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74
74화
광대 (3)
미팅을 끝내고 태주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
차용석은 묘한 얼굴로 연신 구시렁댔다.
“역시 황 팀장이 최준모 영화에 고성열 끼워 넣으려던 거 맞았네. 그러면서 내 앞에서는 뭐? 아니라고?”
“뭐, 아까 최준모 감독님도 말씀하셨지만, 한 배역에 여러 배우 재는 건 보편적이잖아요.”
“그건, 그런데 뭔가 황 팀장이 대표님한테 연락해서 서열이 밀어달라고 한 거 같아서 그러지. 백시영이라 같이 묶어서. 그래도 태주야, 괜찮아.”
차용석이 백미러로 태주를 바라보았다.
“아까 최준모 감독이랑 변태준 감독이 하는 말 들어보니까 고성열보다는 널 선호하더라. 하긴, 당연하겠지. 요즘 네가 ‘당누봄’으로 주가가 확 높아졌으니까. 실력도 좋고.”
“그런데 형, 제가 아직 결정을 못 내려서요. 찬찬히 생각하고 확답드려도 되죠?”
“왜, ‘언더커버’가 마음에 안 드는 이유라도 있어?”
태주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솔직히……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제 앞으로 들어온 다른 시놉들도 찬찬히 읽어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럼. 섣불리 결정하는 건 안 좋지, 무엇보다 네 의사가 우선이니까.”
흥분을 가라앉힌 차용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태주를 집 앞에서 내려 주었다.
“그럼 내일 보자. 연락할게.”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태주는 집에 들어가는 대신 근처 정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시놉을 여러 개 꺼내놓고 비교하며 읽어보았다.
그가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못한 시놉은 두 개다.
이탁원 감독의 ‘광대’.
변태준 감독의 ‘언더커버’.
딱 봐도 두 영화의 결이 달랐다.
태주는 두 영화 중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장르를 알았다.
“액션인 언더커버, 이게 좀 더 자신 있어. 광대는…… 솔직히 광대 짓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혀.”
그러나 본능적으로 끌리는 작품이 있었다.
조선의 자유로운 영혼, 광대 효원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 ‘광대’.
한참 고민을 하던 그는 임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기적으로 고민될 때마다 자주 의논하곤 했다.
태주가 고민된다는 두 편의 영화를 임강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아, 광대랑 언더커버? 나도 두 개 다 제의받아서 알고 있어. 근데 뭐가 고민된다는 거야?
“변태준 감독님 영화가 더 자신 있는데, 끌리는 건 이탁원 감독님 작품이어서. 광대 효원이 마음에 들더라고.”
태주의 대답에 임강현이 흥분한 듯 재빨리 대답했다.
-나는 거기 왕 캐릭터가 특히 매력적이던데. 병약한데 광기는 폭발하고, 완전 멋있지 않냐?
“효원이 더 멋있지. 자유롭게 기예를 펼치면서도 자기감정에도 충실하잖아.”
열렬히 작품에 관해서 열변을 토하던 태주는, 문득 캐스팅도 안 됐는데 임강현과 이 작품의 배우들처럼 토론하고 있는 게 웃겼다.
“강현아, 우리 이 작품 하기로 확정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말하는거 좀 웃긴다.”
-난 이 작품, 마음에 들어. 정말 하고 싶어.
“캐스팅 제의 들어왔다며, 그럼 하면 되잖아.”
한참의 침묵 후 임강현이 내뱉은 말.
-……응, 이번에는 꼭 내가 원하는 작품 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네가 원하는 작품, 꼭 해라.
그렇게 통화가 끊어졌다.
태주는 임강현의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이번에는 자기가 원하는 작품을 한다니, 그럼 그동안은 못 했단 말인가?’
“에이, 일단은 나부터 생각해야지.”
태주는 두 개의 시놉을 번갈아 비교하며 고민했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그의 의사는 확고해졌다.
그는 ‘광대’를 짚었다.
‘중협이 형. 난 왜 이게 자꾸만 끌릴까요?’
[광대? 야, 이거 잘하면 대박인데, 좀 어렵지 않겠어? 연기도 신경 써야 하는데 덤블링이며 가무도 익혀야 하고.]‘일전에 고지훈한테 받은 운동신경이 있으니, 노력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날렵한 운동신경.
예전에 상주에서 만난 곡예단원 출신의 귀신, 고지훈에게서 받은 능력이었다.
이중협은 태주와 함께 시놉을 찬찬히 읽었다.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효원이란 캐릭터가 정말 매력적이긴 하다. 여장남자에 왕의 견제와 사랑, 그리고 권력다툼]‘형도 그렇게 생각하죠? 이게 막내 부대원같이 막 들이받는 그런 시원한 캐릭터는 아니지만, 감정을 속으로 삼키고 대신 광대 짓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네가 이제껏 안 해본 연기라서 더욱더 매력적일지도 몰라. 배우는 본능적으로 도전을 꿈꾸거든. 자신이 안 해본 역할,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극구 공감하던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을 하기 위해서는 곡예뿐만 아니라 여장남자처럼 보이도록 섬세한 몸짓과 표정도 연습해야 한다는 건데.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지만, 최선을 다해 도전해 보고 싶었다.
태주가 벌떡 일어났다.
“고민을 많이 했더니 머리가 다 아프네. 좀 걸어야겠다.”
[그래, 리프레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될 거야.]* * *
길을 걷다가 집 근처의 전통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로 가득한 시장.
태주는 이따금 답답할 때면, 혼자서 이렇게 돌아다니고는 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인파 속 혼자 고요한 그 느낌이 좋았다.
