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480
480화
현실과 이상 사이 (4)
20살.
성인으로 갓 접어든, 어리다면 어릴 수 있는 나이.
그러나 막 청춘이 된 만큼 더욱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나이.
한때 국민 아역이었던 한태주는 10살 때 부모님을 잃는 비극적인 사고를 겪은 이후, 마음을 닫아버렸다.
그가 마음을 연 유일한 사람들은 그의 가족과 어렸을 적부터 친구였던 서동락 뿐.
겉으로는 친절하고 다정해서 사교성이 좋아 보였지만, 사실은 정을 준 이가 몇 없었던 건 태주만의 비밀이었다.
대학에 와서도 이런 시니컬한 일상은 계속되었다.
그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얼른 돈을 벌어 어엿한 어른이 될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부, 집, 아르바이트, 그 외 다른 일상은 없던 태주의 잿빛 일상에 황금빛 물결이 다가온 날이 있었다.
학교 앞 카페에서 한창 알바 중이던 그에게 다가온 하얀 손.
그 손길의 주인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짤랑거리는 동전을 내밀었다.
“동전도 계산되죠?
그때가 민소예와 태주가 처음으로 만난 순간이었다.
카페 알바생과 손님으로 만났지만. 곧 같은 학교 동기임을 알게 된 그들은 빠르게 관계를 쌓아나갔고, 곧이어 연인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태주에게 찾아온 낯선 파도였다.
둘은 좋아하는 음식이나 관심사 등 뭐 하나 겹치는 게 없었다.
그러나 태주가 그녀에게 강렬하게 끌린 이유는 단 하나.
자신에게 없던 강력한 에너지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다.
때로는 경박한 그 미소도, 이따금 거슬리는 그녀의 거만한 언행도, 이해되지 않는 그녀의 사생활도 모두 사랑이란 감정하에 묻어갈 수 있었다.
평범했던 그의 일상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이렇게 환하게 빛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소예의 배신으로 끝을 알렸다.
“다른 남자가 더 좋아졌어. 같은 학교는 아니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별을 고하는 그녀에게 태주는 애써 침착했다.
모든 관계에 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사실 이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알겠어.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테니까, 깨끗하게 헤어지자.”
그때, 태주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민소예의 말이 들려왔다.
“네 그 고고한 표정, 정말 질리는 거 알아?”
“무슨 소리야?”
“네가 뭐라고 그런 표정을 짓냐고.”
민소예는 태주를 깔아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삼천 원짜리 떡볶이에 순대만 주구장창 먹는 그런 데이트는 진짜 질렸어. 너의 그 싸구려 방식, 정말 질렸다고. 외모가 좋으면 뭐 해, 하는 방식이 사람 질리게 하는데.”
그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말에 태주는 머리가 굳어졌다.
“그리고 나중에라도 나한테 매달리는 그런 구질구질한 짓거리 절대 하지 마. 나 그런 거 정말 질색이거든.”
마지막 일격에 그동안 꾹 참았던 태주의 뚜껑이 열렸다.
그는 민소예에게 성큼 다가가 으르렁거렸다.
“사람이 언제 제일 비참해지는 줄 알아? 누군가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야.”
“뭐야,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니, 너는 그런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미련 없이 그녀를 지나친 태주는 그렇게 정떨어지는 사랑을 끝냈다.
“그럼, 잘 가라. 나는 내 방식대로 행복해질 테니까.”
* * *
“태주 씨가 안 오네요. 도대체 무슨 통화를 하는 건지.”
앤디가 걱정으로 가득 찬 얼굴을 들었다.
태주를 기다리며 마신 커피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앤디의 눈치를 보던 박인우가 넉살 좋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금방 올 겁니다. 그런데 방금 무슨 이야기 하시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태주 씨 오면 말해 주려고 했는데, 그냥 지금 먼저 말할게요.”
금방 표정이 바뀐 앤디가 선언했다.
“우리 영화, 배우조합상 앙상블상 후보에 올랐답니다!”
“앙상블상이요? 앙상블상이라는 건 사실상 작품상이라고 보면 되는 것 아닙니까?”
