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51
51화
소나기 (2)
태주는 여러 번 오가며 제법 익숙해진 윤지호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윤지호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그를 맞이했다.
“태주야, 오늘 버스 타고 왔지?”
“네. 어떻게 아셨어요?”
그가 화면을 가리켰다.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에 그의 사진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버스에 앉아있던 그의 모습이.
“이건 또 언제 찍은 거지? 이걸 왜 찍었지?”
“유명하니까 찍었지. 지금 너, 인지도 장난 아니게 올라갔잖아.”
태주의 당황스러움을 본 윤지호가 피식 웃었다.
“여기 ‘한태주 갤러리’도 있는데, 몰랐어?”
여러 글을 확인해 보니 정말 다양한 사진들이 있었다.
태주가 혼자 영화관에서 ‘자유 선언’을 보는 순간.
연희대 교정에서 책을 보며 걸어가는 순간.
임강현과 디저트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남자 둘이 초콜렛 마카롱을 먹는 사진에 이중협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 저거 귀엽게 잘 나왔다!]“임강현 씨 팬미팅도 다녀왔다더니, 둘이 진짜 친한가 봐? 이런 데도 같이 가고. 나도 성광이랑 카페는 가봤어도 디저트 카페는 안 가봤는데.”
윤지호의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태주는 그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푹 숙였다.
팬미팅 이후 임강현과 제법 친해져서 함께 간 곳을 들키다니.
임강현이 핑크핑크 한 디저트 카페에서 만나자고 하면 앞으로는 절대로 안 나가야지.
[얌마, 그거 가지고 뭐 그렇게 부끄러워하냐. 나는 이선우랑 더한 곳도 다녀봤는데. 고양이 카페, 양 카페, 너구리 카페, 아이고, 온갖 동물 카페는 다 가 봤네.]‘저 위로한다고 괜히 안 그러셔도 돼요. 그리고, 이선우 선배님이랑 형이랑 그렇게 친한 사이였어요?’
[우리가 연기적으로는 선의의 라이벌이었어도 사적으로는 아주 친한 친구였어.]그 순간, 태주의 상상 속 이선우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다.
와인을 마시며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책을 읽으실 줄 알았는데.
고양이 카페? 너구리 카페?
그런 태주를 보던 이중협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선우가 먼저 가자고 해서 간 곳이야. 걔도 임강현처럼 이런 데만 좋아하더라. 아무래도 우리는 그런 친구들만 꼬이나 봐. 뭐,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야지 뭐.]* * *
휴식도 잠시, 태주는 윤지호의 디렉팅으로 노래 녹음을 완료했다.
저번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코러스 부분도 그의 목소리로 채웠다.
강성광 작곡 및 작사, 윤지호 노래, 한태주 피처링.
완벽한 조합에 좋은 노래가 탄생했다.
“어때?”
노래의 최종본을 들은 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가 신나면서도 서글픈 것이 좋았다.
성광이가 살아있었다면 정말 좋아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좋아요. 정말로요.”
윤지호가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우리 팀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이 곡을 앨범에 타이틀로 넣으려고 해. 그래서 말인데. 태주야, 뮤직비디오 촬영에 협력해 줄 수 있을까?”
“뮤직비디오요?”
“이번에는 세트장 빌려서 찍는 게 아니라 핸드폰으로 찍기로 했거든. 이 노래 자체가 청춘이 키워드니까, 너무 프로페셔널하지 않고 좀 러프하게 보이고 싶어서. 너는 자연을 배경으로 해서 노래 부르는 영상 보내주면 좋을 것 같아.”
그건 할 수 있지.
태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지호가 덧붙였다.
“그리고 시간 되면, 음악방송도 같이 나가 줄 수 있을까?”
‘음악방송까지?’
낯선 제안에 태주가 망설였다.
“그건…….”
“이 곡의 피처링을 네가 했으니, 적어도 방송 하나쯤은 너랑 같이 출연하고 싶어서. 어쨌든 성광이 곡을 알린 건 너였으니까.”
윤지호의 거듭되는 제안에 태주는 고심했다.
“스케줄 정리하고 연락드릴게요. 이번에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서, 일정이 어떻게 될지 아직 가늠이 안 돼서요.”
“아, 그러네. 태주야, 늦었지만 드라마 캐스팅 축하해. 그것도 이선우 아역이라니, 정말 대단하다.”
윤지호의 열렬한 칭찬에 태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뭘요.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형, 나 치킨 시켰는데 같이 먹자.”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하강웅이 츄리닝 차림으로 들어온 순간.
태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한태주 형!”
“윤지호 씨 노래 피처링 때문에 잠깐 와 있었습니다.”
