
같은 시각.
늦은 밤이지만, 고급 술집인 이곳에선 은밀한 만남이 이어지고 있었다.
강건한 인상의 강원경은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낸 선배, 오대인을 향해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한창 잘 시간인데, 굳이 술집으로 불러낸 이유가 뭡니까?”
“아이고, 강 교수 꼬장꼬장한 건 여전하네. 우리 둘이 만날 시간이 지금밖에 안 되니까 그렇지. 일단 술이나 들어.”
우리나라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법인 ‘해신’ 소속 변호사, 오대인.
대법원장 출신의 그는 전관예우를 받고 해신과 손을 잡으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재판에 연루된 고위 계층을 변호하며 돈을 쓸어모으는 아주 쏠쏠한 인생을.
법정의 모든 이들은 그의 후배였고, 덕분에 모든 일이 순순히 풀려갔다.
단 하나, 강원경과 그의 아들 강승민 부자를 빼고는.
“이번에 소식 들었지?”
오대인이 술을 한잔 마시고는 컵을 내려놓았다.
“내가 이번에 형윤이 재판 맡게 됐어.”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선에서 알아서 잘해보자고.”
그의 말에 강원경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끼리 알아서 하고 말게 뭐가 있습니까. 재판은 신성한 재판정 안에서 이뤄지는 거죠.”
“강 교수, 알만한 사람끼리 웬 같잖은 연기야? 다 알면서.”
오대인은 강원경에게 한층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우리끼리 쇼부를 보자, 이 말이지. 강 검사한테 자네가 잘 말해서 적당히 재판 마무리하게 해. 어차피 강 검사도 이 사건,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잖은가.”
강원경의 굳어진 얼굴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 피식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가 던진 한마디.
“강 검사 사건에 제가 관여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언제까지 득도 안 되는 사건에 자기 아들을 매달리게 할 건가? 강 교수, 그것도 아들을 방치하는 직무유기일세.”
잔뜩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이던 오대인.
표정에 미동도 없는 강원경을 보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강 원장을 설득해서 강 검사와 딜을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강승민은 검찰에서도 소문난 고집쟁이였지만. 그래도 그의 노쇠한 아버지 강원경의 말은 잘 들을 테니까.
그리고 선후배 사이 위계질서가 엄격한 이쪽 사회에서 강원경이 자기 말을 안 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강 교수, 자네도 잘 생각하게. 자네가 지금 야인으로 살고 있다고 언제까지 그럴 거로 생각하나? 로스쿨 교수로 애들 뒤만 봐주는 그런 거 말고, 진짜배기 노릇을 해 봐야지.”
“진짜배기요?”
“그래. 부형윤 그놈이 뒷구멍은 더러워도 모아둔 돈이나 정치 쪽 인맥은 빵빵하다고. 자네, 평생 시경이 뒤에 가려서 살 건가? 시경이 그 녀석은 정치질을 잘해서 위로 올라가는데, 자네는 언제까지 시시한 교수나 하고 있을 거냐 이 말이야.”
재야의 야인으로 살아가는 자신과 달리, 위로 쭉쭉 나아가는 형을 들이대는 오대인.
그에 잠시 얼굴이 굳었던 강원경이었지만, 그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선배님, 부형윤은 저희 형님과 당내에서 법무부 장관직 후보를 두고 겨루던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들은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강원경은 선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개인적인 부와 영예를 위해 가족을 배신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그는 어안이 벙벙한 오대인을 남겨두고 홀연히 떠났다.
“생각보다 더욱 완강하군.”
오대인이 거칠게 술을 한잔 마셨다.
“저 대꼬챙이 같은 인간.”
* * *
“수고하셨습니다.”
한밤중에 시작된 ‘굿맨’ 추가 촬영은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분명 밤을 새워서 피곤할 텐데도.
성공적으로 촬영을 끝낸 스태프의 입가에는 연신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모두 태주에게 향해 있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누구보다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애를 쓰던 배우, 한태주.
“이야, 정말 뿌듯한 촬영이었어요.”
주인식 감독은 태주를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연신 지었다.
“사실 오늘 태주 씨한테 많이 감명받았어요. 쉽게 갈 수도, 몸 사릴 수도 있는데, 태주 씨는 절대로 그러는 법이 없네요.”
“작품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태주가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액션 촬영하면서 제가 욕심을 냈던 것도 있고요. 저의 개인적인 욕심을 감독님께서 받아주셔서 제가 더 감사드리죠.”
“흐흐, 나는 태주 씨가 못한다고 할 줄 알고, 한번 해 보라고 큰소리친 거였거든.”
주인식은 어릴 적 자기가 할 수 있다며 또랑또랑 말대꾸하던 태주의 모습이 생각난 듯, 피식 웃었다.
