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61
61화
첫사랑 (3)
1년 전.
방송국 복도에 늘어선 수많은 대기실.
어떤 곳에서는 화기애애한 웃음이, 어떤 곳에서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러나오는 이때.
‘래빗걸즈’ 종이가 붙어있는 조그마한 대기실에서 신서우가 울음을 참으며 뛰쳐나왔다.
그녀의 등 뒤에서 멤버들이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매서웠다.
“하여간 잘난 척은. 너나 잘해, 실수한 거 가지고 지적질하지 말고.”
“잘 꾸려진 데뷔조에 막차 탄 건 너야.”
“춤 좀 춘다고 선생 노릇 하지 말고 꺼져, 우리도 알아서 잘하니까.”
“원스타에서 퇴출당한 주제에.”
대기실을 나와 복도를 배회하던 신서우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나는 그저 좋은 무대, 완벽한 무대를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그런 그녀에게 멤버들은 오지랖이 넓다, 잘난 척을 한다, 오버한다 등등의 독설을 퍼부었다.
멤버들의 총공격에 점점 기가 죽고 의기소침해졌다.
이러려고 아이돌 데뷔한 건 아닌데.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때, 그녀는 앞에 지나가던 누군가와 쿵, 부딪혔다.
“서우야.”
열일곱의 두 소녀가 만난 순간.
신서우는 눈앞에 설채빈을 마주했다.
한때는 원스타 엔터에서 같이 연습생을 했던 동료이자 친한 단짝.
그런 단짝 앞에서 이런 비참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잘된 모습이면 모를까.
-우리 꼭 같이 잘되자!
연습실에서 서로를 응원하던 그때와 지금이 너무나도 비교되었다.
걸그룹 ‘블루밍’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그녀는 데뷔 1주 차에 음악방송 1위를 석권, 현재는 톱아이돌로 자리 잡았다.
딱 봐도 싸구려 재질의 원피스를 입은 자신.
그에 비해 고급스러운 붉은 벨벳 원피스에 명품 악세사리를 찬 설채빈은 무척이나 예뻤다.
설채빈은 친구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서우야. 음…… 잘 지내고 있지?”
그녀의 다정한 말에 신서우는 버럭 심술이 났다.
그동안 설채빈이 연락했는데, 자신이 씹은 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잘 지내냐는 말이 매우 불쾌하게 들렸다.
자격지심이 턱밑까지 차올라서 그런 걸까, 설채빈의 이런 친절이 고까웠다.
“내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
“아니, 그게 아니라 잘…… 지냈으면 좋겠어서. 넌 나보다 춤도 잘 추고, 항상 열심히 노력하니까…….”
두 사람의 시선에 서로만이 담긴 순간.
신서우는 설채빈의 미안하다는 눈에 괜스레 가슴이 찔렸다.
같은 꿈을 향해 나아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녀는 저 하늘 위에, 자신은 듣보잡의 위치에 있다.
한참을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
먼저 손을 뻗은 건 설채빈이었다.
와락.
그녀는 자신의 의상이 구겨지는 건 상관하지 않고 신서우를 꼭 끌어안았다.
“뭐, 아무려면 어때. 서우야,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반갑다.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자, 우리 친구잖아.”
따뜻함이 가득 실린 어투와 그녀만을 바라보는 오롯한 눈빛.
신서우는 설채빈을 와락 쳐냈다.
상대의 따뜻함이 자신에게는 비참함으로 다가왔다.
“괜히 쇼하지 마.”
“서우야.”
“사람들이 추켜세워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내가 너한테 연락하고 막 잘 보여야 하니?”
환한 미소로 가득 찼던 설채빈의 얼굴이 점점 그림자로 뒤덮였다.
신서우는 그녀를 툭, 치고 지나가며 속삭였다.
“넌 네 레벨에서 노세요, 나 같은 잔챙이 챙기는 척하지 말고.”
그러나 그녀는 얼마 못 가 돌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까 한 말들이 후회되었다.
설채빈에게 퍼부었던 말들은 톱아이돌로서 성공한 그녀가 부러워서, 질투가 나서 그런 것이었다.
이런 자신이 가증스러웠다.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뛰어가는 설채빈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손등으로 눈을 훔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은 그렇게 놓쳐 버렸다.
가장 힘들 때 진심 어린 말로 위로해준 동료를.
그리고, 자신이 제일 좋아했던 친구를.
* * *
[채빈이한테 사과해야지, 하면서 몇 번이고 편지를 썼어요. 제가 걔한테 그렇게 큰 상처를 줬는데, 어떻게 해야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을지 너무 고민되더라고요.]“그 편지를 전해주기는 했고요?”
[아니요.]신서우가 망설이며 덧붙였다.
[막상 주려고 생각하니 너무 엉망인 거예요. 그리고 채빈이가 제 편지를 읽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 애초에 왜 그런 말을 퍼부었냐. 설채빈이 생긴 건 새침해 보여도 애는 착한 것 같던데.]이중협의 참견에 신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후회와 반성이 가득했다.