박인우는 잔뜩 흥분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저번에 우리가 배우 조합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열었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겁니까? 그때 솔직히 반응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앤디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후보에 안 올라가는 것이 더 이상했죠. 지금 ‘나의 미래’에서 태주 씨도 그렇고 디에고 크루즈 씨도 그렇고 연기력을 꽤 인정받고 있으니까요.”
“그럼 관건은 할리우드의 주류에까지 인정받는 거겠군요. 아무리 요즘 유색인종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지만, 적어도 아카데미에서는 백인들의 목소리가 더 센 게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세상이 많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나의 미래’가 이번에 배우조합상 후보까지 올라간 거 보면 모르겠어요?”
자신감에 가득 찬 앤디는 주먹을 꼭 쥐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투성이에요. 그저 그런 영화쟁이였던 제가 한태주를 만나 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것도 그렇고요. 그러니 꼭 좋은 결과를 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어서 태주 씨한테도 이 소식을 알려주고 싶네요.”
박인우의 시선이 저 멀리 공원으로 향했다.
* * *
공원에서의 통화를 끝마친 태주는 곧바로 카페로 돌아왔다.
“제가 너무 늦었죠.”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태주 씨, 우리 영화 배우조합상 후보에 올라간 거 알아요?”
“정말입니까?”
표정이 안 좋던 태주는 앤디의 말에 환히 웃었다.
그러나 그때 잠시뿐 축 처진 태주의 기분은 그대로였다.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주변 사람들이 그의 기분을 알아차려 버렸다.
“다들 피곤할 텐데, 오늘 티타임은 여기까지 하고. 우리는 내일 아침에 다시 만나죠.”
그렇게 갑작스레 파해버린 티타임.
태주는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이 미안했지만, 솔직히 커피 마실 기분이 아니었기에 거절하지 않고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그 옆을 따르던 박인우는 태주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맥주나 한 캔 할래?”
“아니, 혼자서 좀 쉬고 싶어.”
“도대체 민소예가 뭔 얘기를 했길래 그러냐, 어?”
“직접 물어봐. 둘이 자주 통화하는 사이잖아.”
살짝 기분이 날카로워진 태주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왜, 기분이 별로냐?]‘네, 별로예요.’
이중협은 태주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도 당황스러웠겠다. 나쁘게 헤어진 전여친이 비즈니스적으로 이렇게 접근하다니. 내가 괜히 전화 받으라고 부추긴 거 같아서 미안하네.]‘형, 미안한데 저 혼자 좀 내버려 둘래요? 생각 좀 정리하게.’
태주는 혼자서 발코니로 나갔다.
이중협은 올리비아 러셀과 단둘이 남았다.
[거참, 쟤가 저런 적이 없었는데….] [누구라도 안 좋게 헤어진 인연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저런 반응이 나오는 법이지.]이중협이 눈을 크게 뜬다.
[역시 여사님도 전에 말씀해주신 분이 계속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뭐,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그 말에 이거다, 하고 이중협이 단서를 잡았다.
여태까지 올리비아 러셀과 함께 다니며 그녀의 한이 무엇인가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는데.
이제야 찾은 듯했다.
그녀의 눈치를 요리조리 보던 이중협은 이때다 싶어 물었다.
[제가 대장 귀신으로서, 한마디만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해 보게.] [제가 생각하기에 여사님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는 전남편인 데이빗 맥팔레인 씨 같은데요. 맞습니까?]그 말에 올리비아의 녹색 눈이 고양이처럼 번쩍였다.
그녀는 재밌다는 듯 이중협을 바라보며 얇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글쎄? 계속 말해보게. 듣고 있으니까.] [아까 여사님께서 그러셨죠. 데이빗 맥팔레인 씨는 생전에 게이로 오해받은 적이 있다고요. 그리고 그런 오해가 쌓이고 쌓여서 결국 이혼에 다다른 거라고요. 그러나 저는 다르게 봅니다.]이중협은 여태껏 대장 귀신으로서 일한 짬밥의 감이 발동했다.
이 세상에 한이 있어 남은 귀신들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대부분 비슷했다.
