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483
483화
현실과 이상 사이 (7)
강승민의 말에 수사관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입니까? 인간이라면 그러면 안 되죠. 재판에 한태주를 증인으로 소환하다뇨.”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재판에 직접 참석해 부형윤을 마주하는 건, 한태주 씨에게 엄청난 트라우마가 될 겁니다. 해당 사건으로 한태주 씨는 아역배우를 완전히 은퇴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활동하는 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죠.”
“그래서 내가 일전에 부형윤 전 검사장한테 그렇게 경고했거늘. 태주를 재판에 소환하는 그런 뻔뻔한 짓 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잔뜩 화가 난 검사에게 수사관은 진정하라는 듯 차가운 물을 한잔 따라 주었다.
“진정하세요, 검사님. 태주 씨가 지금 미국에 있고, 10여 년 전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는 정신과 소견서를 제출하면. 아마 증인으로 참석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정신과 소견서요? 설마, 재벌들이 증인 신청을 회피할 때 쓰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수사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데 증인으로 출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리고 지금 같은 경우는 재판부도 태주 씨의 이런 상황을 인정해 줄 겁니다.”
“정신과 소견서라…. 그걸 급조하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태주가 그걸 용인할까요?”
“그래도 태주 씨를 보호하는 게 최우선이니까요.”
“아무튼, 태주가 이 일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소환장이 태주 집으로 가는 건 확실하니까요.”
시계를 확인하던 강승민이 서둘러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일단은, 태주 쪽 가족과 만나봐야겠습니다.”
* * *
얼마 후, 강승민은 뜻밖의 인물과 마주했다.
“차용석 씨?”
강승민이 살짝 굳은 얼굴로 차용석에게 말했다.
식사 자리에 부른 건 한태주의 가족인 한유경이었는데, 이 자리에 나온 건 한태주의 소속사 대표인 차용석이었다.
“어째서 대표님이 여기에?”
“유경 씨는 지금 좀 바빠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 가족분, 즉 태주의 고모인 한유경 씨에게 만남을 청했는데요.”
“모르셨습니까? 제가 태주 고모와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다는 걸. 그러니 저는 태주의 예비 고모부나 마찬가지고, 가족과 다름없는 관계입니다.”
믿음직한 눈을 번쩍이는 차용석을 본 강승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라리 잘 됐습니다. 한태주 씨 소속사에도 알리려던 참이었거든요.”
“유경 씨한테 미리 들었습니다.”
차용석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을 이었다.
“부형윤 측에서 우리 태주를 증인으로 신청했다죠? 거참, 그쪽은 도대체 낯짝이라는 게 있는 인간입니까? 10여 년 전 사고로 태주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면서 그런 짓을 벌여요?”
“이게 다 제 불찰입니다.”
강승민이 이를 갈았다.
“일전에 부형윤 전 검사장을 심문하며 미리 경고했는데, 그게 오히려 그 사람을 자극한 모양입니다. 제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주를 소환한 걸 보면요.”
“하지만 검사님, 저희 태주 재판에까지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차용석의 눈길이 일연 심각해졌다.
“10여 년 전, 부모님을 잃고 연기에 대한 꿈을 완전히 잃어버린 태주가 이제야 용기를 내서 다시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밤마다 부모를 찾으며 울던 어린아이가 이제는 연기를 사랑하는 배우로서 우뚝 선 겁니다. 그런데 인제 와서 10여 년 전 그 사고의 증인으로 불려가다니요?”
“대표님, 저도 그 참담한 심정을 압니다. 그러나…….”
“아니요. 절대로 안 됩니다.”
태주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차용석의 눈이 눈물로 젖어 들었다.
“또다시 태주에게 그때의 고통을 상기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누구보다 태주를 아끼는 만큼 상처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한숨을 삼킨 강승민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태주에게는 이 사항을 전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증인 출석 통지서가 날아오지도 않았습니다만.”
“이제 곧 연락이 갈 겁니다. 그렇지만 이걸 미리 말해드리는 이유는, 그 전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알겠습니다.”
차용석의 머릿속에 미국에 가 있는 태주가 그려졌다.
매일 같이 올라오는 매니저의 보고에 따르면 태주는 그 누구보다 즐겁게 미국에서 ‘나의 미래’ 시사회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했다.
힘들 법도 한데, 오직 영화의 성공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뛰고 있다고.
