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7
7화
데뷔작은 단편영화 (2)
대본이 수정됐다.
명현석이 시장통에서 훈련하며 홀어머니의 가게를 지나치는 것으로.
대본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하아…….”
원래 대본보다 훨씬 감정선이 섬세해졌다.
어머니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동요, 혼란, 각오 등을 한 컷에 연기해야 했다.
자신감도, 부담감도 느껴졌다.
그때, 저쪽에서 동락이 서둘러 뛰어왔다.
“안 되겠어, 10분 사이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어.”
태주는 촬영 스텝과 눈을 마주쳤다.
“그럼 수호 씨랑 나, 이렇게 시장에 들어갈게. 둘이서 충분히 찍을 수 있어.”
“오케이, 그럼 스테디캠에 카메라 올려. 촬영 들어가자.”
태주는 이수호와 함께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동이 막 트기 시작한 아침이다.
눈부신 햇살이 얼굴을 뜨겁게 비추었다.
좁은 길에서 여러 사람이 바쁘게 움직였다.
카메라를 응시하던 이수호가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동락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레디, 셋…… 액션!”
태주는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통 안으로.
* * *
사람들로 가득한 청과물 시장.
그 안에서 현석은 열심히 달린다.
손님들이 아닌 상인들로만 가득한 시장 안.
빈 곳을 찾아 요리조리 잘도 뛰었다.
팔은 몸쪽으로 붙이고 몸은 곧게 피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도 그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땀으로 젖은 츄리닝이 등에 찰싹 붙었고 짧게 몰아쉬는 호흡이 고통스럽게 차올랐다.
당장에라도 멈추고 싶었다.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현석은 잘 알았다.
시합을 이기기 위해서는 견뎌야 했다.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
상대의 공격에도 버티는 힘을 갖추기 위해.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그걸 알기에 그저 묵묵히, 뛸 뿐이다.
* * *
몇 번이나 시장을 가로질렀을까.
“잠깐 휴식!”
서동락의 신호가 떨어졌다.
태주는 헉헉거리는 몸을 이끌고 카메라 옆으로 가 물을 마시며 모니터링을 했다.
화면에는 자신이 열심히 뛰는 장면이 보였다.
동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시했다.
“박진감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 지금보다 한 템포 더 빠르게 뛰어보자. 할 수 있지?”
이수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한번 해보지 뭐. 빠르게 뛰면 좀 흔들리겠지만 오히려 그게 현장감이 살 거 같다.”
태주는 이수호와 함께 시장 안으로 걸어갔다.
조금 지쳤지만 지체할 시간 따위 없었다.
이 씬을 마무리하고 곧바로 홀어머니와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좁은 길목 끄트머리에 도착해 감독의 신호를 기다리는데.
한 상인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는 뒤늦게 가게 문을 여느라 촬영 중임을 몰랐다.
그런데 태주가 눈앞에서 몇 번이고 뛰어다녔다.
“아침부터 시장에서 뭐 하는 거냐?”
촬영에 몰입한 태주는 즉각 대답했다.
“훈련 중입니다. 러닝 훈련이요.”
“러닝이라니? 선수야?”
“네, 권투 선수입니다.”
그를 대단하다는 듯 보던 상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고생하네. 열심히 해라!”
“네, 감사합니다!”
태주는 곧바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스테디캠을 든 이수호는 곧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태주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수없이 달렸던 길이고, 수없이 보았던 풍경들이다.
피로감에 다리가 떨렸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눈이 벌게져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때.
“여어!”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태주는 뒤를 돌았다.
그와 동시에 연두빛 사과가 휙 날아왔다.
머리 왼편으로 빠지던 사과.
탁-!
태주는 팔을 길게 뻗어 한 손에 잡았다.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반사신경이었다.
누가 던진 건지 그가 주변을 살피자 아까 그 상인이 씩 웃고 있었다.
“힘내라고!”
이건 합의되지 않은 액션.
그를 격려하고 싶던 상인이 충동적으로 던진 사과였다.
“감사합니다!”
태주는 손을 들어 그에게 감사를 표한 후 그 자리에서 사과를 한입 깨물었다.
바싹 말랐던 입술이 사과를 베어 문 순간, 상큼한 맛이 입안에 가득 터졌다.
태주는 피식 웃었다.
역시 연기란 재밌다.
다른 이를 연기하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니.
빠졌던 힘이 다시 돌아왔다.
혼자서 아등거렸는데 다른 사람으로 인해 힘을 얻었다.
[혼자서 끙끙대지 마, 네게는 너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중엔 나도 포함이고.]그의 앞에서 같이 뛰던 이중협이 씩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했다.
연기는 하나의 앙상블이라는 거.
에너지가 부족하면 주변에서 얻어가면 되는 거다.
주변의 환경 또한 연기의 일부니까.
태주는 다시 힘을 내 뛰기 시작했다.
속도는 여전했다.
그러나 표정에 여유가 더해졌다.
지금까지 안 보였던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양옆에 늘어진 가게에서 상인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상인들은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환히 웃는 게 그를 격려하는 듯했다.
어느새 입구가 저만치 보이고 그의 등이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꿈을 향해 노력하는 건 혼자였다.
그러나 노력하는 나를 봐주는 건 여럿이다.
태주는 그렇게 끝까지 모두와 함께 뛰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 * *
이제는 제법 손님들도 거리에 가득했다.
아침 일찍 장을 보러 온 이들이었다.
시장 한쪽에 있는 카메라와 배우들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구석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윤이도 감독 휘하의 연출부와 조감독인 박우돈이다.
근처에 촬영을 왔다가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러 온 박우돈의 눈에 들어온 광경.
“시장통에서 영화를 찍네?”