태주는 울상이 된 소녀를 위로했다.
“한 번의 실수였잖아요. 진심으로 미워한 것도 아니고요.”
문뜩 그는 설채빈을 생각해 보았다.
인간 명품, 쿨톤이 잘 어울리는 백옥같은 피부에 새침하니 예쁜 외모의 설채빈.
그동안 태주가 본 설채빈은 도도하니 당당한 모습이었다.
새침하게 하강웅의 손등을 꼬집다가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 소녀이기도 했고.
아마도 자신이 그동안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도도한 모습에 가려진 다정함과 따뜻함을.
신서우는 태주에게 바짝 붙어서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저 진짜 걔한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요. 그리고 채빈이는 정말 좋은 아이라고, 앞으로도 잘 해낼 거라고 응원해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오빠, 좀 도와주세요.]철없이 퍼부었던 가시 박힌 말들을 지금은 죽어서 사과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더욱 신중해야 했다.
설채빈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은 신서우의 마음이 얼마나 진지한지 알기 때문에.
“일단. 고민해볼 시간을 주세요.”
* * *
“역시 10대 팬들의 화력이 대단하네.”
드림액터스의 홍보팀장이 유튜브에 인기동영상으로 올라온 영상을 보며 감탄한다.
윤지호의 무대에 태주가 피처링으로 함께한, M 스테이션 녹화본.
해당 영상은 인기동영상 5위에 랭크되어 조회 수 200만을 기록했다.
특히 홍보팀장이 유심히 보는 건 댓글.
대부분은 윤지호를 겨냥했지만, 그중 일부는 태주를 향했다.
-윤지호 이번 곡 좋네.
-음원차트에서도 3위 기록했음, 성적 좋음.
-근데 피처링, 한태주 배우 맞지? 노래 잘하네, 이 곡에 딱 어울려.
-어쩐지 뮤비에 왜 한태주가 나오나 했다. 진짜로 피처링을 했었구나. 근데 한태주하고 윤지호하고 친해?
-한태주 배우님, 강웅이 오빠하고 친하잖아요. 저번에 드라마 촬영 답사도 같이 갔다 왔어요.
-노래도 곧잘 잘하시는데요? 담백하면서도 감성 풍부한 게 내 마음을 울린달까.
-솔직히 우리 지호 오빠 컴백 무대에 누가 같이 서는 거 별로였는데. 뭐…… 이번 무대는 괜찮았던 듯. 실력이 되니까 인정하겠음.
-근데 윤지호랑 한태주랑 둘이 어떤 관계임? 피처링을 부탁할 정도의 관계였나?
-윤지호 인스타에서 본 적 있음, 예전에 한태주가 홍대에서 이 곡으로 버스킹했는데, 마음에 들어서 자기가 다시 편곡했다고. 근데 노래 진짜 좋다.
-생각보다 한태주랑 윤지호랑 잘 어울리네. 한태주, 무대도 잘하는 게 프로 아이돌 재질인 듯.
-음정이며, 가사며 뭉개지는 거 없이 시원해서 좋음. 이번에 드라마 OST도 불러주면 좋겠다.
-한태주랑 설채빈, 하강웅 나온는 드라마가 ‘당신도 누군가의 봄이었다’였죠? 그거 기대되는데요.
영상 속 태주가 노래 부르는 모습이 무한 재생된다.
약간 굳어있는 게 보였지만 그 실력만큼은 윤지호 못지않았다.
화려한 기교가 가득한 윤지호의 톤과 비교되는 시원스러운 보컬이 오히려 듣기 좋다는 평도 다수였다.
한참 영상을 보던 홍보팀장은 직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팀장님, 굿스토리 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드라마 OST 한 곡을 통으로 아역 3인방한테 맡기고 싶다고요.”
“그래? 곧 촬영 들어가는데 일정이 빠듯하겠는걸.”
“음악방송에서 그 곡으로 특별 공연까지 한대요. 간단한 안무도 맞춘다던데, 많이 바빠질 거 같아요.”
홍보팀장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래도 아역 3인방한테 지금 관심이 쏠리고 있으니, 이 정도는 해내야지. 특히 한태주는 더더욱.”
“한태주 어깨가 무겁겠어요. 전영수 감독이 아역 3인방 중, 한태주한테 특히 기대를 많이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건 당연하지. 설채빈, 하강웅이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한태주한테는 비빌 수 없으니까. 게다가 연기의 방향이 틀리면 한태주가 바로 잡아줘야 하고. 하여튼 차 팀장이 재미 좀 보겠어.”
홍보팀장은 재밌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아역들 분량은 한태주가 중심을 잘 잡느냐, 아니냐에 따라 흥행이 갈릴 테니.”
* * *
며칠 후.