상대에 대한 기대감, 아니면 그들이 자신의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맥클라인 씨는 게이로 오해받은 게 아니라 사실은 진짜 게이였던 겁니다.]그 말에 올리비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니 결국 맥클라인 씨가 여사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거죠. 여사님은 가정적인 남편,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을 기대하고 결혼하셨을 테니까요. 하지만 막상 마주한 건 여사님에게 어떤 애정도 주지 않은 남편이었죠.] [흐음.] [저도 예전에 여사님 팬이어서 잘 압니다. 여사님과 맥클라인 씨는 그 당시 할리우드의 정점을 찍은 톱스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빨리 결혼하셨죠. 일각에서는 두 분이 아기 때문에 혼인을 서두르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결혼을 서두른 건 아마 맥클라인 씨였을 겁니다.]이중협은 확신에 찬 어투로 말을 끝맺었다.
[당시 게이들은 정말 많은 차별을 받았고. 특히 배우 생활을 해나가던 할리우드에서 그런 차별은 커리어에 치명적이었으니. 그걸 덮기 위해 올리비아 씨에게 청혼한 거죠. 이른바 위장 결혼이라 할 수 있겠네요.]어떠냐는 듯 이중협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자.
올리비아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참으로 똑똑하군, 자네. 역시 괜히 대장 귀신인 게 아니야. 그런데 자네가 잘못 아는 게 있어.] [제가 잘못 아는 게 있다고요?] [나는 데이빗이 게이인 줄 진작 알았네. 그걸 알면서도 결혼한 거고.] [예?]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이중협이 벙찐 순간.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걸 알면서도 내가 충동적으로 결혼했던 건, 그 사람에 대한 복수 때문이었을 거야.] [그 사람이요? 누군가요, 그 사람이?]* * *
AAA 본사.
노트북을 든 직원들이 에린 웰링턴의 사무실에 한데 모였다.
에린의 곁에는 나이 지긋한 마이크 링크도 함께했다.
아끼는 대녀가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 말에 그는 아낌없이 도움을 주려고 했다.
“일단 촬영 진행할 장소는 섭외 완료했나요? 그곳에서 뮤직비디오와 광고 둘 다 찍을 겁니다.”
“그럼요, 에린.”
직원이 자신 있게 그녀에게 말했다.
“뉴욕 인근에 있는 수도원입니다. 그곳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달맞이꽃 정원에서 촬영해보면 좋을 거 같아요.”
“그런데 수도원에서 향수 광고 진행 허가를 내주던가요?”
옆에 있던 마이크의 말에 에린이 덧붙였다.
“아저씨, 이곳은 편의상 수도원이라 불리지만. 5년 전 브래들리라는 한 와인상이 이곳을 사서 관광지로 개발했어요. 그런데 좀 음침한 구석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지는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음침하다는 건 건물 관리가 잘 안 됐다는 뜻인가?”
“제가 직접 다녀왔는데, 건물은 훌륭하게 관리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수도원의 장점은 바로 빛과 그림자, 그 두 가지 모습을 훌륭하게 표현해 놨다는 거예요.”
에린이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우리 향수 컨셉이 백조의 호수잖아요. 백조는 밝고 맑은 컨셉으로 수도원 앞에 있는 호수에서 춤을 추게 할 거고요. 흑조는 수도원 중앙에 있는 달맞이꽃 정원에서 춤을 추게 할 거예요.”
“컨셉은 좋구나. 그런데 관건은, 그걸 한태주가 표현할 수 있냐는 거지.”
“저는 한태주 씨를 믿어요. 일전에 그가 찍은 여러 광고를 봤는데, 표현력이 대단하더라고요.”
서류를 뒤적이던 에린은 마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저씨도 이 작품 제일 좋아하신다고 그러셨죠? 백조의 호수요.”
“…좋아했지. 나는 올리비아 러셀이 나온 버전을 제일 좋아했어.”
“에이, 올리비아 러셀은 배우잖아요. 발레리나가 아니라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배우가 되기 전엔 발레리나였지.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춤을 추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때 올리비아는 백조와 흑조, 1인 2역을 누구보다 훌륭하게 소화했거든.”
고개를 흔들던 마이크는 확신을 담아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올리비아 러셀이 죽은 지금, 나는 그보다 훌륭한 백조와 흑조를 볼 수 없을 거라 확신해.”
그는 감히 확신했다.
그의 뮤즈이자 첫사랑, 올리비아 러셀보다 백조의 호수를 완벽하게 표현할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