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소나기 (4)
태주는 놀라서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다, 간신히 섰다.
‘뭐야,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었어?’
[당연히 귀신이지. 물에 그림자가 안 비치잖아. 저 아이가 던진 돌에 물이 튀지도 않았고.]얼떨떨한 얼굴로 태주는 눈을 비볐다.
‘분명히 돌을 집어서 물수제비를 뜨는 걸 봤는데요?’
이중협이 재밌다는 듯 설명했다.
[저건 네게만 보이는 환상이야. 몇몇 귀신들은 자기 한에 관련된 소품들을 가지고 떠돌면서, 반복적으로 그 행동을 하기도 하지. 자세히 다시 봐봐.]이중협의 말대로 물속을 가로지르는 소년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움직일 때 물살이 갈라지지도 않았고.
하강웅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형, 괜찮아요?”
“괜찮아. 잠깐 딴생각했나 봐. 다시 하자.”
결과물을 확인하던 하강웅이 크게 외쳤다.
“형, 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시간도 늦었고 해도 지는 것 같으니 이만 철수하죠.”
남자애와 하강웅의 얼굴을 교대로 바라보던 태주.
하강웅이 못 보는 걸 보니 이 남자애, 귀신이 확실했다.
많아야 13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은 마르고 날렵한 체구로 그의 앞에 다가섰다.
하얗고 수려한 얼굴이 희망차게 빛났다.
[옆에 대장 아저씨도 데리고 다니네요. 그럼 저도 좀 데리고 다녀 주시면 안 돼요?] [나는 아저씨라 아니라 형이라고! 그리고 아가야, 태주는 나 데리고 다니는 걸로도 벅차단다.]이중협의 말에 소년이 절실한 눈을 반짝였다.
[대장 귀신과 함께 하는 자면, 제 한도 풀어줄 수 있잖아요. 제발, 부탁이에요.]선뜻 답을 못하는 태주를 향해 소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렸을 적 친했던 친구를 찾으려 20년을 헤맸어요. 그런데 제힘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요. 그 친구한테 약속한 게 있는데, 꼭 지켜야 하는데…….]난감한 태주가 눈동자를 굴렸다.
‘어떻게 나는 가는 곳마다 이렇게 사연 있는 귀신을 만나냐.’
서둘러 징검다리에서 내려오는데, 발목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흐읏.”
아까 귀신을 보고 징검다리에서 삐끗한 게, 가벼운 게 아니었나 보다.
“왜요, 형. 어디 아파요?”
“아무래도 병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헉, 지금 병원 다 문 닫았을 텐데. 여기는 5시면 문 닫는다고 했어요.”
잠시 고민하던 태주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하룻밤 자고 가야겠다. 내일 일찍 병원 가서 치료받고 빨리 가라앉혀야지.”
하강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자고 갈래요!”
“내일 스케줄 있으면 가야지. 내가 차편은 어떻게든 알아봐 줄게.”
“아니에요, 저 내일 헬스밖에 없어요. 오늘 밤에는 형이랑 대본 연습하고, 내일 병원에 같이 가 드릴게요.”
“오늘 낮에 같이 대본 연습 했으면 됐지, 밤에 또 하자고?”
“왜요, 형. 저랑 같이하면 작품에 몰입되고 좋았잖아요.”
그렇게 하강웅은 하루 더 태주와 동행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태주와 대본을 맞추는 게 더 집중이 잘된다나 뭐라나.
동생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었지만, 태주도 나쁘지 않았다.
하강웅과 함께 지내며 시간을 보낸 만큼 드라마의 케미가 더 살 것이다.
게다가 아닌 척하면서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태주는 흔쾌히 하강웅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방부터 잡자.”
갑작스레 결정된 하룻밤의 동행.
태주는 옆에 따라오는 소년을 힐끔거렸다.
자꾸만 쫓아오는 소년이 신경 쓰였다.
자기보다 어린 애들을 보면 꼭 태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일단은 기다려. 밤에 이야기하자. 그때, 네 이야기 들어줄게.’
긴장으로 종종거리던 소년이 퍼뜩 눈을 들었다.
기쁨에 겨운 두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늦은 저녁을 먹고 근처 여인숙에 방을 잡았다.
그 후로 방에 틀어박혀 하강웅과 대본 연습을 했다.
오강준과 이상구가 부딪히는 장면들부터 서로가 연습하고 싶은 장면까지.
실제로 함께 연기할 상대가 대사를 바로바로 받아주니까, 혼자서 연습하거나 이중협이 맞춰주는 것과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습하다 보니 어느새 오후 11시가 되었다.
잠시 눈을 붙인다던 하강웅은 이미 침대 위에서 드르렁 코를 골고 있다.
“잠이 많다더니, 정말 잘 자기는 하네.”
배를 훤히 드러내 놓고 자는 하강웅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애도 아니고, 감기 걸리겠다.”
[역시 태희를 돌본 짬밥이 어디 안 가는구먼.]“동생들은 다 똑같죠, 뭐.”
