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소나기 (3)
다음날, 태주는 고모 차를 빌려 상주로 내려가는 중이다.
그런데 분명 고요했어야 할 차 안이 하강웅의 수다로 시끄러웠다.
“태주 형, 운전 잘하시네요. 평소에 버스만 타고 다니는 거 맞아요?”
운전대를 잡은 태주는 옆자리의 조수석을 힐끔거렸다.
[쟤는 졸리지도 않나 봐. 어제 새벽 4시에 잤다면서 이렇게 쌩쌩하냐?]‘그러게요.’
‘분명 이중협과 둘만이 가기로 했는데……. 왜 내 옆에 하강웅이 있는 걸까?’
핸드폰 번호를 교환한 이후 몇 차례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가 촬영지를 답사한다고 하니 하강웅이 냉큼 따라온 것이다.
둘은 치킨 회동 이후 급격하게 친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강웅이 태주에게 달라붙은 거지만.
“바쁘지 않아? 아이돌이잖아.”
“괜찮아요. 오늘은 스케줄 없어요. 트레이너 형이 찾으시긴 할 거 같은데…… 괜찮겠죠, 뭐.”
“학교는?”
“작품 때문에 결석 처리했어요. 이것도 현장학습이니까요. 형, 저는 조수석에서 귤이나 깔게요. 자, 드세요.”
살가운 하강웅이 운전하는 그의 입에 귤을 넣어 주었다.
태주는 우물우물 귤을 삼켰다.
뭔가 요상한 여정이 될 것 같다.
* * *
차량 수가 점점 줄어드는 고속도로를 지나 상주에 진입했다.
태주가 향한 곳은 상주의 도심이 아닌 한 시골가.
벽에 금이 간 허름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본격적인 여름이 된 지금, 뜨거운 태양 빛이 내리쬐었다.
매미 소리가 가득한 운동장 한쪽에는 고목이 아름드리 드리워져 있다.
주변에는 차량도,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그저 드문드문 파란 지붕의 집들이 있고, 저쪽 언덕에는 고풍스러운 고택이 있었다.
“진짜 멋있다.”
하강웅이 감탄하며 그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기가 동네 핫플레이스인가 봐요. 꼭 경주 최 부자 집처럼 생긴 게 압도적인데요.”
그의 말대로 이 동네에서 제일 웅장해 보였다.
반면, 다른 곳은 다소 고즈넉했다.
쭉 뻗은 차도를 따라 찻집과 병원이 늘어선 시내가 보였지만, 거기도 썰렁하긴 마찬가지.
“여기가 우리 드라마 찍을 곳이에요? 사람 사는 곳은 맞아요?”
“여기 맞아. 조감독님이 보내주신 장소.”
차에서 내린 하강웅은 주변을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늘 사람으로 북적대던 대도심과는 완전히 다른 조용함.
사람들이 너무 없어 쓸쓸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이중협도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너무 없기는 하다.]‘시골이니까요.’
선글라스와 깊은 챙모자로 무장했던 하강웅은 냉큼 선글라스부터 벗었다.
“이런 데서 무슨 현장 답사를 해요. 사람도 별로 없고 썰렁하구만.”
“대본으로만 배경을 그려보는 것과 직접 그곳에 녹아드는 것하고는 천지 차이야. 자, 일단 저쪽으로 가서 자세히 살펴보자.”
태주는 하강웅을 이끌고 학교를 돌아본 후, 시내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때 묻은 건물들 사이에서 ‘해신다방’을 발견했다.
낮에는 영업하지 않는지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태주는 집에서 가져온 대본을 펼쳐 이곳에서 찍을 씬들을 살펴보았다.
작중 오강준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를 와 해신다방을 개업한다.
학교에서 반항아로 소문난 오강준이지만, 어머니에게만큼은 효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다방 배달을 나가 어머니의 손을 도왔다.
비록 밖에서는 술집 작부의 아들이라며 무시를 받았지만, 그는 의연했다.
직접 현장에 와 보니 대본 속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이다.
태주는 그 후로도 하강웅과 함께 이곳저곳 답사를 다녔다.
몇 시간을 그렇게 보냈을까.
이제 이 동네가 꼭 원래 살던 동네 같은 친근함이 들기까지 했다.
태주를 줄곧 따라다니던 하강웅도 자기가 이 동네의 이상구라며, 곧잘 작품에 몰입하는 모습이었다.
대본에 나오는 장소에 가면 태주는 하강웅과 둘이서 대본을 연습했다.
주변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매우 열심히.
* * *
서울로 돌아가기 전.
배가 고프다는 하강웅을 데리고 태주는 분식집에 들렀다.
손님들이 몇 없는 가게는 한적했다.
거기서 잘생긴 청년 둘이 한 상 가득히 분식을 시키자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서빙을 하는 아주머니가 그 둘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아침부터 동네 돌아다니든데. 뭐 하는 청년들이고?”
