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6
6화
데뷔작은 단편영화 (1)
이형곤은 한동안 익숙한 이름을 중얼거렸다.
한태주는 몰랐지만, 똘똘이는 잘 알았다.
작고 통통한 몸집으로 연기하는 게 얼마나 귀여웠던지.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모습이 흐뭇했었다.
그와 함께 연기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한태주는 계산된 연기가 아닌 캐릭터에 몰입하는 연기를 하는 배우라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의 미래를 기대했다.
쌍갑동 식구들을 끝으로 연예계에서 자취를 감출 줄 몰랐지만.
그래서 이형곤은 이유도 없이 기분이 좋았다.
어린 천재가 어떤 어른이 되어서 나타났을지 기대됐다.
그는 카운터에 몸을 기대며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연기과에 아역배우 출신인 비율이 얼마나 되나?”
“아역배우들이요? 글쎄요…….”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했다.
“흠…… 정확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이 중학생 때부터 단역으로라도 작품에 참여했더라고요.”
“공백 없이 계속 연기를 해온 애들인가?”
“네, 학장님. 저희 과는 아무래도 포트폴리오 비중이 높은 편이라서요.”
이형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아역들은 꾸준히 연기를 하는 편이지. 아니면 그만두고 일반인처럼 평범하게 살던가. 그런데 말이야, 아역을 그만둔 배우가 몇 년 후에 성인 연기자로 나타난다면. 그것도 참 재밌을 거야, 그렇지?”
여직원은 이형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즐거운 듯 보였는데,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 경우는 드물지 않나요? 그리고 성인 연기자로 복귀해 성공한 케이스는 잘 못 본 거 같아요. 성인 때는 완전히 연기력으로 평가받으니까요.”
“그래서 궁금해, 과연 그 애가 그걸 어떻게 극복할지.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연기는 어디까지인지.”
이형곤이 여직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자네가 통화했던 그 친구. 영화제목이 뭐라고 하던가?”
여직원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왜 학과장이 괴짜 서동락의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
그것도 주연배우의 갑작스러운 교체로 부침을 겪는 영화를.
“마지막 승부입니다. 감독은 서동락, 주연배우는 한태주라는 친구고요.”
“마지막 승부……. 기억해 두겠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제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군.”
* * *
연기를 제대로 해보기로 한 후.
태주는 영화 ‘마지막 승부’에 온 힘을 다했다.
알바를 줄이고 대신 촬영에 집중했다.
마음이 급했다.
당장 영화제 출품 기간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실내뿐만 아니라 실외 로케까지 잡혀 있었다.
태주는 새벽부터 촬영을 하러 나갔다.
대학교 정문 인근으로 가니 스태프들이 하품을 하며 그를 맞아 주었다.
오늘 몰아서 찍을 씬들은 훈련 장면이었다.
태주는 검은 추리닝만 입은 채 이미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오늘 찍을 장면들은 대부분 뛰고 때리는 것들이다.
훈련에 열심히 임하는 복서를 충실히 재연할 예정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동락이 코를 찔끔거리며 다가왔다.
“어우, 오늘 드럽게 춥네. 태주야, 너 왜 벌써 겉옷 벗었냐, 감기 걸린다.”
“찍어야 할 씬들이 태산인데, 빨리 준비해야지. 그리고 운동했더니 별로 안 추워.”
그때 동락의 뒤로 자그마한 여자애가 걸어왔다.
귀여운 외모였지만 전체적으로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동락이 그녀를 보고 이쪽으로 불렀다.
“왜 이렇게 늦었냐? 10분 전에 온다며.”
“밤새 각본 고치느라고 늦었다, 왜!”
“흠흠. 태주야, 이쪽은 나랑 같이 각본 쓴 심은설.”
그녀와 태주는 서로 인사를 나눴다.
“심은설입니다. 동락이하고 같은 과예요.”
“한태주입니다.”
태주는 각본이 고쳐졌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
어제까지만 그런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대사가 바뀌었나요? 아니면 장면 변경이 있었나요?”
“로케이션 장소가 바뀐 곳이 좀 있어요.”
심은설이 변경된 대본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예전에 조성복 선배는 많이 뛰는 건 숨차해서 그런 씬들은 다 뺏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러닝씬을 추가했어요. 동락이 말로는 태주 씨가 체력이 좋다던데요? 운동도 잘하고.”
태주는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시선에 긍정적으로 답했다.
