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62
62화
첫사랑 (4)
“상구, 니가 반장이니까, 강준이 동네 구경도 시켜줄 겸 여기저기 잘 좀 설명해줘라.”
담임 선생님의 부탁으로 이상구는 오강준을 데리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여는 우리 동네 핫 플레이스. 분식집이 그래 맛있는데, 오뎅이랑 떡볶이 둘 다 대박이다. 값도 싸고. 쫌 이따 동네 한 바퀴 돌고, 무러 가자.”
활달한 이상구에 비해 오강준은 그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들이 동네를 가로지르자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산림고등학교에서 엄친아로 소문난 이상구 옆에 등장한 잘생긴 남학생 때문이리라.
지나가던 여학생들은 오강준을 보고 괜히 머리를 한 번 넘기며 수군거렸다.
“이상구 옆에 누고? 왤케 잘생겼노.”
“쟤, 이번에 전학 온 오강준 아이가??”
“우예 저런 하얀 백설기 같은 얼굴에서 저런 날카로운 미가 나오노?”
“키도 큰데 비율도 좋다아이가. 억수로 멋있다야.”
이상구와 나란히 걸어오던 오강준이 그들 곁을 쓱, 지나치자.
빳빳하게 다려진 마이에서 포근한 비누 냄새가 스쳤다.
“와, 냄새까지 대박!”
스르륵, 쓰려지려 하는 여자아이들을 뒤로하고 이상구는 오강준을 데리고 마을 위쪽 고택으로 향했다.
웅장하면서도 고매한 저택에 오강준이 관심을 보였다.
“여긴 누가 사냐? 이곳 터줏대감?”
이상구가 대답하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서 있는게 보였다.
산림고의 소문난 왈가닥, 하예린이었다.
그녀는 눈앞의 이상구를 보고 잘 만났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이상구! 니 내가 학교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 기다리다가 힘들어갖고 먼저 왔다아이가!”
오강준이 눈썹을 씰룩였다.
“누구야? 여자친구?”
이상구가 버럭했다.
“저런 왈가닥이 우예 내 여친이고? 절대 아이다!”
“네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니까. 닌 우예 그런 무시무시한 오해를 하노?”
그동안 무심했던 오강준의 얼굴에서 묘한 관심이 일렁이던 순간.
하예린이 이상구의 등짝을 내려치려는 듯 팔을 든 채 다가왔다.
“닌 쫌 맞아야 된다. 감히 내를 두고 도망가노!”
“히익, 마녀 납셨네!”
이상구가 냅다 도망을 갔다.
“이상구, 얼렁 이리 온나!”
허겁지겁 고택에서 뛰쳐나오던 하예린이 턱에 발이 걸렸다.
“어어…… 어어어!”
중심을 잃고 하예린이 넘어지려 하자, 오강준이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하예린은 그대로 오강준의 품에 안겼다.
품에 완전히 묻힌 코끝에 포근한 비누 냄새가 스쳤다.
그제야 하예린이 오강준의 존재를 눈치채고 고개를 든다.
오강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야, 왈가닥. 어디 다친 데는 없지?”
그의 말에 하예린의 얼굴이 확 발개졌다.
그녀는 오강준에게서 서둘러 떨어졌다.
“아, 다친데 없다! 그리고 내…… 왈가닥 아니거든!”
“그럼 됐어.”
오강준은 미련 없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입꼬리는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 * *
똑같은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몇 번이나 찍었을까.
마침내 전영수 감독의 만족스러운 컷 신호가 떨어졌다.
“오케이, 컷! 좋았어요, 세 사람 모두!”
태주는 하강웅과 설채빈을 데리고 모니터로 향했다.
넘어지려던 설채빈을 일으켜 자신의 품으로 안는 장면.
전형적인 로코의 클리셰를 훌륭하게 재현했다는 데 이의를 두었다.
옆에서 이를 보던 이중협은 좋아서 죽기 일보 직전이다.
[역시 로코는 이런 간질간질한 씬들이 백미라니까!]모니터링을 하던 전 감독이 까끌까끌한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이거, 티저로 써도 좋겠는데. 씬이 예쁘게 잘 뽑혔어.”
옆에 있던 조연출이 태주를 보며 키득거렸다.
“솔직히 태주 씨가 워낙 반듯해서 오강준 같은 반항아를 얼마나 잘 소화할지 궁금했는데. 오늘 보니까 와, 세렝게티 눈빛인 게, 완전 오강준 그 자체네요!”
“감사합니다.”
“태주 씨 연기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앞으로 특별히 신경 써 줄 게 하나가 있다면…….”
태주는 전 감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채빈 씨하고 태주 씨 사이에 뭔가 그 몽글몽글한 텐션이 더 필요할 것 같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전영수 감독은 태주 옆에 있던 설채빈을 부르더니 말을 이었다.
