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63
63화
첫사랑 (5)
잠금 배경화면에 가득 차 있는 설채빈의 사진.
눈이 휘둥그레진 스태프는 화면을 여러 번 확인했다.
한태주와 설채빈이 드라마를 찍으며 많이 가까워졌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을 배경 화면으로 해둘 정도로 친하다고?
한태주하고 설채빈하고 사귀나?
에이, 아닌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결국 그녀는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한태주의 핸드폰 배경 화면을 찍었다.
그 어떤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겨를이 없었다.
그저, 설채빈과 한태주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확신에 스스로 빠져들었을 뿐.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던 스태프는 히죽 웃었다.
“아웃패치에 제보하면 좋아하겠는데.”
* * *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 촬영이 계속됐다.
바쁜 일정이었지만 태주는 힘들기보다는 즐거웠다.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가는 그 순간마저도.
운전석에는 매니저 차용석 팀장이, 옆에는 이중협이 자리하는 게 꼭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촬영장을 다니던 때 같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한 번도 그때의 기억을 되살린 적이 없었기에 이런 경험은 생소했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촬영장을 다니던 그 시절이 행복했듯이. 차용석, 이중협과 함께 촬영장을 다니는 지금도 더없이 행복하다고.
차 안에서 대본을 연습하고, 때로는 휴게소에 들려서 회오리 감자를 사 먹는 그 모든 순간이.
차용석과 함께 지내며 태주가 느낀 건,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거였다.
그는 태주의 연기를 함께 모니터링하며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었다.
“배우는 매번 남의 감정을 연기하잖아. 그러니까 너는 네 감정을 잘 돌볼 줄 알아야 해. 어떤 것이 네 진짜 감정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길 바라.”
“네, 안 그래도 노력 중이에요. 오강준을 연기하며 이게 제 감정인지 아니면 오강준의 감정인지 살짝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서요.”
“워낙 작품에 몰입을 잘해서 그런 거지 뭐. 덕분에 오강준하고 하예린 씬 찍을 때, 그렇게 몽글몽글할 수가 없더라. 내 첫사랑 보는 느낌이었어. 하, 나도 그런 사랑 좀 다시 하고 싶다.”
“형, 여자친구 없으세요?”
차용석이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씰룩였다.
“뭐 아직은…… 일단은 네 사랑이 먼저지.”
“제 사랑이 아니라 오강준과 하예린의 사랑이겠죠.”
“그래, 뭐든. 암튼 너하고 설채빈하고 케미 좋은 건 사실이야.”
작품을 찍으면 찍을수록 태주와 설채빈의 케미는 배가 되었다.
배경 화면을 설채빈으로 해놓은 게 효과가 톡톡히 있던 걸까.
덕분에 첫 만남 씬, 집 앞 배웅 씬 등등 여러 장면에서 전영수 감독의 극찬이 이어졌다.
“역시 한태주 씨! 눈빛 연기가 끝내주네요! 태주는 멜로 연기를 참 잘한단 말이야.”
태주는 노력을 인정받은 거 같아 뿌듯했다.
실제 오강준인 것처럼 하예린과 사랑에 빠진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특히 설채빈을 볼 때 그녀가 아니라, 하예린이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과정에는 신서우와 이중협의 도움이 있었다.
설채빈을 좋아하는 그녀는 태주의 어색한 감정선을 고쳐주었고.
이중협은 태주의 표정을 세심하게 코치했다.
하예린에게는 순애보를 바치고, 친구 이상구에게는 질투의 감정을 보이는 오강준의 캐릭터는 그렇게 완성됐다.
혼자서 열심히 하면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태주의 생각이 깨진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적절히 받아들이면 좋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다.
그것이 지금의 태주 생각이었다.
* * *
며칠 후.
태주는 드라마 촬영을 위해 서울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드라마 전개상 오강준이 하예린과 함께 서울로 놀러 온 날.