“뭐,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동락아, 이걸 당일에 말해 준다고?”
“어제 은설이랑 나랑 이야기하다 문뜩 떠오른 생각이거든. 태주야, 더 좋은 영화를 위해서다.”
동락이 힘찬 미소를 지으며 태주의 등을 툭툭 쳤다.
태주는 대본을 열심히 훑었다.
오늘 찍을 씬은 한강공원, 그리고 시장에서 러닝 훈련을 하는 거였다.
“시장? 그래서 새벽 6시에 모이라고 했구만, 사람들 그나마 없을 때 찍으려고.”
“영화 ‘사보이’ 오마주야. 너도 알잖아, 거기서도 주인공이 시장에서 뛰는 거.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당장 청과물시장으로 간다!”
옆에서 심은설이 고개를 흔들었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짜 스탭들 생고생시키는 건 서동락이 전문이라니까. 예정에도 없던 로케 잡고 대본 고치게 하고.”
태주가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배우가 바뀌니까 수정할 게 많으시죠.”
그녀가 태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이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네?”
“그쪽이 잘하면 더 좋은 장면이 나올 수도…… 아니, 영화 자체가 더 업그레이드될지도 모르죠.”
심은설이 태주를 쓱 훑었다.
그녀의 눈빛에 일말의 기대감이 서렸다.
“기대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쪽한테.”
* * *
청과물시장에 도착하자, 새벽 동이 트기 시작했다.
태주는 카메라를 든 스태프와 함께 시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무난하게 여기서 코너를 돌면 어때? 동선도 깔끔하고 좋을 것 같은데.”
“카메라 들고 뒷걸음질로 뛰어야 하잖아, 그럼, 여기가 길도 넓고 장애물도 없어서 괜찮지 않아?”
“흠…… 거기는 화면이 너무 빈 거 같지 않아? 자칫하면 지루해 보일 수도 있어.”
서동락이 카메라 속 태주를 보며 한참이나 망설였다.
“태주가 전체적으로 모노톤이잖아, 입고 있는 추리닝도 검은색이고. 양옆에 색감이 쨍한 게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한참을 주변을 물색하던 그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붉은색과 초록색, 노란색 등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가득 차 있는 가게가 양옆에 늘어서 있었다.
“여기에서 뛰자! 색감 너무 좋다. 범준아, 여기서 뛰어도 된대?”
가게 주인들과 막 영화 촬영 협의를 끝낸 스태프가 뛰어왔다.
“어, 된대! 대신 과일상자 떨어뜨리거나 건드리면 죽는다고 하셨어!”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전해드려! 기물파손은 우리 전공 아니라고! 그렇지, 태주야?”
동락의 눈빛이 간절하게 빛났다.
태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전공도 아니야.”
* * *
카메라와 음향을 마지막으로 체크하는 중이다.
태주는 대기하는 내내 대본을 붙잡았다.
훈련 씬이지만 표정으로 표현할 다양한 감정들이 있었다.
힘듦, 고됨, 보람참.
몇 번이고 명현석으로서의 감정을 곱씹었다.
“하아…….”
고개를 들어 족히 100미터는 될 좁은 골목을 바라보았다.
하루를 시작하는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바쁘게 가게를 정돈하는 사람들.
높이 쌓인 과일상자.
그리고 군데군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주머니들.
호기심 어린, 걱정스러운, 영문을 모르는 눈빛이 섞여 있었다.
“젊은 애들이 새벽부터 영화를 찍는다고 고생이구만.”
“그래도 저번에 영화 찍던 걔네처럼 바리케이드치고 이러지는 않아서 좋네. 그런데 쟤네는 그런 거 왜 안 친대?”
“현장감을 살리고 싶다는데, 뭔 말인지.”
“아 맞다! 자기 아들도 배우한다고 하지 않았어? 누구 영화였지?”
“배우가 아니라 조감독. 우리 우돈이, 윤이도 감독 영화에서 조감독 하고 있다고 몇 번을 말해. 그래서 쟤네도 남 같지 않아.”
태주는 촬영을 앞두고 고민에 빠진 눈빛을 애써 숨겼다.
그러나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대본 속 한 줄로 간략하게 설명된 홀어머니.
‘홀로 생계를 꾸리느라 아들의 복싱을 포기시킨 것을 늘 후회하는 인물.’
태주는 명현석의 심정이 되어 한참을 생각해보았다.
효자는 아니더라도 어머니를 생각할 게 뻔하다.