“이제는 채빈 씨하고 태주 씨하고 둘이 실제로 더 친해질 차례예요. 평소의 케미가 그대로 작품에도 반영되니까.”
“네, 그럴게요!”
설채빈은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야심한 밤.
촬영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
피곤했지만 앞으로는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다.
지방 촬영장과 서울을 오고 가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으니까.
그때.
띠링.
알림이 울리고 태주가 핸드폰을 확인한다.
-오빠, 저 채빈이에요.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요!
헤어지기 전 전화번호를 교환했는데 이렇게 빨리 문자가 올 줄이야.
때마침 하강웅한테서도 문자가 왔다.
-형. 설채빈이 형하고 친해지려고 하는가 본데. 형은 저하고 먼저 친해졌다는 거 잊지 마세요! 형의 베프는 저예요!
그 후로도 설채빈과 하강웅은 경쟁하듯 태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앞으로 자기가 더 친하게 지낼 거라는, 별것 아니지만 재밌는 내용이었다.
태주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역배우 시절부터 수많은 촬영장을 다녔던 그였지만, 배우들과 이렇게 친해진 적은 드물었다.
어렸을 때는 대본을 완벽히 외우느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까.
지금도 연기에 집중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동료 배우들과 함께 씬을 만들어간다는 협업심이 강했다.
태주가 문자를 보며 큭큭대자, 차용석이 귀를 쫑긋했다.
“오늘 촬영 힘들지 않았어?”
“아, 괜찮았어요. 연기하는 게 정말 즐거웠거든요. 티비로 보면 얼마나 재밌을까 기대돼요.”
“이번 주는 계속 바쁠 거야. 드라마 촬영에 화보 촬영도 잡혔거든.”
“무슨 화보인데요?”
“아역 3인방 화보. 원래는 이선우, 김결, 윤수안 이렇게만 찍으려고 했는데, 아역 3인방 반응이 워낙 뜨거워서 추가로 찍기로 했어.”
차용석이 뿌듯한 가슴을 쫙 폈다.
“그러니까 오늘은 들어가자마자 일찍 자라. 내일 9시에 데리러 올게.”
* * *
밤늦게 집에 도착한 태주.
서둘러 씻고 침대 위에 덩그러니 누웠다.
그리고는 휴대폰으로 설채빈 사진을 검색했다.
설채빈과 케미가 살아야 한다는 감독님의 특급 미션을 나름대로 실천하기 위함이다.
“몽글몽글한 텐션……, 케미…….”
토끼 머리띠를 한 설채빈.
무대에서 종횡무진하는 설채빈.
앵두입술을 하고 윙크를 하는 설채빈.
[어때, 좋아질 것 같냐?]“모르겠어요. 예쁘긴 한데, 뭔가 태희처럼 귀여운 면이 강한 것 같기도 해서요.”
갑자기 옆에서 신서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일단은 핸드폰 배경 화면부터 채빈이로 바꿔봐요. 맨날 보면, 절로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어요?]예상치 못한 조언에 태주가 눈을 크게 떴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중협이 형, 어때요?”
[괜찮은 것 같은데? 원래 로맨스라는 게 자꾸만 눈앞에 보일 때 불이 붙는 거거든. 근데 네가 설채빈하고 실제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라도 매일 보며 감정을 키워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오빠, 제가 채빈이 예쁜 사진 골라 드릴게요.]태주가 신서우의 도움으로 배경 화면 사진을 고르는 동안.
옆에서 이중협이 오묘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이렇게 맨날 설채빈 생각만 하다가 걔 진짜 좋아하게 되는 거 아니냐?]태주가 어이없는 듯 대꾸했다.
“형, 제가 극 중 감정하고 실제 감정도 구분 못 할 줄 아세요?”
[사람 마음이 뭐, 자기 마음대로 되는 줄 아나.]툴툴대던 이중협이 그에게 문뜩 물었다.
[그럼 너, 학교생활 할 때 사귄 여자친구 있냐? 몇 명이야?]“대학교 1학년 때 사귄 여자친구 한 명 있어요. 한 6달 사귀었나.”
[패스트 러브였구만. 너 정말 순정파하고는 거리가 멀구나.]“걔가 먼저 찼거든요.”
[뭐야, 우리 태주를 찼다고?]“오래된 기억이에요. 지금은 별거 아니고요.”
이중협의 왈왈거림을 뒤로한 태주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 버렸네, 그 암울했던 기억.
타학교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를 정말 좋아했지만, 정작 그녀는 다른 남자로 갈아탔었다.
‘돈도 많고 더 나은 애를 찾았다나, 뭐라나.’
이때 일은 고모도 모른다.
아마 알았다면 고모가 빡 돌아서 걔를 잡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제. 그만 물어보시고, 사진이나 함께 봐요.”