“아, 안녕하세요! 폴라리스 강웅입니다!”
“한태주입니다.”
이름을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전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폴라, 뭐? 폴라티? 잘생겨갖고 연예인 같이 생겼긴 한데.”
“폴라티가 아니라 폴라리스요. 저는 하강웅이고요.
“그래, 그 옆에는 누구라 캤노?”
“이 형은 똘똘이에요. 쌍갑동 식구들 똘똘이요.”
하강웅의 말에 아주머니가 태주를 빤히 쳐다보더니 박수를 쳤다.
“아이고, 똘똘이! 똘똘이가 이렇게 컸나? 사내답게 잘 컸다 잘 컸어! 근데 여는 웬일이고?”
“이번 달에 여기서 드라마를 찍거든요. 거기에 저희도 출연해서, 사전답사하러 왔습니다.”
태주의 말에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얼마 전부터 방송국 봉고차가 왔다 갔다 하드만, 그런 거였나?”
저쪽에서 귀를 쫑긋하던 손님이 끼어들었다.
“왜, 이선우가 여기서 드라마 찍는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청년들은 무슨 역할이야?”
“저희는 이선우, 김결 선배님 아역입니다.”
“아역? 이렇게 큰 머스마들이?”
“무슨 말씀이세요. 머스마들이라니, 이렇게 잘생기고 풋풋한 총각들한테.”
아예 옆에 자리 잡은 손님은 태주와 강웅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드라마 제작팀이 한 달 전부터 촬영지를 섭외했다고.
이곳 분식집에서도 찍기로 했다는 얘기부터 섭외를 실패한 곳이 있다는 얘기도 해주었다.
촬영 섭외를 실패한 유일한 곳은 바로 저 위에 있던 고택이었다.
마치 조선의 한옥을 보는듯한 화려함.
꼭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고풍스럽고도 멋있었다.
“여주인공이 이 마을 부잣집 고명 손녀딸이라는 설정이라, 저기 섭외하려고 했나 봐요.”
하강웅의 말에 태주가 동의했다.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섭외에 실패했다잖아. 아주머니, 거기는 왜 촬영을 못 하나요? 개인적인 사정인가요?”
“거기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딸이 그 집을 물려받았는데, 워낙에 특이한 아가씨라서.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집은 공개하지 않겠다는 견해만 고수하고 있지.”
손님이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사실 다른 드라마 팀들도 거기 찍으려고 몇 번 찾아왔었거든. 그런데 다 실패했잖아, 그 아가씨가 완강해서.”
“이유가 뭐래요?”
“글쎄. 아무래도 드라마에 자기 집 공개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거 아닐까? 그렇다고 돈이 급한 집안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꺼다.”
대화를 훔쳐 듣던 옆 테이블 아저씨들이 끼어들었다.
“그 애기시가 얼라 때 여서 살았는데, 중핵교 들어가기 전쯤인가? 가세가 기울어가꼬 서울로 이사 갔다 아이가. 지금까지 쭉 거 있다가 얼마 전에 혼자 다시 이사 와가지고 여서 병원 개업한 기란다.”
“내는 처음에 알아보지도 모했다.”
“완전히 딴 사람인 줄 알았잖아요. 이름도 바꾸고 얼굴이 너무 달라져서. 꼬치꼬치 캐물으니 그제야 누군지 알았지.”
아저씨들의 말을 듣던 손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후남이 김지수가 돼 갖고 돌아올 줄은 누가 알았겠노?”
“그 집 어르신들이 딸이라고 구박하고, 얼굴도 못났다고 맨날 싫은 소리 했었잖아요.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가 된 격이죠.”
그 말에 하강웅이 냉큼 끼어들었다.
“에이, 여자 이름이 후남이었다고요? 말도 안 돼. 누가 딸 이름을 그렇게 지어요.”
책에서 비슷한 일화를 본 적 있던 태주가 설명했다.
“그런 집들도 있었대. 이번에는 딸이었으니 다음번엔 꼭 아들을 낳으라는 뜻으로 딸 이름을 아들처럼 짓는. 생각해 보면 참 가슴 아픈 이름이지.”
태주의 말에 주변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다. 그 집이 3대 독자 집안이어갖고 맨날 아들 타령했다 아이가. 근데 딸 하나 놓고 그대로 끝이었제.”
“얼라 때는 얼굴이 긇케 못났드만, 지금은 억수로 이뻐졌더라. 서울에서 인기 억수로 많을 것 같은데 뭐할라꼬 돌아왔나 모르겠다.”
“혹시 추억 때문에 돌아온 거 아닐까요?”
손님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아저씨들을 향해 말했다.
“왜, 20년 전쯤인가, 곡예단 왔던 적 있었잖아요. 그중에 빡빡머리 심부름꾼 기억나세요? 열몇 살쯤 된.”
