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520
520화
이중협, 성불하다 (2)
“태주,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알아.”
염수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태주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 감이 말해주고 있어. 아까 연기할 때, 분명 태주 네게서 중협이 오빠의 모습이 보였단 말이야.”
“선배님.”
“누구보다 중협이 오빠를 잘 아는 건 나야. 오빠가 상대방을 보면서 짓는 눈빛, 손짓까지 내가 그걸 잊었을 리 없어.”
염수정을 보던 태주가 옆에 있던 이중협을 힐끗거렸다.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수정이가 많이 취했나 보다. 적당히 달래서 얼른 숙소로 들여보내.]“선배님, 많이 취하셨습니다. 제가 숙소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중협의 말대로 하려는 태주에게, 염수정이 발개진 눈을 들었다.
“뭘 숨기고 싶어서 날 빨리 보내버리려는 거야? 왜 태주 네게서 중협이 오빠의 모습이 보였는지, 해명하기 전에는 아무 데도 안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제가 이중협 선배님 팬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선배님의 연기 스타일을 연구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분과 비슷한 분위기가 나온 모양입니다.”
“하아….”
짙은 한숨을 쉰 염수정이 풀썩, 모래사장에 주저앉은 순간, 태주는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내가 괜찮냐고? 당연히 괜찮지이… 나 괜찮아, 부축하지 마아!”
염수정이 많이 취한 건 분명해 보였다.
붉게 물든 눈이 풀려 있고, 다리에 힘이 없는 것, 그리고 말끝이 자꾸 늘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선배님, 이제 돌아가시죠.”
태주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염수정을 냅다 업었다.
등에 업힌 염수정은 잠시 버둥대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 모습에 이중협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던 중, 그는 결심한 듯 태주에게 부탁했다.
[수정이가 많이 취한 것 같은데. 내가 한 번만 더 태주, 네 몸을 빌려서 내 말을 전하면 안 될까?]생각지도 못한 이중협의 말에 태주가 눈을 크게 떴다.
‘중협이 형. 그래도 될까요? 아까는 광고 촬영이라 연기인 척 넘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제발, 부탁이다.]이중협이 절실한 눈을 태주와 마주쳤다.
[이승을 떠나기 전, 수정이한테 내 말을 전할 기회가 지금뿐인 것 같아서 그래. 이제 정말 마지막에 다다른 게 느껴져.]태주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에서 ‘마지막’이라는 말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중협과의 이별이 점점 피부로 와닿는 순간, 그가 원하는 것들을 다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염수정 선배님 취해서 기억도 못 하실 거 같은데, 한 번은 괜찮겠죠.’
[고맙다, 정말.]태주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낸 이중협은, 이내 태주의 몸에 빙의했다.
어느새 태주는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와, 붉은 실에 의지한 채 공중에 둥둥 떠다녔다.
눈앞에는 자신의 몸에 빙의한 이중협이 염수정을 안은 채 바닷가를 천천히 걷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태주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불거진 눈가를 문질렀다.
이중협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 * *
터벅, 터벅.
부드러운 모래사장에서 남자가 여자를 업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이때.
등에 업힌 여자는 스르륵 눈을 떴다.
“으음….”
“깼어?”
목소리는 다르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말투에 염수정이 졸린 눈을 비볐다.
아직도 술기운이 가시지 않았지만, 온몸에 취기가 가득했지만. 그래도 그의 존재는 알아볼 수 있었다.
“…중협이 오빠야? 정말로?”
염수정은 자신이 업힌 남자의 얼굴을 보려고 몸을 들썩였지만, 취기로 인해 이내 풀썩, 등에 도로 쓰러졌다.
“아, 꿈인가 봐. 하긴, 오빠는 진작에 내 곁을 떠났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너른 등에 얼굴을 댄 염수정이 작게 웅얼거렸다.
“이게 꿈이라면, 진짜 내가 오빠 등에 업혀있는 건가?”
그 말에 이중협이 나른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까 네가 나를 그렇게 찾던데? 그래서 네 꿈에 나타난 거야.”