태주는 여러 사진 중 한 장을 골라 배경화면으로 지정했다.
하얀 반팔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자연스레 늘어뜨린 설채빈이었다.
태주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다.
“아, 이렇게 보니까 예쁘긴 진짜 예쁘다.”
[채빈이가 진짜 사람 홀릴 듯이 예쁘다니까요.] [예쁘긴 하네. 얘한테 안 반하는 게 더 어렵겠다.]태주는 한동안 설채빈을 하예린에 대입해서 바라보았다.
‘진짜 이런 외모면 안 반하기가 어렵겠다.’
별처럼 반짝거리는 외모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눈빛.
이게 오강준이 하예린에게 반했을 때의 감정인 걸까.
태주는 배경화면 속 설채빈에게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한다.
* * *
다음날, 오전, 강남의 한 스튜디오.
오늘은 드라마 ‘당신도 누군가의 봄이었다’ 방영 특집으로 화보를 찍는 날이었다.
아역 3인방이 한곳에 모인 상황.
태주는 이른 아침부터 샵에 들렸다가 스튜디오로 향했다.
매니저 차용석도, 스타일리스트들도 다들 태주를 세심하게 바라본다.
“세인 씨, 여기 아이라인 수정 좀 부탁해요.”
“얇은 체인 목걸이 하나 더 가져다줘.”
“태주 씨. 반지는 얇은 거로 끼자. 워낙에 손이 길쭉하니 예쁘니까 그게 좋겠어.”
태주는 찢어진 검은 바지, 헐렁한 청자켓에 하얀 셔츠를 안에 덧대 입었다.
그의 포인트는 목에 걸친 화려한 목걸이들, 살짝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반항적이면서도 잘생긴 외모였다.
“이거 뭐, 제임스 딘이 따로 없구만.”
차용석은 마치 아들을 바라보듯 흐뭇한 시선을 지었다.
태주가 쑥스러워 헛기침했다.
[이봐, 제임스 딘. 오늘 멋있게 잘 찍으라고.] [오빠 진짜 잘생겼어요! 발로 찍어도 A컷 나올 것 같은데요?]이중협과 신서우의 장난 콤보에 어이가 없어서 긴장이 풀려버렸다.
곧 촬영장에 설채빈과 하강웅이 도착했다.
다들 드라마 속 자신의 컨셉과 어울리게 옷을 입었다.
설채빈은 하얀 플리스 스커트와 크롭 반팔 블라우스로 자유분방한 아름다움을.
하강웅은 니트 반팔과 하얀 바지로 단정함을 더했다.
그들이 촬영장에 올라가자 스태프들은 벌써 감탄을 터뜨렸다.
“이야, 아역 3인방이 성인 3인방 못지않게 멋지다!”
“채빈 씨가 가운데 서고, 양옆으로 태주 씨랑 강웅 씨가 서 보세요. 네, 그렇게!”
구도를 잡고 포토그래퍼가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얼마 전 이선우, 윤수안, 김결 조합으로 화보를 찍은 그였다.
그 때문에 솔직히 아역들은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아역 3인방의 존재감은 예상보다 컸다.
톱클래스 아이돌로서 여러 번 화보를 찍어본 하강웅과 설채빈이 능숙하게 리드해서 그런 걸까.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만, 지금 제일 눈에 띄는 건 한태주였다.
이번 화보의 컨셉인 ‘한 여자만 사랑하는 반항아’을 너무나도 잘 소화해서 모두를 감탄시키는 중이다.
설채빈의 얼굴을 큰 손으로 감싸며 바라보는 눈빛.
하강웅을 오만하게 내려보며 응시하는 표정.
중앙에 서서 자신감 넘치는, 그러나 쓸쓸한 시선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덕분에.
포토그래퍼는 매 순간 플래쉬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모델을 했었다더니, 화보도 곧잘 찍네.”
“곧잘 정도가 아니에요. 한태주의 섬세한 표정 연기가 돋보여서 전체적으로 화보에 과몰입된다고요.”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이 태주를 보며 황홀한 감탄을 내뱉었다.
“이선우도 진짜 멋있었는데, 한태주까지 이렇게 멋있으면 어떡하라는 거야.”
“이번 드라마, 아역이든 성인 역이든 진짜 개 재밌겠다. 저렇게 치명적인 남주는 오랜만이잖아.”
“그러게. 어떻게든 이번 드라마, 본방 사수해야겠어.”
* * *
한창 촬영이 진행되던 이때.
구석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드는 한 스태프.
태주를 살피느라 정신없는 차용석이 한쪽에 내려놓은 물건 중 하나였다.
다들 바빠서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 걸 확인하고 과감하게 핸드폰 화면을 켜니, 잠금화면에 나오는 설채빈의 사진.
스태프의 눈이 왈칵 커졌다.
“뭐야, 둘이 연애하는 거야?”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