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491
491화
마지막 속죄 (1)
* * *
“어머, 이것 좀 봐. 한태주가 공판에 증인으로 참석한대!”
“무슨 재판인데요?”
“왜, 그거 있잖아. 한태주 부모님 돌아가셨다는 그 교통사고. 아니, 이젠 사건이고 해야지. 암튼 그거랑 관련된 재판에 부형윤이 한태주를 증인으로 신청했다나 봐. 그런데 한태주가 받아들인 거고.”
“진짜 한태주도 기구한 인생이다. 부모님을 잃은 그 교통사고가 사실은 부형윤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다는 걸 이제야 안 거잖아. 도대체 어떤 심정일까?”
그때 한창 수다 중이던 패션 잡지회사 직원들이 일순간 입을 꾹 다물고, 서둘러 흩어져 제 자리에 앉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한유경을 의식한 듯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던 한유경이 자리에 앉는데.
미처 치우지 못한 종이신문이 책상에서 툭, 떨어졌다.
매일 아침 회사로 배달되는 경진일보의 1면에 크게 난 기사가 보였다.
그것을 집어 든 한유경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다들 기사 보셨구나.”
그 말에 주변 직원들이 옳다구나, 벌 떼같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자기야. 태주 씨 진짜 증인으로 참석한대?”
“공개 재판이니까 우리도 방청하는 게 어떨까요? 방청석에 앉는 것만으로도 한태주 씨에게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잖아요.”
“유경 씨는 공판에 당연히 갈 거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수많은 질문.
한유경은 차분한 시선으로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다들 태주 걱정해주시는 건 감사해요. 그런데 이거 하나는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 생각만큼 태주, 그렇게 약하지 않다는 거.”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해도, 한유경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그녀는 잘 알았다.
미디어나 언론이, 이번 일에 대해 얼마나 물고 늘어질지 말이다.
마치 10여 년 전, 새언니와 오빠를 잃은 그 사고 직후처럼.
* * *
한편, KTS 교양국에서도 긴급회의가 열렸다.
요즘 한창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던 ‘그것이 궁금하다’ 팀이었다.
“저희 프로그램에서 한태주 씨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뤄야 할 때가 아닌지 생각됩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던 아이템들 있잖아. 그걸 다 미루자고?”
“네.”
조연출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피디를 바라보았다.
“저희 프로그램 기조가 무엇인가요. 시청자들이 궁금해하는 사건들을 뿌리부터 파헤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일환으로 볼 때 지금 시청자들이 제일 알고 싶어 하는 건 10여 년 전의 그 사고! 한태주 씨가 부모를 잃었던 그 사고입니다.”
“사고가 아니라, 이제는 사건이라고 불러야지.”
피디가 무거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이 사건을 다룬다면, 정말 진지하고 심각하게 접근해야 할 거야.”
“알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 전에도 섣불리 이 사건을 취재했다가 욕먹은 선배들 많았어.”
당시를 회상하던 피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한태주 씨 보호자가 고모였지 아마? 방송국에 전화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
“한태주 씨 고모가요? 아니, 도대체 방송을 어떻게 했길래 그래요? 웬만하면 출연자 가족들이 제작진한테 그렇게 따지는 일은 흔치 않은데요.”
“방송의 방향이 잘못됐던 게 아니야. 제대로 다뤄보지도 못했거든. 한태주라는 이름이 미디어 노출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아서.”
“아, 그래서 한태주 씨가 연예계에 복귀하며 사연을 말하기 전까지, 그런 과거가 있었던 걸 사람들이 몰랐던 거군요.”
“맞아. 그걸 위해 한태주 씨 고모가 매일 같이 방송국에 클레임 걸고, 피해자 가족 인터뷰도 필사적으로 거절한 거야.”
“그럼, 이번에는 저희가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잘 만들면 되죠! 한태주 씨 과거도 다 밝혀진 마당에 망설일 이유가 없어요.”
조연출이 주먹을 불끈 쥐며 자신의 의지를 다졌다.
