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469
469화
에미상 (7)
태주가 놀란 눈으로 에린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여기에…….”
“나도 LA로 에미상 시상하러 간다고 했잖아요. 비행기 타고 가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저 정도 부자면 전용기 타고 가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굳이 다른 사람들하고 섞여서 가니까 그런 거지.]이중협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에린을 바라보았다.
[패션쇼에서는 그렇게 화려한 꽃이 따로 없었는데, 오늘은 또 수수하게 하고 왔네.]패션쇼에서의 화려한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에린의 모습에 태주도 시선을 뺏겼다.
그때는 곱슬곱슬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바비 인형 같았는데.
오늘은 머리를 올려 묶고 하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것이, 여느 대학생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전용기 타실 줄 알았습니다.”
“확실히 전용기가 편하긴 했을 거 같네요. 여기 오기까지 파파라치들한테 너무 많이 시달렸어요.”
손수건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는 에린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다들 내가 태주 씨랑 같은 비행기 탄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무슨 사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비행기 타는 사이라고 말해주었죠.”
“네?”
[농담이야, 진담이야? 말을 아슬아슬하게 해서 도저히 진위를 파악할 수가 없네.]태주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에린은 씩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농담이에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 농담은 사절입니다.”
“생각보다 재미없는 사람이었네, 태주 씨. 나 보고 긴장한 것 같아서 장난친 거였는데.”
멋쩍은 얼굴을 한 에린이 말을 이었다.
“뭐, 사실 일부러 이 비행기를 탄 건 맞지만요. 소예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거든요. 민소예요.”
그 말에 태주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GX 그룹의 고명딸이자 그의 전 여자친구였던 민소예.
그녀가 여기서 등장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 했다.
“민소예와 아는 사이였어요?”
“네, 미국에서 패션쇼 애프터 파티에서 만난 이후에 친구가 됐죠.”
태주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듯 그녀는 선글라스를 슬쩍 올렸다.
“소예랑 로저 때문에 당신이 궁금해진 건 사실이지만. 지금 이렇게 당신을 따라서 비행기를 탄 건, 다른 일 때문이에요. 제가 향수 브랜드 런칭 준비 중이거든요. 그런데 거기 모델을 태주 씨가 해주면 어떨까 해서요.”
놀람의 연속이다.
태주는 피곤한 눈매를 문지르며 에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여성 향수라면 제가 아니라 다른 여자 배우를 섭외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뇨, 제가 준비하는 건 남녀노소 누구나 쓸 수 있는 향수예요. 풀냄새와 청량함이 감도는 그런 우디한 향으로 준비하고 있거든요. 제가 어제 태주 씨를 패션쇼에서 보고서 깨달았죠.”
그녀가 웃자 상쾌한 보조개가 패었다.
“딱 내가 원하는 모델이구나, 하고요.”
“그런 거라면 전문 모델을 구해도 되지 않을까요?”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배우가 필요한 데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요. 이번에 런칭할 때, 향수 테마를 담은 뮤직비디오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거든요. 그 노래는 브리짓 드하트와 미첼 커티스가 만들어 주기로 했어요.”
그 말에 태주의 귀가 쫑긋했다.
세상 어울릴 거 같지 않았던 둘이 곡을 합작한다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갔기 때문이다.
동시에, 도대체 에린 웰링턴이 쓴 돈이 얼마길래 이렇게 거물급 가수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나 싶었다.
“자세한 건 회사 측으로 서류를 보냈으니, 같이 상의한 다음 결론 내려줘요.”
“알겠습니다.”
“단, 이거 하나는 알아둬요. 예전에 찰스가 그랬죠. 당신을 보자마자 자기의 뮤즈가 될 걸 알았다고. 그때는 왜 그런 소리를 하나 했는데, 이제는 깨달았어요.”
선글라스를 쓱 내린 에린은 강렬한 초록빛 눈을 태주와 마주쳤다.
“나도 당신이 필요하다는 걸.”
* * *
동 시각, 한국.
넥스트 엔터테인먼트 대표실에 불이 환하게 켜진 가운데 다들 열심히 무언가를 토론하고 있다.
“에린 웰링턴? 웰링턴에서 향수도 출시하는 건가? 여기는 미디어 재벌 아니었나?”
“에린 웰링턴은 후계자 구도에서 제법 멀어진 모양새입니다. 모델 일에서 시작해 지금은 새로운 사업을 구축하려는 것 같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이거 사칭일 수도 있잖아.”