부모님이 애지중지하는 하예린은 한 번도 혼자 서울에 와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서울에서 가고 싶던 곳은 남산타워.
좋아하는 오강준과 단둘이 데이트하는 게 그녀의 목적이었다.
태주가 촬영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상주에서의 촬영은 동네 사람들만 구경을 나올 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적은 없었다.
조연출은 사람들을 단속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차용석은 오히려 이런 인파가 반가운 듯 씩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사람 사는 것 같구만! 상주에서 촬영하는 건 너무 쓸쓸했다고!”
태주가 걸어가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한태주다! 완전, 잘생겼어요!”
“팬이에요, 사진 한 번만 부탁드려요~”
“대박, 진짜 잘생겼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팬들.
태주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그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등 최선을 다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수도 있었다.
태주가 찍어준 셀카를 본 팬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면 속 셀카가 너무 못생기게 나왔기 때문이다.
아래턱은 크고 눈은 작고.
셀카를 확인한 태주가 덩달아 경악했다.
예전에 태희와 고모한테 셀카 연습 좀 하라고 그렇게 주의받았는데.
‘미치겠네, 팬들한테 이런 대실수를 하고.’
“죄송해요, 제가 좀 똥손입니다. 다시 찍어드릴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대신 태주가 해주는 사인에는 다들 열광했다.
남자 글씨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예뻤기 때문이다.
차용석이 궁금한 듯 물었다.
“셀카 실력은 꽝인데, 어떻게 글씨는 그렇게 예쁘게 써?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야.”
“그러게요, 저도 궁금해요. 어디서 셀카 능력이라도 전수 받았으면 좋겠어요.”
뜻을 알아챈 이중협이 키득거렸다.
[셀카 잘 찍는 귀신 있으면 도와주려고 그러냐?]‘그것도 좋겠는데요? 어디 그런 귀신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능글맞게 대답한 태주가 먼저 앞서 나갔다.
뒤에 남은 차용석이 피식 웃었다.
“하긴, 사람이 너무 완벽해도 매력이 없지.”
* * *
남산타워에서 최근 가장 핫한 드라마 중 하나인 ‘당신도 누군가의 봄이었다’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다들 숨을 죽인 채 연기하는 배우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에는 단연 한태주가 들어왔다.
하얀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늘씬한 청년의 미모에 모두가 넋을 잃었다.
“연기 천재라고 해서 얼마나 잘하려나 했는데, 진짜 잘하네요.”
“괜히 이선우 아역으로 뽑힌 게 아니었네.”
“요즘에 관리받나? 대본 리딩 때보다 지금이 더 잘생겨진 것 같은데?”
“역시 한태주는 톤이 사기라니까. 벨벳처럼 흘러내리는 저 중저음의 목소리.”
“얼굴도 얼마나 잘생겼는데요. 특히 쌍꺼풀 없는 저 선한 눈으로 천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그게 그렇게 멋질 수가 없어요.”
한참 동안 태주에게 머무른 시선이 그와 대사를 나누고 있는 설채빈에게로 옮겨졌다.
그녀가 설레는 표정으로 한껏 태주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하얀 얼굴에서 살짝 발개진 볼, 부끄러운 듯 모으는 두 손, 귀 뒤로 넘기는 머리카락 등등.
그녀의 모든 것이 태주에게 설렌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 점을 팬들은 놓치지 않았다.
“한태주랑 연기할 때, 설채빈이 유독 수줍어하는 것 같은데. 진짜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에이, 저것도 다 연기죠.”
“설채빈 웹드라마에서도 연기 잘하기로 유명했어요.”
그러나 몇몇 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태주는 설채빈을 이끌며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둘이 손을 잡고 타워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다, 사랑의 자물쇠를 채우는 옥상까지 왔다.
“자, 자물쇠를 채우는 순간, 둘의 손이 부드럽게 겹쳐지는 겁니다!”
전영수 감독의 호쾌한 디렉팅이 떨어진 순간.