“선배님, 이번 한태주 씨 사건에 많은 방송국이 눈독 들이고 있다는 건 이미 잘 아실 겁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희가 남들보다 이 아이템을 잘 준비해서. 한태주 씨 앞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방송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때? 한태주 씨 사건 관련 아이템을 먼저 당겨쓰는 게 좋겠어?”
피디의 말을 들은 팀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다 하기 전에, 저희가 발 빠르게 제대로 된 방송 만들어서 내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저희는 1회 때 한태주 씨를 게스트로 모신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한태주 씨와의 친분을 이용해서, 그분의 진솔한 인터뷰를 따도 좋고요.”
“…좋아.”
여러 팀원의 말을 들은 피디가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한태주 사건’은 방송가에 핫하게 떠오른 사건이고. 누군가 맡을 거라면, 우리가 제대로 조사해서 좋은 방송을 내놓는 게 맞겠지.”
* * *
다시, 미국.
동이 채 트지 않은 새벽부터 시작된 촬영은 어느새 저녁을 지나 이제는 달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밤으로 흘렀다.
태주는 백조 의상에서 흑조 의상으로 갈아입은 뒤.
장시간의 촬영으로 피곤했지만, 그의 눈만은 열정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반짝이는 흑요석을 붙인 날개를 달고, 검은 바지와 검은 나시를 입은 채 카메라 앞 자신을 확인했다.
“야성미를 강조해야 하니까, 머리카락을 젖게 해서 떨어뜨리면 좋을 것 같다.”
옆에서 박인우가 태주 머리에 칙칙 분무기로 물을 뿌리자, 젖은 머리가 이마에 살짝 붙었다.
백조가 순수하고 신비스러운 매력을 강조했다면, 흑조는 도발적이고 유혹적인 매력을 뽐냈다.
“나 한 번만 다시 연습해 볼게.”
“그렇게 연습하고도 또? 근육 올라온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다소 간단하고 직선적이었던 백조의 안무와 달리, 흑조의 안무는 제법 격정적이면서도 복잡했다.
애초에 ‘흑조의 유혹’이라는 컨셉이 상대방을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것이었기 때문.
너무 촌스러워 보이지 않게, 그러나 도발적인 느낌을 살려야 했기에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했다.
‘어때요, 여사님. 제 안무에서 우아함이 잘 느껴지고 있습니까?’
태주가 옆에 있던 올리비아를 힐끗했다.
전직 발레리나였던 그녀는 태주가 종종 과잉될 때면 잘 바로잡아줬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별다른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퍼펙트. 자신감만 가지고 하면 100점이겠어.]그때, 옆에서 태주를 보던 에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런 흑조가 있다면 난 당장이라도 뛰어가 품에 안길 텐데.”
그에 태주의 자태를 감상하고 있던 마이크가 웃었다.
“네가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이런 밤중에 남자의 품에 안기는 건 자제했으면 좋겠다. 혹시 네가 본 게 사람이 아닌 유령일지도 모르잖니.”
그 말에 태주도 입꼬리를 씩 올렸다.
“마이크 씨 말씀이 옳습니다.”
“그렇지? 한국에도 이런 밤중에는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말이 있나 보군?”
“제가 얼핏 듣기로는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가 음기가 제일 잘 흐르는 시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힘이 넘치는 건가? 안 그런가요, 여사님?]이중협이 재밌다는 듯 킥킥대며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올리비아도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동의했다.
[맞아. 항상 이 시각만 되면 힘이 넘치고는 했었지.]그녀는 태주한테 말을 거는 마이크에게 시선이 쏠렸다.
“이 씬에 특히 기대를 많이 하고 있네.”
“흑조의 유혹이요? 원작 발레 씬을 기대하셨다면 실망하실 텐데요. 원작에서는 오딜과 왕자가 함께 춤을 추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오딜이 혼자서 독무를 추며 상대방을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이 안무도 상당히 인상적이야.”
“이제는 저를 인정하시는 겁니까?”
태주가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새벽부터 이어진 촬영을 지켜보며, 소위 ‘백조의 호수’에 일가견이 있다는 마이크는 내내 걱정했다.
“내 걱정이 기우였던 거지. 이제는 자네의 백조, 그리고 이어질 흑조의 촬영까지 너무 기대된다네.”