“내가 그렇게 바랐는데, 이제야 나타나는 건 뭐야? 너무하네, 오빠.”
발갛게 달아오른 염수정의 눈가에서 또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그동안 오빠 떠나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런데 한 번도 내 꿈에 찾아오지를 않았잖아. 어쩜 그럴 수 있어?”
이중협은 모래사장에 천천히 발자국을 남기며 신중하게 입을 뗐다.
“내가 없이도 네가 잘살기를 바랐던 마음에서였어. 네가 혼자서 잘 이겨낼 줄 알았는데…. 그래서 차라리 날 잊기를 바랐어.”
“내가 오빠를 어떻게 잊어.”
염수정은 감정이 복받친 듯 등에 얼굴을 묻었다.
넓은 등이 점점 그녀의 눈물로 젖어갔다.
“오빠 정말 나빴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내 곁을 떠날 수 있어. 물론 그게 오빠 잘못은 아니지만….”
“미안하고 고맙다, 수정아.”
이중협은 생전 염수정에게 하지 못한 말을 이어갔다.
“배우 생활하면서 너한테 정말 많이 의지했어. 네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지.”
그 말에 염수정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이거 진짜 꿈이네. 그렇게 무뚝뚝하던 오빠가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리가 없잖아.”
“항상 가슴에만 품어 왔던 말이야. 이제라도 네게 전할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수정아, 진심으로 사랑했어. 그래서 네가 더욱 행복하길 바라.”
잔잔한 이중협의 웃음소리가 염수정의 귓가를 간질였다.
“오빠가 네 행복을 늘 응원하고 있을게. 그러니까 앞으로 행복할 거야, 우리 수정이.”
“알겠어, 오빠. 행복해질게….”
그 뒤로 더는 답이 없었다.
어느새 잠이 든 염수정의 숨소리만이 쌕쌕, 하며 들릴 뿐.
그리고 그녀를 업은 남자의 후련한 발소리가 뽀득, 뽀득, 울렸다.
* * *
한편, 그 둘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저 둘이 뭐 하는 거죠?”
새로 들어왔다던 염수정의 신입 매니저다.
그는 산책하러 나간 염수정을 노심초사하며 식당 입구에서 바라보는 중이다.
“뭐가요?”
한 손에 믹스 커피를 든 채 합류한 박인우가 옆에 서자, 매니저는 저 멀리 바닷가 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수정 씨가 지금 태주 씨 등에 업혀있는 것 같은데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제가 한번 가봐야겠어요.”
“수정 씨가 많이 취해서 태주가 업었나 보죠.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런 매니저의 어깨를 박인우가 툭툭 쳤다.
“원래 둘이 ‘이중협’이란 공통분모를 가진 사이입니다. 염수정 씨는 이중협 씨의 전 연인이었고, 태주는 이중협 씨를 자기 롤 모델,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둘이 이중협 씨에 관해 얘기하면서 이런저런 추억에 젖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그건 그렇지만….”
염수정의 매니저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후배가 선배를 위할 일이에요?”
“그냥 놔둬요. 우리만 조용히 하면 되는걸.”
박인우의 종용에 매니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박인우의 얼굴에도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왜 태주가 염수정과 저리 애틋해 보이는지.
왜 저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궁금하긴 했다.
‘뭐, 나중에 물어보면 되니까.’
하지만 일단은 태주가 원하는 데로 놔둘 생각이었다.
* * *
광고 촬영을 마친 태주가 미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인천 공항으로 가는 길.
그의 곁에는 아직 이중협이 남아 있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태주는 거듭해서 생각했다.
솔직히 그가 염수정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후, 그대로 성불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중협은 그저 색이 조금 옅어졌을 뿐, 아직 성불하지는 않았다.
“이제 거의 다 도착했다.”
하품을 삼키던 박인우는 옆자리의 태주를 힐끗했다.
“그런데 어제 너, 염수정 씨 업고 바닷가 산책했던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둘이 진지한 이야기 하러 나간 거 아니었어?”
“뭐, 그런 건 아니었고….”