하강웅은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했다.
태주를 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있었다.
자신을 조금 불편해하는 듯한 하강웅을 본 태주가 바짝 허리를 세웠다.
그도 편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특히나 같은 배역을 놓고 경쟁했던 사이였고, 이선우 아역을 거머쥔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한 작품에서 같이 연기를 할 사이다.
태주는 그에게 진솔한 속내를 털어놓기로 했다.
“하강웅 씨. 앞으로 드라마 같이 찍게 되었는데, 잘 부탁합니다.”
“아, 네…….”
“저도, 강웅 씨도 한 배역을 따내기 위해 노력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강웅 씨가 오강준 역할을 놓쳐 이렇게 아쉬워하는 건, 연기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하강웅이 그를 쳐다보았다.
* * *
새벽까지 일정을 소화한 후 차에서 쪽잠을 잔 하강웅은 윤지호를 보기 위해 치킨을 사 들고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형, 나 치킨 시켰는데 같이 먹자.”
그런데 그곳엔 한태주가 있었다.
‘아, 왜 이렇게 어색하냐…….’
저번에 녹음실에서 봤을 때보다 지금이 더 어색했다.
‘아마 그건 태주 형이 이선우 아역을 맡았기 때문이겠지.’
2차 오디션까지 본 그 배역에 자신이 아닌 태주 형이 돌아가자, 회사에서는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하강웅은 억울했다.
처음부터 그는 이선우 아역이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와중에도 책임감을 가지고 정말 최선을 다해 오디션에 임했다.
오강준 역할에 한태주가 더 어울린다고 판단한 건 제작진이었다.
그렇지만 회사 측에서는 다 된 밥에 초 친 건 자신이라며 싫은 소리를 해댔다.
그래서일까, 괜스레 태주에 대한 미움도 생겼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눈친 챈 걸까?
태주가 먼저 손을 내밀어줬다.
“저도, 강웅 씨도 한 배역을 따내기 위해 노력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강웅 씨가 오강준 역할을 놓쳐 이렇게 아쉬워하는 건, 연기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말에 하강웅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속내를 알아준 것 같아서, 새삼 놀랐으니까.
태주가 진실한 감정을 실어 말을 이었다.
“강웅 씨가 이렇게 연기에 대한 열정이 많은 배우라서 자극이 됩니다. 저도 강웅 씨한테 지지 않도록 열심히 연기할 테니까, 앞으로 재밌게 연기해 봐요. 저희, 같이 으쌰으쌰 하는 동료잖아요.”
그 말에 하강웅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그저 태주를 미워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난 그저 태주 형이 불편하기만 했는데, 이 형은 나를 같은 연기자로서 존중해주고, 동료로서 인정해 주는구나.’
회사도 인정해 주지 않은 자신을.
“그럼 가볼게요.”
태주가 짐을 챙겨 일어나던 순간.
하강웅이 덥석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강아지 같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가 자그맣게 말했다.
“치킨 먹고 가실래요?”
* * *
본격적인 치킨 회동이 열렸다.
태주는 하강웅에게 닭다리를 건네주며 말했다.
“솔직히 걱정했습니다, 제가 강웅 씨 역할을 뺏은 거로 오해하는 게 아닌가…… 하고요.”
하강웅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제 역할이라뇨, 처음부터 정해진 건 없었는데요, 뭘.”
윤지호가 옆에서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정해진 게 없다니, 너 이선우 아역으로 2차까지 갔었잖아.”
태주의 눈빛에 하강웅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2차까지 간 건 맞는데……. 아무튼, 나는 지금 역할에 매우 만족해. 이상구 역은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이선우 선배님 아역 했다가 비교되는 거 너무 부담스러웠어. 태주 형은 안 부담스러워요?”
닭가슴살을 뜯는 태주를 하강웅이 신기하게 보며 물었다.
“형. 캐스팅된 이후에 기사가 다 이선우 아역이라면서 비교하는 투로 났잖아요. 저 같으면 부담스러워서 땅 밑으로 꺼지고 싶을 것 같은데, 형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네요.”
[얘가 이선우랑 비교되는 게 부담스러웠으면 애초에 그 역 오디션을 안 봤지.]이중협의 말을 받아 태주가 대답했다.
“저는 오강준 역할을 너무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이선우 선배님과 비교될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 했었어요. 지금은 그저 열심히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이고요.”
“와, 역시 이선우가 추천한 클래스! 강웅아, 봤지? 너도 저런 깡은 좀 배워라.”
“진짜, 그래야겠어.”
태주 옆으로 하강웅이 바짝 붙어 앉았다.
“형,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내요. 형한테 많이 배울게요, 제가.”