“역시 태주 씨, 변한 게 없다니까. 똘똘하고 맹랑한 건.”
* * *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
태주는 조수석에 앉아 장진혁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동안 촬영하느라 확인하지 못한 여러 메시지를 보던 중.
“우왓!”
외마디 비명을 지른 태주에 장진혁이 깜짝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유나한테 문자 왔는데. 오늘 ‘꼬리잡기’ 예능 방영했잖아요. 실시간 시청률 12% 찍었다는데요?”
“진짜로요?”
장진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리고는 밝은 표정을 짓는다.
“아, 배우님. 그리고 오늘 XJ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연락 왔었는데, ‘나의 미래’ 관객 수가 650만을 넘었답니다.”
“진짜로요?”
이제는 태주가 믿을 수 없는 눈을 깜빡일 차례.
장진혁은 뿌듯한 어깨를 쫙 폈다.
“안종현의 ‘미스터 핸썸’이나 ‘이글맨’은 완전히 흥행 레이스에서 제쳐진 상태고요. 이제는 ‘나의 미래’ 독주 체제랍니다. 더욱이 ‘꼬리잡기’에서 배우님과 디에고 씨가 열심히 해주신 덕분에 흥행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저희 영화가 흥행 가도를 달리니까 기분이 좋네요. 사실 200만에서 주춤거릴 영화는 절대로 아니라고 감히,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장진혁과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던 태주.
그때 뒤쪽에서 삐용, 삐용 하는 귀가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차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양옆으로 비켜섰고, 어느새 구급차는 앞으로 쌩 나아갔다.
구급차를 보며 생각에 잠겼던 장진혁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런데 배우님, 요즘 구급차는 사설 구급차도 있는 것 아십니까?”
“사설 구급차요?”
“저번 주에 KTS에서 방영한 ‘그것이 궁금하다’에서 본 건데 말입니다.”
그가 열띤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사설 구급차는 돈만 주면 부를 수 있답니다.”
“그래요? 그럼 악용하는 사람들도 많겠네요.”
“그렇죠. ‘그것이 궁금하다’에서 A사 사모님 살인사건에 대해 다뤘는데, 거기 남편이 사설 구급차로 아내 시체를 운반했더라고요.”
[사설 구급차…….]옆에서 중얼거리는 피터의 목소리에 태주는 고개를 돌렸다.
‘사설 구급차’라는 단어에 피터는 잊혔던 과거가 생각난 듯 눈이 번쩍, 빛났다.
[한국에 와서 구급차를 탄 적 있는 것 같아요.] [네가?]이중협이 흥미로운 듯 그에게 바싹 붙었다.
[어디서 쓰러진 적 있어? 왜 구급차를 탔었는데?]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냥… 저랑 연관된 것 같아요.]그의 시선은 이제 막 떠오른 과거로 향했다.
* * *
8년 전, 추운 겨울날.
병원 앞을 계속해서 어슬렁거리던 피터.
응급실 앞에서 떠나지 않는 그를 여러 직원이 힐끗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는 환자도, 환자의 가족도 아니었다.
응급실 안 누군가를 응시하는 것 같은데,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눈치 빠른 수납원이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저 청년, 분명 응급실 의사한테 관심이 있는 거야.”
“그럼 미래의 의학도? 의사가 되고 싶어서 여기까지 견학을 온 걸까요?”
“무슨 그런 순진한 상상을 해. 그게 아니라, 의사 중 누군가한테 볼일이 있어 온 거지.”
그때,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든 수납원은 시선을 돌렸다.
응급실 밖을 서성거리던 피터를 발견한 그녀가 반갑다는 듯 눈을 휘었다.
“그 청년이네, 오늘도 또 왔어!”
“선미 씨가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아니고요. 요즘 자주 찾아와서 내가 몇 번 주스도 주고 그랬어요.”
수납원은 서류를 들고 지나가는 이서관 과장을 불렀다.
“선생님, 저기 그 남자 또 왔어요! 히피 청년이요!”
그 말에 이서관의 얼굴이 왈칵 붉어졌다.
수다를 떠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이서관은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갔다.
얼마 후, 한적한 길가 앞.
이서관은 피터와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었다.
자꾸만 폭발하려는 분노를 그는 애써 누르며 영어를 내뱉었다.
“왜 자꾸 찾아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그건 당신이 내가 누군지 알아봤기 때문에, 그래서 신고하지 못한 것 아닌가요?”
이서관이 자신과 닮은 그의 얼굴을 살피며 정곡을 찔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경찰서에 가서 당신과 나 사이, 증명할 수 있어요. 우리의 부자 관계를.”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