자물쇠를 잠그는 하예린의 손 위에 오강준이 손을 얹었다.
따스한 온기가 손등에 전해지고. 오강준도, 하예린도 누가 뭐랄 것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태주는 설채빈의 눈을 바라보며 대사를 되새겼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중요한 씬.
여러 번 리허설한 부분인 만큼 실수 없이 해내고 싶었다.
제작진과 팬들의 시선이 쏠린 이때, 그는 설채빈의 손등을 들어 입을 맞췄다.
“이제 너, 나하고 영원히 가는 거다.”
“……영원히?”
“그래, 난 영원히 네 사람이고, 널 사랑할 거야. 그러니까 너, 나한테 코 꿰인 거다?”
낭만으로 범벅된 대사였지만.
제작진도, 구경하던 사람들도 모두 침묵을 지켰다.
심지어 리허설 중 연신 ‘어떡해’를 외치던 설채빈까지도.
분명 오글거리는 대사였는데, 이상하게 감탄을 삼키게 되었다.
아마 그건 다을 한태주의 눈빛에 빠져서일 것이다.
고개를 살짝 비튼 얼굴이 오롯이 상대를 응시하는 지금.
시원스러운 눈빛이 애정과 상대에 대한 소유욕으로 가득 찼다.
상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리고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진지함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이상해. 분명 아역 분량인데, 왜 이렇게 재밌는 거냐고.”
“감정선이 탄탄한데 연기도 잘하니까 몰입감 쩔어.”
“특히 한태주 연기, 장난 아니다. 내가 순간 하예린이 된 거 같았어.”
구경하던 사람들의 눈빛이 덩달아 사랑에 빠진 듯 해롱거렸다.
“아, 기다리기 지친다. 이거 도대체 본방은 언제쯤 하는 거야?”
* * *
그날 밤.
QVN 국장실로 힘차게 걸어가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왔지만, 어느 때보다도 활기찬 전영수 감독이었다.
그를 복도에서 마주치던 사람들은 반갑게 인사했다.
“전영수 감독님! 오랜만입니다.”
“요즘 촬영 잘하시고, 계시죠? 얼굴 보기 힘드네요.”
“SNS에 ‘당누봄’ 기대하는 사람들 천지입니다.”
전영수는 후배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작품과 편집에 몰입하다 오랜만에 촬영장에서 다수의 팬과 마주친 그였다.
정말 긴장이 됐었다.
지방 촬영 갔을 때는 팬들의 피드백을 받을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그런데 촬영을 구경 온 수많은 팬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이 드라마, 나만 재밌는 게 아니다.
모두가 재밌어하고 설레하는 이 작품, 어서 공개해야 한다.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국장실에 들어갔다.
피곤한 얼굴로 타자를 치던 국장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 전 감독. 웬일이야?”
“저희 드라마 선공개하겠다는 약속, 잊지 않으셨겠죠?”
“아, 2주간 1화부터 4화, 10분 분량으로 선공개하겠다는 그거? 요즘 열심히 촬영 중이라더니, 끝내 완성해 냈나 보네.”
“네, 막 완성됐습니다.”
국장은 팔짱을 끼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한번 봐보고 싶은데.”
“그래서 선공개할 1화, 편집해서 가져왔습니다. 10분 분량이고, 1화의 엑기스만 뽑아서 만든 겁니다. 이 자리에서 편성까지 확정받아야겠습니다.”
“사람들이 이선우를 기대하지, 한태주를 기대하지는 않을 텐데.”
“보시면 그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자신감 가득한 전영수 감독의 말.
어깨를 으쓱한 국장이 곧 영상을 재생했다.
그리고는 키보드 오른쪽 화살표에 손가락을 올렸다.
재미없으면 언제든 스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영상이 재생되는 10분 내내. 그는 스킵하기는 커녕,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대신 화면 속 한태주와 설채빈, 하강웅의 기대 이상의 연기에 집중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10분 후.
