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570
외전 40화
프러포즈 대작전 (40)
곧이어 스크린에 영상 하나가 재생된다.
태주와 윤수안이 처음 만났던 작품, ‘그림자 무사’의 촬영장이 보였다.
메이킹 스태프가 찍은 듯, 윤수안을 졸졸 따라다니던 카메라는 이내 태주를 비추었다.
무사 옷차림의 태주를 본 윤수안이 감회가 새로운 듯 은은히 미소를 지었다.
21살의 한태주는 지금의 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볼이 살짝 상기된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메라가 부끄러운지 연신 고개를 돌리는 그.
그런 태주에게 스태프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이번 영화에서 수안 씨 지키는 호위무사로 캐스팅되셨잖아요. 최고의 여배우와 함께 합을 맞추는 기분은 어떠세요?”
그 말에 화면 속 태주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말해 뭐해요, 좋죠.”
“그렇게 뱅뱅 돌리지 말고, 좀 구체적으로 말해 주세요. 윤수안 씨와 연기하는 느낌이 어떤지요.”
“구체적으로라….”
잠시 고민하던 태주는 이내 할 말이 생각난 듯 싱긋 웃었다.
“제가 평생을 지켜주고 싶은 분을 만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화면 속 태주는 연신 쑥스러운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윤수안도 추억에 젖어 드는 이때.
단상 위, 한쪽에서 태주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풍성한 꽃다발을 손에 든 그가 객석에 앉아있던 윤수안과 눈을 맞췄다.
“우리가 처음 만난 순간, 기억해? 이 영화 촬영장에서 만났잖아, ‘그림자 무사’.”
“기억하지.”
윤수안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빼자, 태주가 씩 웃었다.
“그때 나는 연기를 오래 쉬었다가 오랜만에 복귀하는 거였어. 촬영장도, 다시 시작하는 연기도 제법 낯설었어.”
태주가 숨을 고르며 윤수안과 눈을 마주쳤다.
“그럼에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사랑 덕분이었어. 연기에 대한 사랑, 내 배역과 상대역에 대한 사랑. 어쩌면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때부터 시작됐을지도 몰라.”
그리고 태주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작품에서 나는 왕비를 지키는 호위무사였지. 그때처럼 앞으로 너를 나의 여주인공으로, 평생 모시며 살게. 그러니 내 손을 잡고, 나와 평생을 함께해 줄래?”
태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윤수안은 객석에서 뛰쳐나와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단상에 있던 태주를 일으켜 자신의 품에 안았다.
“당연히 함께할 거야, 당연히. 그러니까 너야말로 나한테서 떨어질 생각은 하지도 마.”
“저기, 수안아….”
“그냥 가만히 있어.”
윤수안은 가슴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실 다 예상하고 있었는데.
휴게실에서 홀로 멘트를 연습하던 태주를 목격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그래서 어떤 말을 들어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태주의 입에서 청혼의 말이 흘러나오니, 눈에서 정신없이 감동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왜 울어? 내 프러포즈가 마음에 안 들었어?”
“바보야,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는 것 같아?”
윤수안이 훌쩍이며 태주를 더욱 세게 안았다.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고, 지금.”
그러고는 태주에게서 살짝 떨어지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지금 제일 중요한 말을 빼먹은 것 같은데?”
그녀의 핀잔에 태주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사랑해.”
“흠.”
마치 엎드려 절 받기라는 듯 윤수안이 입을 삐죽거리더니, 이내 태주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내가 더 사랑해, 한태주.”
그리고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달콤함에 휩싸인 태주가 생각했다.
최고의 프러포즈였다고.
* * *
다음날, 오전.
늦은 출근을 준비하던 차용석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한유경 옆에 앉았다.
“뭐 봐, 여보?”
“태주 나오는 X23 광고!”
화면에 나오는 태주를 보던 한유경이 괜스레 눈을 비볐다.
“우리 태주가 참 연기를 잘해. 아침 댓바람부터 날 이렇게 울리고 말이야.”
“광고를 잘 만들어서 그렇지 뭐.”
차용석 또한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그 역시 얼마 못 가, 부모님을 사랑하는 아들을 연기하는 태주를 보며 훌쩍거렸다.
“태주가 연기를 잘하네. 핸드폰 광고에 이렇게 가슴이 울려본 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
“그런데 태주, 올해 결혼하는 건 맞아? 당신하고 상의했어?”
“아마 그럴걸.”
차용석이 한유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말투가 왜 이리 시무룩해? 태주가 장가가는 걸 누구보다 기뻐하던 건 당신 아니었어?”
“물론 기쁘지. 누구보다 기쁜데….”
한유경이 복잡미묘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마음이 좀 헛헛하네. 오빠랑 새언니가 죽은 후, 태주한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했어. 그땐 언제까지나 내 품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자기 사랑 만나 독립할 걸 생각하니, 좀… 그래.”
“태주가 자기 가정 꾸리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지. 뭘 그리 착잡해 하고 그래.”
“당신은 몰라. 태주가 나한테 어떤 존재인지.”
느리게 깜빡인 한유경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 보면 태주는 자신의 버팀목이었다.
태희를 뱃속에 가진 채로 남편을 잃었고, 사랑하는 새언니와 오빠마저 떠나보낸 후 태주를 키우게 된 그때.
모두가 조카를 키우게 된 임산부인 그녀를 동정하며, 힘들 것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녀는 태주를 키우면서 힘든 줄 몰랐다.
사랑하는 새언니와 오빠를 쏙 빼닮은 태주는 혼자서 잘 커 줬고, 태희를 키우는 데도 엄청난 보탬이 됐다.