그 말이 진짜인 듯 이틀에 한 번씩 걸려 오는 태주의 전화로도, 그의 신난 기분을 알 수 있었다.
-열심히 연기한 것뿐인데, 많은 분께 인정받아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형.
“그저 연기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애일 뿐인데….”
차용석이 주먹을 꼭 쥐었다.
“저는 태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 할 겁니다.”
* * *
몇 시간 후, 미국.
이른 아침부터 짐을 챙긴 태주는 ‘나의 미래’ 스태프들과 함께 공항으로 가는 전용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는 중에도, 공항에 도착한 이후에도 태주는 여러 사람에게 짓궂은 질문 세례를 받았다.
“어제 호텔 로비에서 팬들하고 같이 찍은 사진은 뭡니까? 하얀 스타킹에 망토? 할로윈 의상이에요?”
“아, 그게….”
“심지어 그 차림으로 호텔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전부 사인을 해줬다면서요?”
“아, 우리하고 술 마시러 갈 때는 그런 요상한 차림 아니었는데. 우리만 그 재밌는 광경을 놓친 건가요?”
사람들이 이렇게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건, 어제저녁 태주와 사진을 찍은 팬들의 SNS 후기가 속속들이 올라왔기 때문.
파파라치를 따돌리려 입었던 망토와 스타킹 복장을 한 채 태주는 곧바로 호텔로 향했고.
그곳에서 망토에 달린 모자를 벗자, 팬들이 기다렸다는 듯 태주에게 달려든 것이다.
[파파라치 따돌리는 데는 성공했는데, 호텔에 있던 팬들까지 따돌리지는 못했지.]앤디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태주에게 쓱 붙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태주 씨. 그런 싸구려 발레 공연하는 곳에는 왜 간 거예요?”
“네?”
“인우 씨한테 들었어요. 셋이서 갑자기 발레 공연을 봤다기에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그런 곳을 갔더만.”
“싸구려 발레 아니에요, 발레에 급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
“에이, 어제 태주 씨가 매니저 대동하고 간 곳은 뉴욕 발레단 같은 곳이 아닌 C급이잖아요. 발레 보고 싶었으면 저한테 말하지. 뉴욕 발레단에 아는 친구 있어서 표 싸게 구할 수 있거든요.”
“뭐, 다음에는 부탁드리겠습니다.”
비행기 줄에 합류한 태주는 앤디를 슬쩍 보았다.
“그런데 발레 하시는 분들은 다들 부잣집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으신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발레 하는 분들이 다들 부자인가 보죠?”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액의 교육비와 의상 및 신발 가격을 생각하면 돈 없는 분들이 하기는 어렵죠.”
“뭐, 미국도 비슷해요. 돈 있는 이들이 주로 하는 게 발레고, 예술이지만, 돈 없는 사람들도 할 수는 있죠. 순탄치만은 않겠지만요.”
앤디가 입가를 씩 끌어올렸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힘을 내야 해요. 지원받은 것도, 인맥도 없이 오직 자력으로 올라온 우리가 일을 내야 한다고요.”
“압니다, 감독님. 이번에 배우조합상에서도 저희 영화,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태주가 확신을 가진 채 씩 웃었다.
“두고 보십시오. 분명 저희, 성과를 낼 테니까요.”
* * *
몇 시간 후, 태주 일행은 LA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태주를 맞이하는 엄청난 인파에 그는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일행과 함께 공항을 빠져나가던 태주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태주 씨, 절 꽉 잡으십시오!”
그런 그를 마치 바위처럼 단단히 지탱하던 장진혁도 내심 놀란 듯했다.
얼마 후, 그들이 간신히 공항을 빠져나오고.
미리 대기하던 차에 냉큼 올라타자, 그 안에는 태주를 반갑게 맞이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태주 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
태주의 양쪽 볼에 키스를 날리는 에린 웰링턴.
그리고 그런 그녀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노인이 점잖은 손을 내밀었다.
“마이크 링크일세. 잘 부탁하네.”
“아, 안녕하십니까.”
태주는 왠지 익숙한 느낌의 노인을 힐끔거렸다.
그런 태주의 궁금증을 풀어주듯,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AAA의 대표인 알렉스가 내 아들이라네. 난 그곳의 고문으로 있지.”
“아, 그래서 닮으셨군요.”