태주가 옆에 있던 이중협을 힐끗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이중협 선배님 이야기 좀 했어.”
“이중협 씨?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박인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어제 염수정 씨 매니저랑 둘이서 너랑 염수정 씨가 산책하는 모습 보면서 좀 걱정했었거든. 설마 둘이 뭐 있나 하고.”
“우리 둘이 있긴 뭐가 있어.”
“그러니까. 염수정 씨 매니저가 신입이라 그런지 별걸 다 걱정하더라. 그래서 내가 안심시켜 줬지 아, 그리고 염수정 씨가 너한테 고맙다고 했다더라. 어제 어지간히 취했었는지, 너한테 업힌 것도 기억 못 한대.”
“아, 응.”
[어제 많이 취하긴 했었지. 나와의 대화를 꿈으로 생각한 걸 보며.]조용히 있던 이중협이 한 마디 던졌다.
[숙취는 없으려나? 그렇게 많이 마시고 정신없던 건 처음인데.]“염수정 선배님, 몸 상태는 괜찮으시대요?”
태주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박인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많이 취했었는지, 오늘 아침에 머리 아파하더래. 근데 괜찮아, 오늘 휴일이래. 그런데 염수정 씨가 많이 걱정되나 보지? 진짜 뭐 있는 거 아냐?”
“아니에요.”
뭐 있는 건, 중협이 형이지.
어제 이중협과 염수정의 애틋한 대화를 들은 태주는, 오늘 그가 왜 저렇게 말이 없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저렇게 미련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지도.
그러나 그가 하나 이해할 수 없는 건, 이중협이 왜 성불을 못 하냐는 거다.
그때 태주의 머릿속에 안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뜩 스쳤다.
‘그러고 보니, 아까 중협이 형이 잠깐 없어졌었잖아.’
태주가 공항으로 오는 차 안에서, 이중협은 분명 잠시 보이지 않았었다.
어디 갔다 왔냐는 잠에 취한 태주의 목소리에 그는 누굴 잠깐 만나고 온 거니 안심하라며, 자신을 다시 재웠다.
이로써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이중협은 성불 관련해서 무언가를 자신에게 숨기고 있었다.
* * *
인천공항에서 LA행 비행기를 탄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비행기에서 내려 곧장 차에 타자,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링크 씨.”
“마이크라고 부르라니까.”
인상 좋은 노인이 태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이크 링크, 태주의 소속사 대표의 아버지이자 이번 아카데미 일정 일을 도와줄 이였다.
“한국에서 잘 쉬고 왔나?”
“하하, 광고 한 편 찍고 왔습니다. 그래도 가족들도 만나고, 좋은 시간 보냈어요.”
“앞으로 더한 영광의 시간을 보내야 할 텐데,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했고?”
“긴장할 필요가 있나요. 주어지는 영광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닌걸요.”
“하지만 할리우드의 분위기는 자네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고?”
마이크가 태주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 분위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좋을 거야.”
* * *
영화 ‘나의 미래’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게 된 태주.
AAA LA지사 건물로 가자, 그곳에서 기다리던 앤디 피셔와 만났다.
그 또한 생애 첫 아카데미 행에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LA 거리에 우리 영화 포스터 붙은 거 봤어요? 나 거기서 인증샷 몇 번이나 찍었는지 몰라요. 나중에 같이 찍읍시다.”
“감독님이 이렇게 흥분한 건 처음 보는데요.”
“흥분할 만하죠. 태주 씨.”
앤디 피셔가 눈을 반짝였다.
“아카데미라고요, 아카데미. 우리 영화가 미국 최고의 상, 아카데미에서 평가받게 되는 겁니다.”
“내가 뒤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 잊지 말게.”
마이크가 앤디와 태주를 바라보며 든든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오랜 시간 제작자로 일하며 쌓은 인맥을, 이번 아카데미를 위해 제대로 발휘한 참이었다.
“내가 나이는 먹었지만, 좋은 작품을 널리 알리고 홍보할 힘은 아직 충분하다고.”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