별다른 투정을 부린 적이 없었고, 늘 씩씩하게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해냈다.
그리고 좋은 배우가 되어 자신에게 기쁨과 뿌듯함을 안겨주는, 사랑하는 자식 같은 존재다.
“태주 결혼할 때, 나 울어버릴 것 같아.”
“으이그.”
차용석이 혀를 차며 한유경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래서 당신 옆에는 내가 있어야 한다니까.”
그러나 태주가 결혼하는 것을 상상하던 차용석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인 건 마찬가지였다.
담당 배우에서 이제는 친자식과 다를 바 없어진 태주의 존재가 그에게도 너무 큰 것이다.
* * *
결혼 날짜를 확정 지은 이때.
태주는 여러 지인에게 청첩장을 돌렸다.
임강현, 윤지호 등등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들은 태주가 장가를 가는 것을 내심 섭섭해하는 듯했다.
회사 로비에서 만난 임강현이 볼멘소리를 냈다.
“너 결혼하면 우리는 누구랑 놀라고.”
“이미 다들 예상했잖아. 나랑 수안이 조만간 결혼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은 몰랐지!”
“야, 우리 나이가 35살이다. 빠른 건 아니지.”
“그래도 어떻게 날 두고 너 혼자 결혼하냐? 배신감 들게.”
“으이그, 누가 보면 내가 네 여자친구인 줄 알겠네. 나잇값 좀 해라.”
“이거 봐, 맨날 매달리는 건 나지.”
임강현이 섭섭한 듯 목소리를 올렸다.
“이제 앞으로 너희 집에서 간간이 술 한잔하는 그런 재미가 없어질 거 아냐. 우리 집에서 내가 요리해주는 그런 즐거움도 없어질 거고.”
“글쎄, 그건 수안이한테 한번 물어볼게. 무작정 안된다고는 하지 않을 거야, 워낙에 융통성 있으니까.”
“벌써부터 와이프한테 잡혀 사는 거야? 수안 씨한테 물어본다고 하는 거 보니.”
“잡혀 사는 게 아니라, 공생하는 거지. 이제 우리 둘은 운명 공동체니까.”
“으악, 닭살. 10년 동안 사귀었는데도 어떻게 여전히 그렇게 수안 씨를 좋아할 수가 있냐?”
임강현은 말을 짓궂게 했지만, 누구보다 태주의 결혼을 축하했다.
“아역배우 때부터 널 봐왔지만, 네가 행복해하는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다.”
“그래?”
“응. 그러니까….”
임강현이 진심 가득한 말을 태주에게 건넸다.
“앞으로 수안 씨랑 잘 살아라.”
* * *
결혼 준비로 바쁜 태주와 윤수안.
둘은 강원도 인근 별장에서 살고 계신 윤수안의 아버지께도 인사를 드렸다.
또한, 태주의 부모님이 모셔진 납골당에도 동행했다.
그리고 태주가 마지막으로 가고 싶어 하던 곳 역시 함께했다.
“네가 자주 오던 곳이 여기야?”
윤수안은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한적한 묫자리는 그녀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항상 중요한 일 있을 때마다 이곳에 온다면서. 차 대표님한테 들었어.”
윤수안이 태주에게 팔짱을 끼었다.
“네가 이중협 선배님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각별하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
“따라와 줘서 고마워.”
“네가 좋아하는 선배님이니까, 나도 좋아.”
윤수안이 싱긋 웃자, 태주도 피식 웃었다.
중협이 형이 이 광경을 봤으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했다.
어느덧 그들은 이중협의 납골묘 앞에 도착했다.
회사에서 관리해준 덕에, 그곳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납골묘 앞에 놓인 비석에 적힌 이중협, 이란 이름을 보던 태주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런 태주를 본 윤수안도 덩달아 진지해져서는, 조용히 말했다.
“말 안 시킬게. 돌아가고 싶을 때 알려줘.”
“배려 고마워.”
태주도, 윤수안도 각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태주는 속으로 이중협을 간절히 불렀다.
‘형, 저 태주예요. 제가 결혼을 하게 돼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크흠, 헛기침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 목소리가.
[수안이랑 그만큼 사귀었으면 이제는 결혼할 때도 됐지.]‘…형!’
태주가 눈을 뜨자 옆에서 이중협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네가 간절하게 원할 때, 언제든 나타날 거라고.]마치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한 말에 태주가 대답했다.
‘제가 결혼한다는 걸 형한테 직접 말해 주고 싶어서 이렇게 왔어요.’
추억에 잠긴 이중협을 보는 태주의 눈앞에 그들이 함께했던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오래전이었지만, 아직도 태주에게는 그 기억들이 생생했다.
‘형이 제 결혼을 축복해 줬으면 좋겠어요.’
[물론 축복하지. 너희 둘, 제법 잘 어울리거든. 서로 힘이 되는 인생의 동반자로 잘살 거야.]이중협이 씩 웃으며 태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누구보다 멋진 남자잖아, 우리 태주.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 수안이 지키는 멋진 남자로.]태주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아버지한테 듣는 덕담 같은 축복에 감동이 벅차올라,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자신의 등을 끌어안는 따스한 느낌이 태주를 감쌌다.
“태주야. 우리 잘살자.”
윤수안이 태주에게 지그시 속삭이자. 이중협이 안심된다는 듯 미소 짓더니 눈을 찡긋, 하고는 사라졌다.
[앞으로 또 볼 때까지, 아디오스.]태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 잘 살 거야, 우리.”
이중협과의 만남으로 인생의 2막이 열렸다면, 윤수안과의 결혼으로 인생의 3막이 열릴 것이다.
태주는 확신했다.
인생의 새로운 챕터도, 너무나도 기대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