“제가 현지 쪽에 연락해서 여러 번 검증했는데, 사칭은 아닙니다. 뉴욕 본사에 사무실이 있고, 공장도 계약했더라고요.”
“게다가 에린 웰링턴이 현재 AAA 에이전시 소속이랍니다.”
차용석이 꼼꼼하게 서류를 훑어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래? 거긴 태주가 소속된 곳이잖아. AAA는 아무나 계약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김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에린 웰링턴이 AAA 에이전시에 소속된 건 3년 전이고, 모델로 성공한 것에 가능성을 보고 곧바로 계약했다 합니다.”
“나 같아도 하겠다, 웰링턴 가문의 상속녀잖아. 데리고 있기만 해도 떨어지는 떡고물이 얼마야?”
“글쎄요. 세간에선 그녀가 유산만 믿고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는 철없는 상속녀라 생각하는 모양입니다만. 미국 현지에서 좀 더 알아보니, 그녀는 제법 철두철미한 사업가의 면모가 더 부각된다고 합니다.”
“철두철미? 사업가?”
“애초에 그녀의 꿈은 사업가였으며, 모델 일은 그녀가 사업을 하기 전 유명세를 끌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강구하다 택한 직업이라고 합니다. 우선 유명해진 다음, 그 유명세를 이용해 사업에 성공한다. 이런 공식을 따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져 향수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한태주를 모델로 기용하고 싶다, 라.”
“향수를 설명하는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데, 미첼 커티스와 브리짓 드하트가 공동 작곡, 작사한 곡이라고 합니다. 거기 주인공은 한태주 씨로 낙점했고요.”
“그럼 향수 메인 모델, 그리고 뮤직비디오 모델. 이 두 가지를 원하는 거지?”
생각에 잠긴 차용석이 끙, 소리를 냈다.
“우리 쪽에서는 모험인 것 같기도 하고, 성공하면 관능적인 향수 모델로서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으니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만약 모델 건이 확정된다면, 촬영은 태주 씨가 미국에 있는 다음 주 중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 부분은 좀 더 고민해 보고. 일단 태주는 지금 에미상 일정 관련해서 소화하는 걸 최우선으로 하자고.”
서류를 정리하던 차용석은 한숨을 삼켰다.
지금 미국에 있을 태주에게 가장 중요한 건, 현재 일정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강승민 검사가 조만간 부형윤을 심문한다는 사실을.
* * *
어두운 검찰 조사실 안.
밖에서는 안이 훤히 보이지만,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 이곳에 두 명의 남자가 마주하고 있다.
확인할 게 있다고 부형윤을 이 자리에 부른 강승민의 얼굴은 까칠 그 자체.
서류를 뒤적이던 강승민에게 부형윤이 능글맞은 한마디를 던졌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 강 검사. 그러니까 적당히 유도리 있게 하라니까. 되지도 않는 일에 힘을 빼니 그 모양이지. 지금 사람이 아니라 시체 같아.”
“농담하실 힘이 있는 것 보니 아직 현실 파악이 덜 된 모양이십니다, 검사장님.”
“지금 현실 파악이 덜 되는 건 강 검사, 자네 아닌가?”
부형윤이 몸을 기울여 강승민에게 속삭였다.
“자네가 10여 년 전 교통사고를 다시 파헤쳐 법정에 올린다면, 나도 한태주를 법정에 세워야겠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사건을 다시 구성할 거잖아? 그럼 증인들을 전부 불러야지. 특히 그 사고를 겪은 당사자들은 필히 소환해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내 전부인은 이미 죽었고, 한태주 부모도 이 세상에 없으니. 남은 증인은 한태주 하나뿐이잖나.”
이성을 간신히 붙든 강승민이 책상을 탕, 하고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심도 없으십니까, 검사장님!”
“어차피 나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어, 강 검사.”
부형윤이 심상치 않은 눈빛을 번뜩였다.
“그런 말 알지? 원래 잃을 게 없는 놈이 제일 무섭다고. 그게 바로 나야, 강 검사. 반면 한태주는 지금 잃을 게 많은 위치에 있지. 그건 강 검사가 제일 잘 알 텐데.”
“부형윤 씨.”
“얼마 전에 미국으로 상 받으러 갔다지? 한국에서도 톱스타고, 해외에서도 톱스타네. 역시 국민 아역에서 국민 배우로 성장한 배우다워, 국위선양하고. 그런데 괜히 이 시점에서 내가 한태주를 걸고넘어지면 커리어에 흠집 나는 건 순식간이겠지.”