이전에 하강웅과 태주가 사전답사 온 상주로 드라마 촬영하러 왔다.
첫 촬영은 이상구가 전학생 오강준에게 마을 곳곳을 소개시켜 주며 고택을 지나치다 하예린과 마주치는 씬이다.
평소에는 한적한 동네지만 오늘만큼은 붐볐다.
촬영 장비를 세팅하는 제작진. 그리고 구경나온 마을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중에는 고택의 주인인 김지수도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태주 씨!”
“안녕하셨어요?”
“저하고 물수제비 뜰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보니까 배우 포스가 나는데요? 오늘 촬영 파이팅이에요~.”
태주는 그녀와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동료 배우들에게 돌아왔다.
다 같이 대본을 맞춰보다가 잠시 쉬는 시간.
대화의 흐름이 ‘Mcom 특별 공연’으로 흘렀다.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특별무대라 프로 아이돌처럼 그렇게 빡세게는 안 들어갈걸요.”
“형 모르시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제가 잘 가르쳐 드릴게요.”
“그렇게 어려운 춤은 안 준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루브 살리면서 추는 춤이 더 어려운데……. 하지만 저라면 손쉽게 출 수 있어요. 제가 예전에 원스타 엔터 연습생 때도 춤으로는 날렸거든요.]설채빈 옆에 딱 붙어있는 신서우를 발견한 태주.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신서우 저 녀석, 저렇게 설채빈이 좋나.’
자신을 보는 태주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신서우가 윙크한다.
[저도 그렇지만, 우리 채빈이, 참 예쁘지 않아요?]“뭐……, 뭐?”
[얘 별명이 천도복숭아였어요, 복숭아상 중에도 제일 예뻐서요. 근데 지금은 더 예뻐졌네요.]신서우는 계속해서 태주 옆에 붙어 재잘댄다.
꼭 체육관에서 마주쳤던 그 할아버지 귀신과 비슷했다.
그가 자신을 대신해서 설채빈에게 마음을 전달해줄 때까지, 딱 붙어있을 모양이다.
“오빠, 태주 오빠!”
태주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를 마주하던 설채빈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다.
“응?”
“아까부터 저를 보셔서요. 무슨 하실 말이라도…….”
설채빈의 말에 태주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설채빈 옆에 딱 붙은 신서우를 보다 보니 오해를 받았나 보다.’
“아니야, 아무것도.”
설채빈이 멋쩍은 듯 얼굴을 붉히자 옆에서 하강웅이 대뜸 끼어들었다.
“으이그, 설채빈 이 자뻑쟁이야. 모든 남자가 너만 본다고 생각하지 마셔. 네가 아무리 고백을 많이 받았어도 너는 태주 형 타입은 아니시네.”
“뭐라는 거야!”
하강웅과 설채빈이 투덕거리는 사이, 태주는 흔들리는 생각을 다잡았다.
‘이게 다 신서우 때문이다. 그 녀석이 설채빈을 신경 쓰는 것 때문에, 나도 덩달아 신경을 쓰게 됐잖아.’
그때, 전영수 감독이 그들 셋을 불러 리허설을 진행했다.
조금 전까지 합을 맞추었던 아역 3인방.
연습할 때의 유려한 티키타카는 똑같았다.
단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설채빈을 보는 태주의 시선이다.
예전에도 대본을 충실히 반영한 그였다.
그러나 신서우의 감정을 신경 쓰는 지금.
태주가 설채빈을 마주하는 시선에는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
그를 유심히 보던 전영수 감독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태주 씨, 지금 그 시선 좋은데요?”
“네?”
“아까 채빈 씨 보던 그 시선 말이에요. 평소의 멜로 눈빛에서 좀 더 깊어진 느낌이랄까? 좋아하는 여자애를 신경 쓰는듯한 그런 몽실몽실한 느낌이 아주 좋았어요. 이따가 촬영 때도 그 감정 그대로 갑시다.”
‘내가 그런 시선을 했다고? 아, 신서우가 설채빈을 신경쓰는 것 때문에 나도 달라진 건가?’
태주가 얼떨떨함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의 곁을 맴도는 신서우가 씩 웃었다.
[저 덕분에 감정선이 풍부해진 것 같은데요? 제가 채빈이를 좋아하는 감정, 그대로 오빠한테 전해드릴 수 있어요. 그럼 드라마 촬영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그 말이 맞는 것도 같고.’
태주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알았으니까, 이따가 촬영 끝나고 얘기하자.”
때마침 조연출이 목소리를 높인다.
“촬영 시작할게요. 다들 조용히 해주세요.”
배우들이 제 자리로 이동한다.
태주는 하강웅과 나란히 복도의 끄트머리에 섰다.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 그를 보는 차용석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이중협과 신서우도.
다들 첫 촬영을 기대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중.
그때, 카메라 앞에 있는 전영수 감독이 마이크를 대고 크게 소리쳤다.
“레디, 셋…… 액션!”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