태주가 피식 웃었다.
이제야 원래의 하강웅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저한테 뭘 배울 게 있다고요. 오히려 제가 강웅 씨한테 배울 게 많죠.”
“앞으로 강웅 씨 말고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말도 편하게 하시고요.”
하강웅이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로 머리를 긁적였다.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치 태희가 부끄러워할 때를 보는 듯 귀여웠다.
상대는 열여덟 살 난 동생인데도.
“알았어, 강웅아.”
태주의 말 한마디에 하강웅이 환하게 웃는다.
옆에서 묘한 표정으로 그 둘을 보던 윤지호가 피식거렸다.
“둘이 친해진 거 보면 채빈이가 질투하겠다. 안 그래도 요즘에 태주 사진 보면서 감정 이입한다고 몰입 중이던데…….”
“네?”
태주의 물음에도 윤지호는 그를 보며 그저 웃었다.
“아니야. 우리 강웅이랑 친~하게 잘 지내줘.”
* * *
태주는 기분 좋게 집에 들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한 배역을 두고 경쟁했던 하강웅과 좋은 사이가 되다니.
작품 내 배우들과 소통이 잘 돼야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자유 선언’에서 손우현과 김선정이 그 일례였다.
사이가 좋으니 연기적으로도 티키타카가 잘 살았다.
[하강웅, 생각보다 성격이 좋더라. 회사에서 걔를 이선우 아역으로 밀었으면 좀 들떠있을 수도 있었는데, 너랑 잘 지내서 좋은 작품 만들겠다는 열의가 대단하던데.]“애가 착한 것 같아요. 다행이죠, 같이 연기해야 하는데 합이 안 맞으면 그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잖아요.”
걱정거리 하나를 덜어내니 태주의 마음도 이보다 편할 수가 없다.
재빨리 씻고 나와 책상 앞에서 할 일들을 처리하던 그때.
염수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태주 씨, 드라마 일정 때문에 전화했어요. 대본 리딩이 다음 주 월요일로 당겨졌거든요.
태주는 핸드폰에서 일정을 확인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일정이 바뀐 건가요?”
-아역들 분량을 앞당겨서 찍기로 했어요. 양해 부탁드려요. 일단 4부까지의 대본을 이메일로 보내드릴 테니, 리딩 때까지 숙지해주세요.
원래 2주 뒤였던 대본 리딩이 갑자기 1주나 당겨졌다.
드라마 제작이라는 게 원래 스케줄이 왔다 갔다 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리딩 일정이 바뀌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메일을 확인했다.
‘당신도 누군가의 봄이었다’의 1~4부 대본을 출력해 이리저리 넘겨 보았다.
전체 16부작에서 아역들의 분량은 4부작.
적다고 할 수 없는, 제법 많은 분량이었다.
아역치고는 더더욱.
옆에서 대본을 같이 읽던 이중협이 참견했다.
[촬영지 대부분이 경북 상주에서 이뤄지네? 청리? 여기는 또 어디야.]“상주의 시골이래요. 아역이 나오는 드라마의 전반부는 다 여기서 촬영이 이뤄지나 봐요.”
[경북 상주면, 꽤 먼 곳인데. 사투리도 그쪽 사투리 쓰는 설정이냐?]“오강준은 서울에서 전학을 온 설정이라, 저는 사투리를 거의 안 써요.”
잠시 생각하던 태주.
이번 촬영에 누구보다 진심이었고, 어렵게 역할을 따낸 만큼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
대본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중요했지만, 직접 드라마 촬영지에 가서 오강준에 녹아들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간이 있을 때, 하루빨리.
“촬영지 답사를 좀 다녀와야겠어요. 작품 분위기도 익히고, 동네 분위기나 사투리도 익숙해질 겸 해서요.”
[그것도 좋지. 원래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만큼 작품에 잘 녹아드는 게 없거든.]이중협이 신이 나서 태주의 곁을 날아다녔다.
[야, 이게 얼마만의 여행이냐. 서울 벗어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고, 좋다!]“형, 귀신이잖아요. 바람 따라 어디든 갈 수 있는 것 아니었어요?”
[그건 그렇지만, 나 혼자 어딜 그렇게 쏘다니겠냐. 그동안 악귀들 관리하느라 바쁘기도 했고.]“그럼 저 덕분에 호강하는 거네요, 형.”
[사내자식하고 같이 가는 게 좀 그렇긴 한데, 내가 너그럽게 이해해주마.]능청을 떠는 이중협을 보던 태주도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으로 가는 작품답사이자 이중협과 함께하는 첫 나들이였다.
그래서 더욱 기대되었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