이부자리를 봐주던 태주가 옆을 힐끔거렸다.
냇가에서부터 따라온 소년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본 연습을 마쳤으니, 이제는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줄 차례였다.
태주는 문을 잠그고 나와 곧바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맥주 한 캔을 사서 밖에 파라솔에 자리를 잡았다.
6월 말의 여름밤은 후덥지근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이야기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된 태주는 소년에게 고개를 돌렸다.
‘넌 누구니? 나한테 도움을 청하려는 이유가 뭐야?’
소년이 차분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고지훈이예요. 부모님이 버린 저를 떠돌이 곡예단이 거둬주셨죠. 그렇게 곡예단원들을 따라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이 마을에까지 오게 됐어요.]“힘들었겠다, 어린 나이인데.”
[그래도 좋았어요. 저녁 먹고 징검다리를 가면, 후남이가 있었으니까요.]‘후남이?’
아까 낮에 분식집에서 들었던 이름이다.
‘그럼…… 이 아이가 설마?’
태주는 소년의 한의 근원이 ‘후남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구나. 후남이랑 놀던 기억 때문에 아직도 이곳을 못 떠나고 있는 거야?’
[비슷해요.]소년이 태주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냇가에 물이 차오르면 물수제비를 가르쳐 준다고 했는데, 갑자기 마을을 떠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어요. 그래서 후남이와 한 약속을 지키고, 다시 한번, 냇가에서 물수제비 뜨면서 놀고 싶어요.]그때를 회상하던 소년의 눈이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 * *
20년 전.
가뭄이 들어 말라비틀어진 냇가에 놓인 징검다리 위.
긴 생머리를 넘기던 소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김후남.
타오르는 땡볕을 그대로 맞은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귀는 마을에서 들려오는 풍물 소리로 향했다.
그곳에 끼고 싶지만 끼지 못하는 서러움이 복받쳐왔다.
마을 아이들은 그녀가 못생긴 데다 잘난 척을 한다며 은근히 따돌리는 구석이 있었다.
“칫. 나도 같이 놀고 싶은데…….”
울상이 된 소녀에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운데 왜 여기에 있어?”
소녀가 홱 고개를 돌리자 날렵한 체구의 소년이 우산을 쓰고 있었다.
소녀는 그를 알았다.
얼마 전 마을에 공연을 온 떠돌이 곡예단의 막내였다.
부모가 버려 고아가 된 소년을 곡예단의 단장이 거두었고, 심부름꾼으로 쓰다 나중에는 단원으로 키우기 위해 교육 중이라고 했다.
잘생긴 외모의 소년을 보던 소녀의 얼굴이 붉어진 순간.
“그렇게 햇빛 맞으면 열사병 걸린대.”
소년이 그녀에게 성큼성큼 걸어와 우산을 씌워 주었다.
이제는 화가 난 듯 얼굴이 새빨개진 소녀가 툴툴거렸다.
“넌 왜 안 놀고 여기에 왔어? 날 동정하니?”
“내가 널 왜?”
“애들은 날 싫어해. 못생긴 김후남하고는 놀기 싫어한다고. 그러니까 너도 그럴 거잖아. 날 불쌍하게 여기니까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아무 대답도 없는 소년에게 소녀가 버럭거렸다.
“날 동정하지 마! 못생기게 태어났지만, 머리는 누구보다 좋다고! 두고 봐, 내가 한국대 의대 합격해서 이 마을 사람들 코를 납작하게 해줄 테니까!”
방어기제로 가득 찬 소녀가 귀여웠던지, 소년이 피식 눈웃음을 지었다.
“후남아. 난 널 동정하지 않아. 오히려 네가 부럽지. 너는 부모님도 계시고, 똑똑하고, 그리고…….”
소년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애써 삼켰다.
핏줄이 파리한 소년의 팔목은 한 줌에 쥘 정도로 얇았다.
“아무튼, 여기서 혼자 놀지 말고 나랑 같이 놀자.”
소년이 소녀의 손을 잡은 순간.
그를 바라보던 소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지만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수줍게 웃으며 소년을 바라보는 그녀의 볼에 보조개가 패어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온종일, 일주일 내내, 그리고 보름을 같이 보냈다.
친구가 없는 소년과 승부욕이 강한 소녀는 제법 잘 어울렸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물이 찰박거리는 연못가에서 돌을 가지고 물수제비도 했다.
얼마 안 가 다시 말라버렸지만.
소녀는 소년에게 고마워서 많은 것들을 가르쳤다.
또한, 곡예단을 따라다니느라 학교에 못 갔다던 그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년은 곧잘 소녀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소녀는 그런 소년이 더욱더 좋아졌다.
그래서 먼저 손을 내밀어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싶었다.
소년 덕분에 소녀는 친구와 사귀는 기쁨을 얻었으니까.
“지훈아, 우리 집에서 같이 살지 않을래? 그럼 너 공부도 할 수 있어. 우리 집 돈 많으니까 너 정도는 거둘 수 있을 거야.”
“후남아. 너야말로 날 동정하니?”