“어려워하지 말고 마이크라고 부르게. 이미 현장에서 물러난 지 한참 된 늙은이일 뿐이니까.”
호쾌한 웃음을 짓는 마이크는 젊었을 적에는 매우 잘생겼을 외모를 자랑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물러났다는 말과는 달리, 옆에 있던 앤디는 그를 무척이나 경외하는 눈치였다.
“태주 씨, 저분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1970년대부터 제작자로 일하면서 현장을 주름잡으셨죠. 저런 분이 AAA의 고문으로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렇게 대단하신 분입니까?”
“그럼요! 저분이 제작한 영화만 40편이 넘는데, 그중에 20편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고. 손익분기를 넘긴 작품이 50%를 넘죠. 제작자로서 이런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태주 씨가 더 잘 알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던 태주는 옆에서 이중협의 목소리를 들었다.
[올리비아 여사님이 아무 말도 없으시다.]평소 같다면 태주가 처음 만난 사람들을 평가하기 바빴을 올리비아 러셀.
연륜의 눈으로 그 사람의 인격이 다 보인다나 뭐라나.
그러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사님? 말씀이 없으시네요.’
태주의 말에 올리비아는 흠칫, 눈을 깜빡였다.
고양이와도 같은 예민한 그녀의 시선이 마이크에서, 다시 태주에게 돌아온 순간.
[저 이가 내가 인연을 끊었다던 그 친구일세. 마이크 링크, 나의 소울메이트.]‘아!’
태주의 놀란 시선이 다시 마이크에게 향했다.
그러고 보니 저 주름진 눈매에 왠지 모를 사연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태주는 마이크의 새파란 눈과 마주쳤다.
“응?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네?”
순간 당황한 태주는 에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에린 씨를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우셔서요.”
“어머, 태주 씨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왜 이렇게 기분이 좋죠? 기분이다, 오늘 내가 태주 씨 파트너 해줄게요!”
환하게 웃는 에린의 뒤로 마이크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창문에 비치는 태주에게, 그의 시선이 꽂혀 있었다.
* * *
그날 밤.
LA에 도착한 태주는 마이크의 초대로 한 그랜드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배우 앙상블상 시상식은 내일이었지만, 식당 곳곳에는 배우들이 즐비했다.
[우와, 여기가 배우들 맛집인가 보네. 여기저기 유명인들 천지야.]‘밥이 제대로 안 넘어가요. 유명한 배우들 구경하기 바빠서.’
태주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로저 싱클레어가 어디 있는지 유심히 살폈다.
아까 로저에게서 그가 배우 시상식에 시상자로 참석한다는 문자를 받았기 때문.
그러나 그가 식당에서 보이지 않아, 태주는 내심 아쉬웠다.
한창 수다를 떨던 태주의 테이블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열심히 오갔다.
“저기 데이빗 맥팔레인 씨도 계시네요. ‘나의 미래’에 그렇게 비판적인 말을 하셨는데, 과연 우리 영화에 한 표를 던져 주셨을지 궁금하군요.”
“저 친구가 고지식하긴 해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네.”
앤디의 말에 마이크가 대답했다.
“자네 아버지랑 친하긴 하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선에서 자네 영화를 평가했을 걸세.”
“글쎄요, 나의 미래가 퀴어 영화에 가깝다면서 얼토당토않은 비판을 하셨습니다만.”
“퀴어 영화라고? 태주와 디에고 사이가 그렇게 느껴졌던 건가? 흠…. 나는 납치범과 인질 사이의 브로맨스 정도로 생각했는데.”
마이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저 양반이 그런 류의 영화를 싫어하긴 해. 남남 케미, 여여 케미 그런 것을 못 견디더라고.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맥팔레인 씨를 잘 아시나 봅니다?”
태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올리비아가 마이크만 줄곧 바라보던 것이 걸려서, 자신이라도 뭐든 알아내야겠다고 다짐한 거다.
태주를 마주한 마이크는 복잡한 눈빛을 내보였다.
“데이빗과는 70이 다 돼서야 친분을 쌓게 됐지. 그전에는 말도 붙이지 않았어.”
“제작자와 배우 사이는 원래 좋지 않나요?”
“그게 보통이지만, 우리 사이는 좋을 수가 없었어.”
마이크가 태주에게 눈을 번쩍였다.
“내가 평생을 사랑했던 여인이, 그 남자의 여자가 되어 버렸거든.”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