“아, 기억난다! 애기시 얼라였을 때, 가가 냇물에서 잘 놀아줬지 않나? 물수제비를 그릏케 잘 했다카드만.”
“얼굴도 훤하데이.”
그때를 회상하던 동네 사람들의 눈이 혼란으로 가득 차던 순간.
“근데 가, 죽었다아이가.”
“긇지. 원래도 몸이 약했는데 애기시랑 비맞고 놀고서부터 시름시름 앓다가 시상 베릿제?”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안 죽은 게 다행이죠. 괜히 아가씨한테 죄책감 씌울 필요 없잖아요?”
“그래도 비 오는데 몸 약한 아를 애기시가 델꼬 댕긴 건 사실 아이가.”
태주는 이유 모를 한기를 느꼈다.
혹시 그 애가 귀신이라도 돼서 한을 품었다면?
주변을 둘러본 이중협이 텔레파시가 통한 듯 고개를 저었다.
[여기 악귀는 없어. 냄새도 안 나고, 느낌도 없고.]* * *
이제 슬슬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태주와 하강웅은 분식집을 나와 마을을 한 바퀴 산책했다.
“아, 쌤, 저 지금 연기 준비 때문에 바빠요. 돌아가서 얘기해요!”
왈왈대는 남자의 전화를 끊은 하강웅이 씩 웃는 모습에 태주가 말했다.
“트레이너 쌤, 진짜 화나신 것 같던데, 오늘 괜히 여기 온 거 아냐?”
“괜히 왔다뇨, 형. 사전답사를 온 덕분에 캐릭터 몰입을 잘 할 수 있게 되었는걸요. 저, 종일 이상구 역할에 푹 빠져든 거 못 보셨어요?”
“그래, 잘 봤어.”
발 닿는 대로 가다 보니 어느새 얕은 냇가까지 왔다.
“징검다리가 있는 걸 보니 오강준하고 하예린이 같이 찍는 그곳인가 봐.”
“그러게요. 예쁜데요? 여기서 화보 찍으면 멋있겠다.”
졸졸 흐르는 냇가와 붉은색 노을이 서서히 퍼져가는 하늘이 참으로 예뻤다.
그때, 태주의 머리를 스쳐 간 생각.
윤지호가 부탁한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이었다.
-자연을 배경으로 뮤직비디오 한 컷 따면 되거든. 노래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카메라 보고 찍어줘.
어차피 이번 주 내로 보내야 했으니, 여기서 찍어야겠다.
“강웅아, 나 여기서 노래하는 장면 좀 찍어줘. 지호 형 뮤비에 넣을 거니까 최대한 멋있게.”
“알았어요! 제가 또 카메라 실력 하나는 죽이죠!”
태주의 핸드폰을 받아든 하강웅은 즉시 자리를 잡았다.
태주는 노래를 틀고 징검다리 위에 서서 자신이 맡은 피처링 부분을 열심히 부르며 카메라를 마주 보았다.
“두려워 말아-
계속해서 걸어가다 보면 결국 아름다운 꿈을 만날 테니까.”
담백하게 노래를 부르며 카메라를 보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하강웅의 마음에 안 차는 듯했다.
“형, 뮤비치고 연기가 너무 밋밋해요. 내가 세계에서 제일 잘생겼다, 나의 매력으로 널 홀리겠다, 이런 생각 하면서 연기해봐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그냥 내 식대로…….”
“’적당히’가 어딨어요, 이거 지호 형 솔로 앨범 타이틀곡인데, 열심히 해봐요!”
그 말에 태주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하강웅의 디렉션대로 태주는 팔도 벌려보고,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상큼하고 갸륵한 표정도 지어봤다.
하강웅은 아예 땅에 무릎을 댄 채 열정적으로 영상을 찍는 중이었다.
이중협은 처음 보는 태주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평소 친동생 같던 애가 눈은 반쯤 뜨고 상큼한 미소를 짓는 게 어색했다.
[못 봐주겠네, 세상에 지저스. 오마이갓. 느끼해, 느끼해!]이중협이 구시렁거리는 걸 들은 태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를 보며 한마디 하려던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낯선 남자애 때문에 깜짝 놀랐다.
빡빡머리를 한 소년이 깊은 물가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잘생긴 외모에 느릿느릿한 몸가짐이 인상적이었다.
많아야 열두 살, 열세 살 정도 되어 보일까.
그는 몸을 굽혀 손에 들고 있던 납작한 돌을 물 위에 튕겼다.
통, 통, 통, 통, 통.
다섯 번을 튕긴 기막힌 물수제비였지만 태주의 눈에는 소년만 보였다.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에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하잖아!
태주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외쳤다.
“위험해!”
그의 말을 들은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태주와 눈이 마주치고는 더없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내가 보여요?]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