“그게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나는 너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마음만은 고맙게 받을게.”
소녀는 성급했지만, 소년은 느긋했다.
얼굴에 스치는 습한 바람을 느끼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비다.”
그들의 얼굴에 차가운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던 순간.
소녀도, 소년도 손을 잡고 기뻐했다.
“비 온다!”
“이제 냇가에 물이 차겠지? 그럼 내가 너한테 물수제비 가르쳐 줄게!”
잔뜩 신이 난 소년은 소녀를 데리고 냇가로 향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는 냇가를 가득 채웠다.
세찬 물결이 가로지르는 냇가에서 아이들은 신이 났다.
그렇게 한참이나, 비를 맞으면서 물수제비에 적합한 납작한 돌을 고르던 때.
소녀는 자신이 고른 못생긴 돌을 소년에게 건넸다.
“이건 너 써.”
“……나, 지라고 이러는 거지?”
“헤헤. 너는 어차피 잘하잖아.”
소녀의 개구진 미소에 소년도 피식, 웃어버렸다.
그는 자신이 고른 납작한 돌을 소녀에게 건넸다.
“그럼 이건 너 써.”
“이제 우리 물수제비 하는 거야?”
그는 넘실대는 냇가를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물살이 너무 거세서 못 하겠다, 위험해. 나중에 잠잠해지면 그때 하자.”
“나중에? 까먹었다고 하기 없기야. 꼭 물수제비같이 해야 해!”
소녀의 손을 소년이 꼭 잡았다.
“나중에 꼭 같이하자.”
“정말이지?”
“너랑 한 약속이야, 꼭 지킬게.”
의심하는 소녀를 안심시키던 소년은 결국 소녀의 집까지 왔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오느라 소년의 입매는 파래졌다.
하지만 옆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소녀를 바라보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소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기에.
마을의 유지의 고명딸인 소녀는 커다란 고택에 살고 있었다.
소녀는 문 앞에서 망설이며 집에 들어가길 머뭇거렸다.
친구가 없었을 때는 도망치듯 집에 들어가기 바쁜 그녀였다.
그러나 소년을 알게 되면서 집에 들어가기 망설여졌다.
“헤어지기 싫다.”
“들어가. 비 더 맞다가는 감기 걸려.”
“나중에 꼭 물수제비 가르쳐 줄 거지? 갑자기 떠나지 않을 거지?”
소년은 환히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돌을 흔들었다.
“꼭 가르쳐 줄게. 나중에 냇가에서 만나자.”
하지만, 그 후로 소녀는 소년을 볼 수 없었다.
마을에 지낸 지 한 달도 안 된 곡예단은 소년을 데리고 갑자기 떠났다.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떠난 소년을 소녀는 원망했다.
어느 날,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산책하러 나갔다가 밖에서 얘기하는 부모님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곡예단 막둥이 말이에요, 아주 엉뚱하지 않아요? 다른 것도 아니고 돌멩이를 죽을 때 묻어달라 했다네요.”
“안됐어. 몸도 약한데 비를 그렇게 맞았으니.”
“어쨌든 후남이한테는 비밀로 해요. 얘하고 잘 놀던 애였잖아요…….”
원망으로 가득 찼던 소녀의 마음이 쿵,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 * *
옛날 일을 말해주던 고지훈의 눈이 추억으로 젖어 들었다.
[귀신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온 곳이 이곳이었어요. 후남이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후남이네는 이미 서울로 이사 가고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무작정 서울로 갔어요.]‘그래서, 서울로 갔더니 찾았어?’
[못 찾았죠.]고지훈이 시무룩한 얼굴로 덧붙였다.
[제 있는 힘껏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돌아온 거예요. 어쨌든 후남이하고 물수제비 하기로 한 곳은, 이곳이니까.]소년의 말에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 나온다.
태주는 크흠, 거리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쉽게 풀릴 거 같은 한의 실타래에 기분이 좋아졌다.
‘지훈아, 네가 이야기한 후남이란 여자애. 아니지, 후남 씨지. 지금 30대 중반쯤 되셨을 테니까. 아무튼, 누군지 알 것 같거든?’
그 말에 고지훈이 펄쩍 뛰었다.
[정말요? 누군데요? 형, 후남이 알아요? 지금 보러 가요, 지금요!]이제껏 차분했던 고지훈이 이제야 제 나이의 소년처럼 마구 흥분했다.
‘자, 자, 진정하고.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같이 보러 가자.’
[아… 그치만…….]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고지훈을 이중협이 달랬다.
[지금 인간들은 자는 시간이다, 꼬마야. 그리고 오늘 태주 많이 지쳤어. 하강웅 케어했지, 대본 연습했지, 징검다리에서 너 만나서 깜놀했지.] [아, 그건 그렇죠.]그들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고지훈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는 듯했다.
붉어진 얼굴로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내일 저랑 후남이 보러 가기로 약속하신 거예요! 약속!]태주는 새끼손가락을 그에게 살짝 걸었다.
‘그래, 약속할게. 내일 꼭 보러 가자.’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