그 말에 강승민은 이를 꽉 악물었다.
부형윤은 그의 최대 약점이 한태주라는 것을 진작에 파악한 듯했다.
이중협 살인사건의 흑막인 부형윤은 태주가 10여 년 전 겪은 교통사고의 흑막이기도 했기에.
만약 자신이 10여 년 전 교통사고를 문제 삼으면 한태주를 증인으로 부를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승민은 이 상황을 예상했다.
“다른 이의 상처를 후벼파면서까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는 모양이신가 본데요.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검사장님. 이래 봬도 제가 검사장님의 측근인 석월근 차장님 밑에서 일하면서 배운 게 있거든요.”
강승민은 씩 웃으며 노트북을 타탁, 두드렸다.
“일전에 백산병원 병원장이셨던 손형수 씨에게서 얻은 녹취록입니다.”
익숙한 이름에 부형윤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 그 인간…. 나는 누군지도 몰라!”
“그러세요? 그런데 손형수 씨는 검사장님과의 기억이 강렬했던 모양이던데요? 검사장님이 접대한 것들을 수첩에 세세하게 적어 두셨더라고요.”
노트북에서 손형수의 녹취록이 흘러나왔다.
“백산병원에서 병원장으로 일하며 부형윤 전 검사장님과 관련해서 여러 일을 봐줬습니다. 그 일례로 천경실 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실려 왔을 때, 그분의 사망을 확실히 한 게 저희 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우리 병원 소속 의사였던 이서관이 이중협에게 거짓 사망 선고한 것도 사실이고요. 다 부형윤 전 검사장님의 부탁을 받아서….”
“그만, 그만해! 이런 거짓말을 누가 믿을 거 같아?”
“믿을 겁니다. 검사장님을 제외한 이들 전부가요.”
강승민은 이제는 혐오스럽다는 표현도 아까운지, 말을 아꼈다.
“그런데도 혐의를 인정 안 하시겠다면, 저희도 끝까지 가는 수밖에요. 인정사정없이 재판에 임하겠습니다.”
그 말에 부형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면, 불리한 건 자신이라는 걸.
* * *
“에취! 에취!”
비행기에서 내린 태주는 갑작스러운 재채기가 나왔다.
뉴욕에서 LA로 도착한 직후였다.
“누가 내 이야기 하나?”
[에어컨 바람맞고 있다가 갑자기 더운 공기 마주하니까 재채기가 나온 거 아냐?]“태주야, 각오해라. 여기는 뉴욕보다 사람들이 2배는 더 많은 것 같다. 진혁 씨, 태주 좀 부탁해요.”
게이트를 빠져나가던 박인우는 장진혁에게 태주를 부탁했다.
게이트를 에워싼 수많은 사람을 뚫고 간신히 호텔로 가는 차에 올라탄 태주.
그러나 호텔에도 수많은 파파라치와 팬들, 구경꾼들이 가득했다.
태주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사인해주면서 힘듦보다는 즐거움이 더 컸다.
만족스러움을 안고 호텔 방으로 향한 그는 ‘데스 게임’ 제작진, 출연진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했다.
“어휴,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우리 태주.”
“이제야 재회하네.”
“오늘 8시에 시상식이잖나. 일단은 좀 쉬게.”
심요연의 호들갑스러운 인사부터 모황국 감독의 점잖은 인사까지 받은 후.
약간의 휴식을 취한 태주는 시상식에 가기 전 이곳에 미리 도착해 있던 우성림을 마주했다.
예정되어 있던 간단한 인터뷰를 소화해야 했기 때문.
시상식에 대한 각오, ‘데스 게임’의 수상 가능성 등등 여러 질문에 답을 하고 나자.
어느새 오후 7시가 넘었다.
“오늘 레드카펫에도 따라오시는 거죠?”
우성림이 씩 웃었다.
“그럼요. 제가 오늘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찍어 드리겠습니다.”
“든든하네요.”
태주는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에미상 시상식이 열리는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는 거대한 레드카펫이 깔렸다.
수많은 차에서 스타들이 내리고, 주위를 에워싼 관중들이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뜨리는 가운데.
달칵.
레드카펫에 발을 디딘 태주의 귓가에 쩌렁쩌렁한 팬들의 함성 소리가 울렸다.
“데스 게임의 한태주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