마이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오랜 시간의 촬영에도 자신의 연기를 기대해주는 관객이 있으니, 태주는 더욱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럼,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때마침 들려온 촬영감독의 말에 태주는 수도원 앞마당에 있는 화원으로 향했다.
황금빛 달맞이꽃이 이지러지게 피어 있는 정원은 둥그런 형태였다.
그곳 중앙으로 태주가 걸어가 서자, 카메라 안 프레임을 체크하던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딱 좋습니다!”
옆에 있던 음향 감독도 촬영장에 재생될 음악이 준비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저희도 준비되었습니다!”
“그럼, 음악과 함께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레디, 셋… 고!”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바이올린 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자.
태주가 손을 하늘 높이 올렸다.
그렇게 흑조의 유혹이 시작되었다.
* * *
달빛이 이지러지는 달맞이꽃으로 채워진 한 화원.
달콤한 향이 코끝을 찌르고, 그 향기에 빠져드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이때.
그곳에서 홀로 춤을 추고 있는 흑조.
길쭉한 팔을 하늘로 뻗은 태주가 몸을 천천히 돌려 카메라를 응시한다.
상대를 홀릴 듯한 어두운 눈동자와 하늘거리는 요염한 자태가 인상적이다.
수줍고 부끄러웠던 백조의 춤이 마치 첫사랑과도 같았다면.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데 당당한 흑조는 마치 서로에게 깊이 끌려 충동적으로 하룻밤을 함께한 사이 같았다.
앞뒤 생각하지 않고, 오직 현재의 쾌락에만 몸을 맡기는 그런 사이.
그것이 ‘미스 올리비아’를 쓰는 사용자들을 이끄는, 흑조의 매력이었다.
정신없이 태주를 보던 촬영감독은 에린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감독님, 태주 씨는 카메라 안에서나 밖에서나 너무 좋지 않아요?”
“네?”
“모델들 촬영해보면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의 모습이 실제 보는 거랑 사뭇 다른 사람들 많잖아요. 그런데 태주 씨는….”
에린이 침을 꼴딱 삼켰다.
“지금 제가 보는 흑조의 매력이 카메라 안에 고스란히 담기는 것 같아요.”
“나중에 광고가 나가면 분명 시청자들도 똑같은 전율을 느낄 겁니다.”
“마이크 아저씨한테도 물어봐야겠어요.”
성공한 제작자의 감은 언제나 옳다고 했던가.
에린은 옆에 있던 마이크를 슬쩍 찔렀다.
“아저씨. 이 향수 광고, 이 정도면 대성공이죠?”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정신없이, 홀린 눈으로 태주를 보는 마이크만 있을 뿐.
그는 한태주의 모습에서 올리비아를 연상했다.
“너무 비슷하군. 자신감 있게 뻗는 저 팔도, 힘찬 도약도.”
평소 태주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익숙함이, 발레 안무를 하는 지금은 너무나도 생생히 전달된다.
“어째서 태주를 보는데 올리비아가 떠오르는 거지?”
누구보다 당당한 몸짓과 매력으로 상대방을 압도했던 그녀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팔짱을 끼고 정신없이 태주를 보던 마이크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린 건 그때였다.
“…보고 싶군, 올리비아.”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중얼거린 혼잣말.
그러나 그에게서 우러나온 진심에 올리비아는 그의 곁으로 향했다.
[마이크?]기적처럼 올리비아에게 속으로 되뇌던 마이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보다 자신감 있던 널 동경했고, 누구보다 매력 있던 널 사랑했어. 그리고 누구보다 사랑받았던 널 지금도 아끼고 있어. 듣고 있니, 나의 뮤즈, 나의 사랑 올리비아?
[듣고 있어, 마이크. 근데 이제야 이 말을 해주면 어떡해?]올리비아는 후련함, 아쉬움, 기쁨, 속상함 등이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느리게 움직이던 태주가 번쩍, 한 차례 하늘로 높게 뛰어오른 순간.
“…올리비아?”
제게서 익숙한 올리비아의 향기를 맡은 마이크가 눈을 감았다.
황금빛이 그를 감싼 순간이었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