대본을 처음 볼 때부터 궁금했다.
‘왜 명현석과 홀어머니가 대면하는 씬이 없지?’
분명 대본 속 명현석은 홀어머니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데도, 그녀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명현석이 독백하는 장면에서만 잠깐 언급될 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명현석이 대면하는 씬이 없다는 게.
그녀는 아들의 꿈을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시켰다.
그런 어머니에게 명현석은 자신의 꿈을 이어나간다는 걸 보여주고 싶을 거다.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고, 동시에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적어도 태주가 해석한 명현석은 그러했다.
“촬영 시작하자! 다들 모여봐!”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 순간.
“잠깐만요. 의논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태주는 손을 들어 주의를 끌었다.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명현석의 가족관계가 홀어머니, 한 분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요?”
“그럼, 여기 청과물 가게 주인 중 한 분을 섭외하는 건 어때요? 명현석의 홀어머니가 작은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걸로요. 명현석은 어머니가 여기서 가게를 하는 걸 알고도 이쪽으로 달리기를 하는 거죠. 자신이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요. 왠지 명현석이라면 그랬을 것 같아요.”
혼자 고민했던 생각을 밖으로 꺼내는 순간.
스태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와, 태주 씨, 동락이한테 그 씬 지웠던 거, 들은 거예요?”
“그 버전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태주 씨도.”
“무슨 소리예요?”
“맨 처음에 썼던 대본이 태주 씨가 아까 말한 버전이랑 비슷해요. 은설아, 말해봐. 명현석하고 홀어머니 씬, 그거 원래 대본에서 지웠던 거 아니야?”
원래 대본에 있었던 씬이라고?
심은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시장에서 명현석이랑 홀어머니랑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지. 그런데 그게 제법 감정씬이 복잡해서……, 조성복 선배는 그런 거 못 한다고 나자빠지길래 대본을 수정했었어.”
“그래서 제가 지금 대본이 납득이 안 됐던 거예요.”
태주가 열심히 설명했다.
“명현석이 홀어머니 앞에서 훈련을 하는 건 그가 꿈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각오를 보여주는 좋은 장면이라 생각해요.”
“사실 그게 맞죠.”
심은설이 태주를 인정했다.
“동락이 너도 예전 버전을 더 좋아했잖아.”
동락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그렇지만……. 과일가게 주인 섭외가 가능해야 말이지.”
“아주머니들이 잠깐 나오는 건 괜찮다고 했어.”
심은설이 핸드폰에서 예전 대본 파일을 열었다.
“대사도 별로 없어, 그냥 뒤에서 ‘우리 아들, 파이팅! 힘내라!’ 그 한마디만 하면 돼.”
“흐음……. 가능하다면 이 버전이 더 좋기는 하지.”
동락은 태주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홀어머니를 이 씬에 추가하는 순간, 명현석의 감정선이 좀 더 복잡해져. 이전에는 그저 치열하게 훈련을 하는 씬이었다면. 이제는 열심히 훈련하다가 어머니의 응원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그러나 시합을 위해 자신을 다잡는, 그런 복잡한 감정을 연기해야 한다고.”
심은설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애초에 의도했던 게 그거였어. 그래야 명현석의 감정이 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거든.”
“나도 이 버전이 더 나은 듯.”
“성복 선배는 연기력이 딸려서 그렇다 쳐도 태주한테는 기대해 볼 만하잖아.”
“어때, 서 감독? 태주 말대로 해보는 건.”
주변의 긍정적인 반응과 달리 동락은 다소 망설였다.
그가 태주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겠냐?”
감독의 확신은 곧 배우에 대한 믿음과 직결된다.
지금 감독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태주는 동락의 불신을 이해했다.
동락은 누구보다 이 영화에 진심이었다.
매 장면, 매 캐릭터에 공을 들인다는 것도.
더 좋은 영화를 위해 누구보다 노력한다는 것도.
하지만 작품을 서둘러 완성해 영화제에 제출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주연배우인 자신이 믿음을 줘야 했다.
다름 아닌 연기력으로.
“너도 알잖아. 나 한번 하면 제대로 하는 놈인 거.”
태주가 나지막한 눈길로 동락을 압도했다.
“그러니까 나 한번 믿어봐.”
잠시의 침묵.
동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한 눈빛에는 결연함이 보였다.
“몇 분이면 되겠냐.”
“10분만 줘.”
태주가 눈썹을 씰룩였다.
“그거면 충분해.”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