처음에는 그저 흥미로 시작된 일시적인 관심이었다.
영화과 애들이 단편영화를 찍는다고 해, 잠시 보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어머니도 출연한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차츰 보다 보니 빠져들었다.
한태주라는 저 아이의 열렬한 눈빛에.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눈빛이야.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지.
그가 모시는 윤이도 감독이 늘상 하는 말이었다.
“연기는 입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거라더니.”
박우돈은 시선을 한태주에게 고정한 채, 팔짱을 단단히 끼었다.
뛰는 도중 힘들어 미치겠다는 눈빛.
다시 살아난 희망의 눈빛.
꿈을 향해 도전하는 즐거움의 눈빛.
이 모든 것이 다 결이 다르고 느낌이 달랐다.
“잘한다, 진짜.”
박우돈이 스태프에게 몸을 기울였다.
“조금만 더 보고 가자.”
“피곤하시지 않으세요? 당장 오후에 촬영 있는데…….”
“지금 피곤한 게 문제야? 연기 잘하는 애가 눈앞에 있는데, 눈이 감기냐?”
늘씬한 키, 잘생긴 얼굴, 떡 벌어진 어깨보다도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1초 만에 변하는 그의 표정이다.
그를 보고 있으면 대본의 한 장면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화면에 턱밑까지 힘든,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 독함이 가득 찼다.
짧은 순간에도 몰입하는 집중력이 대단했다.
저 말간 얼굴에서 비친 연기력도.
어디서 본 듯하면서도 신선한 마스크도.
박우돈은 태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뛰어온 태주.
곧바로 모니터링부터 했다.
십수 번을 뛰었던 이전 컷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갑작스레 그에게 날아온 사과가 신의 한 수였다.
주변 상인들이 태주에게 말을 건다.
“사과 던지고 받는 거. 장 씨하고 미리 맞춘 거야?”
“아니요, 갑자기 던져주신 거예요.”
“헐. 옆에서 날아드는 사과를 허공에서 낚아챘다고?”
감탄으로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한껏 높아졌다.
“표정 연기 대박. 사과 먹는 게 신의 한 수였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태주는 씩 웃었다.
스태프들도 목소리를 높여 그를 에워쌌다.
“지금 테이크가 제일 좋은 듯! 열심히 훈련하는 것도 잘 담겼는데, 아까 사과 먹는 장면이 진짜 압권이네.”
“치열함 속 즐거움이라, 아까 연기 좋았어요.”
동락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대회 승리를 위해 열심히 훈련하는 베이스는 똑같아. 그런데 이전에는 그저 악바리처럼 뛰기만 했다면, 방금은 사과가 날아오는 장면에서 유머가 더해지네, 좋아.”
“사과를 잡기를 잘했네. 피했으면 이런 장면이 안 나왔을 거 아냐.”
“한입 먹은 것도 좋았어. 이런 애드립은 아주 좋아.”
“난 마지막에 태주 씨가 환히 웃으면서 들어오는 장면이 좋더라. 대회를 위한 훈련이 마냥 고통스럽기만 한 게 아니라, 즐기면서 하는 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았어.”
“역시 태주 씨한테 맡기기를 잘했네.”
서동락이 환히 웃으며 태주를 바라보았다.
태주는 피식 웃다가도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 없어, 다음 씬 찍어야지. 어머님은 어디 계셔?”
“저기서 대본 보고 계셔. 열정이 대단하시더라고.”
동락이 시계를 보고는 덧붙였다.
“저기 ‘우돈이네 과일가게’ 앞에서 찍을 거야, 5분 쉬었다가 찍자.”
5분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태주는 얼른 과일가게 아주머니에게 향했다.
선뜻 카메오 출연을 승낙해주신 분이었다.
“이제 저희 찍을 차례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어?”
아주머니가 그를 보더니 대본을 내려놓았다.
볼펜으로 몇 번이고 그어진 대사가 눈에 띄었다.
“오, 열심히 연습하셨네요.”
“열심히는 무슨, 막상 찍으려니까 긴장돼서 죽겠다. 내 아들이 조감독인 거랑 연기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렇게 잘난 척을 했던지.”
“그럼 절 아주머니 아들로 생각해보세요. 귀여운 막내아들이 집안이 어려워서 그만뒀던 복싱을 다시 시작한대요, 그런데 어머니한테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거예요. 어머니가 반대하실까 봐, 걱정하실까 봐.”
태주가 아주머니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그래도 저는 어머니의 인정을 받고 싶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복싱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달리기 훈련도 이쪽으로 온 거예요. 그런데 막상 어머니한테 말을 걸진 못 하죠.”
“왜?”
“아직 결과를 낸 게 없잖아요, 성공하지도 못했고. 그래서 어머니 앞에 당당하게 나타날 수 없었어요.”
꿈을 이루고 싶은데,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성공은 저 멀리 아득한.
딱 태주 자신의 처지였다.
고모 앞에서는 유독 말이 적어지는 그의 모습이 겹쳤다.
그때.
흥분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게 어딨어, 자식 응원하지 않는 어미가 어디 있다고.”
아주머니가 태주의 설명에 완전히 몰입했다.
“세상 모든 어미는 자식이 어떤 걸 하든 응원하게 돼 있어!”
“바로 그 감정입니다.”
태주는 그녀에게서 엄마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자신의 뒤에서 묵묵히 지지했던 엄마.
그래서 더욱 감정에 몰입할 수 있었다.
울컥하기까지 했다.
지금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그의 손을 이렇게 잡아줄 것 같아서.
누구보다 열렬히 응원할 것 같아서.
태주는 이런 감정을 연기에 담아낼 것이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아주머니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렇게 제 엄마가 되어 주시면 돼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