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전영수를 바라보았다.
“이를 갈아도 잔뜩 갈았구만?”
“어떠십니까, 선공개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국장님, 오케이 내주시면 후회 안 하실 겁니다.”
아무 말도 없는 국장에게 전영수가 쐐기를 박았다.
“촬영장을 본 팬들은 한태주의 연기에 이의가 없습니다. 다만, 아직도 한태주가 ‘이선우의 아역’ 혹은 ‘연기 천재’로 알고 있는 시청자들은 그의 연기에 의구심이 들 수 있죠. 그러나 선공개 1~4화를 본다면 그 의심이 싹 사라질 겁니다.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건 믈론이고요. 객관적으로 저희 드라마, 진짜 재밌잖아요.”
잠시 고민하던 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어.”
“그럼….”
“그래, 당누봄 선공개 진행해보자고.”
* * *
드림액터스 배우 3팀 사무실.
차용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주변 직원들에게 말했다.
“4층 연습실은 태주가 쓰고 있으니까, 그렇게들 알아.”
“오늘은 스케줄 없어요?”
“이따가 밤에 춤 연습하는 게 다야. 세상에, 2주 만의 휴일이다, 휴일. 그동안 밤낮없이 촬영했더니, 이렇게 사무실에 있는 것도 어색하네.”
“좀 쉬지, 태주 씨는 연습실에서 뭐 한데요.”
“대본 연습한대.”
“어제도 촬영 마치고 나서 자정까지 여기서 대본 연습하고 가던데.”
몇몇 직원들이 입을 쩍 벌리며 감탄했다.
“하여튼 연습 벌레인 건 인정해야 해. 똑같은 대본을 몇 번이나 다른 톤으로 연습하는지, 몰라.”
“팀장님, 웃으시는 거 봐.”
차용석이 자리에 앉으며 대꾸했다.
“내 새끼가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안 좋아할 매니저가 있나.”
한참 일을 보던 그때.
전화를 막 끊은 직원이 차용석에게 보고했다.
“원스타 엔터테인먼트에서 또 요청이 왔습니다. 윤지호 음방 무대에 한태주 한 번 더 세울 수 없냐고요.”
“안되지. 지금 한태주, 몸이 10개라도 모자라.”
차용석은 엄격한 말과는 달리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근데 윤지호는 한태주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네. 자기 솔로 무대에 피처링을 부르는 일, 잘 없는데.”
“워낙에 태주 씨가 노래를 잘하기도 하지만, 최근에 Mcom 시청자 게시판에서 핫하더라고요. 홍대 버스킹남에서 청량남으로 바뀌었던데요?”
“그래? 우리 태주가?”
곰곰이 생각하며 펜대를 굴리던 차용석.
눈 앞에 펼쳐진 스케줄러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대표님, 이번에 새로 드라마 제작한다는 소문 들었어?”
그 말에 직원들이 흥미롭다는 듯 수군거렸다.
“어머, 그거 진짜였어요?”
“영화가 아니라? 나는 현필름에서 이탁원 감독님 신작 내놓는 거에 우리 대표님도 참여하는 줄 알았는데.”
“이탁원 감독님 영화 좋죠, 정말 그분은 천재세요. 미장셴도 좋고 영화 연출은 더 좋고.”
“글쎄, 그쪽은 접은 지 오래던데. 영화 쪽은 최준모 감독이랑 접촉하시는 것 같더라.”
중구난방으로 떠들던 직원 중 한 명이 정리했다.
“아무튼. 이번에 드라마 제작하면 약 5년만 아닌가요?”
“이번에도 성공하시려나? 우리 대표님, 미다스의 손이잖아요.”
“저번에는 윤수안 주연으로 써서 성공시키더니, 이번에는 누굴 쓰시려나?”
직원들이 차용석을 흘깃했다.
“이번에는 태주 씨 픽하시는 거 아니에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