마스크를 끼고 캡모자도 눌러썼으니,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저쪽에 태희가 좋아하는 뻥튀기가 보였다.
“뻥이요!”
태주가 다가가 뻥튀기 한 묶음을 샀다.
“많이 파세요.”
그때, 옆에서 힐끔대던 여자가 태주를 알아보고서는 감격스러운 듯 말했다.
“어머, 한태주 씨 맞죠!”
“한태주라고?”
“어디, 어디?”
순식간에 태주 주위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든 그때. 태주는 당황스러워서 어쩔줄 몰라했다.
“아, 안녕하세요.”
엉겁결에 인사하자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러자 더욱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한태주다!”
당황한 태주가 뒷걸음질을 쳤다.
[일단 뛰어!]이중협의 조언대로 태주가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시장통이 아수라장이 된 그때. 옆에서 바짝 쫓아온 한 여자.
희고 고운 얼굴에 반달의 눈썹이 인상적인 고전적인 미인이었다.
특이한 점은 머리에 큰 가채를 올리고 화려한 붉은 저고리와 풍성한 녹색 치마를 입었다는 점.
마치 사극 촬영이라도 나온 사람 같았다.
여자는 태주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오라버니, 저기서 왼쪽으로 돌아. 시장 빠져나가는 골목길이야.”
‘뭐야, 이 여자는? 오라버니는 또 뭐고?’
태주의 표정을 본 여자가 피식거렸다.
“좀 믿어봐, 오라버니. 내가 이 시장만 300년째 있다고. 저 뒤에 있는 사람들 뿌리치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해.”
‘300년? 또 귀신인가?’
태주는 정신없는 와중에 본능적으로 여자의 말을 따랐다.
길이 없을 것만 같았던 왼쪽으로 길을 틀자, 거짓말처럼 길이 나왔다.
사람들을 따돌린 태주는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여자는 그가 흥미로운 듯 찬찬히 뜯어보았다.
[대장 귀신이 요즘 새로운 애하고 같이 다닌다더니, 이 잘생긴 오라버니인가 봐.]그 말에 이중협이 물었다.
[둘이 비슷한 나이 같은데. 굳이 그렇게 부를 이유 있습니까?] [아 참, 그렇지. 생전 남자들한테 오라버니, 라고 부르던 게 습관이 돼서. 이놈의 직업병.]여자는 태주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태주는 멋쩍게 너무나도 아름다워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누구세요?’
[연홍이라고 해. 성은 없고.]“연홍 씨?”
[연홍 씨는 무슨, 낯간지럽게. 그냥 연홍이면 족해.]‘그래도…….’
수줍어하는 태주를 보던 연홍의 얼굴이 묘해졌다.
[너처럼 잘생긴 애가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일패기생, 연홍. 아직 죽지 않았나 보네.]* * *
300년 전, 조선.
달이 비치는 어스름한 밤.
화려한 기방에는 수많은 양반이 모여 한데 웃음꽃을 피웠다.
그들은 양옆에 기생들을 끼고 있음에도 단 한 사람만을 찾았다.
“연홍이, 연홍이를 데려와!”
“오늘이 지나면 보지도 못할 텐데, 한번 안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양반들이 낄낄대며 덧붙였다.
“천하절색인 우리 연홍이, 내일이면 팔십 먹은 노인네 첩으로 팔려 가는 게 믿기지 않는구나.”
“에잉, 나도 땅이라도 팔아 돈을 마련할걸. 검버섯 핀 늙은 대감보다는 내가 낫지 않는가?”
그들의 말을 주워듣던 기생들이 삐죽대며 끼어들었다.
“오라버니들, 그런 소리 마셔요. 우리 행수님이 홍 대감님께 얼마를 요구했는지 아시면 기절하실걸요.”
“그깟 기생 몸값으로 얼마나 지불했을라고?”
남자의 귓가에 기생이 액수를 소곤거리자, 그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동료들에게 액수를 공유하자, 곳곳에서 격렬한 수군거림이 들렸다.
“노망이 났구만, 홍 대감이. 기생 따위에게 그런 큰돈을 쓴다고?”
“연홍이가 아무리 절세미인이라 하지만, 그것 참…….”
“연홍이는 이제 팔자 폈구만. 홍 대감께선 재산도 많지, 마님도 돌아가셨겠다. 비록 첩실이지만 부인 행세하며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의 말을 듣던 기생들이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그녀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감의 첩실로 들어가는 건, 연홍이가 진정 원하던 삶이 아니라는 것을.
-행복하게 살고 싶어. 이곳에 들어오기 이전처럼.
민요, 판소리, 잡가, 기악, 화술, 빼어난 용모.
무엇 하나도 빠지지 않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어도 그녀가 쓸쓸함을 보인 건, 진정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해서였을까.
그녀의 얼굴에는 늘 그림자가 보였다.
* * *
한편, 기방의 구석에 깊이 자리한 한 전각.
마당에서 홀로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은 연홍.
그녀는 백옥같은 두 팔을 길게 뻗더니 우아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팔랑.
치맛자락을 들어 그녀가 사뿐한 발걸음을 마당에 내디뎠다.
나비가 날갯짓하듯 우아하게 걷던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어 높게 뛰었다.
툭.
그러나 안정적으로 착지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녀는 치마를 들어 올려 찌릿 거리는 다리를 주물렀다.
5년 전, 높은 줄을 타다가 추락해 다리를 다친 것이 후유증이 남았다.
“하. 역시 안되는 건가…….”
열여섯의 한창나이에 다리를 다쳐 남사당패로 활동하지 못하게 된 그녀는.
남사당패 대장, 바우의 인맥으로 이곳 기방에 맡겨졌다.
말단으로 시작했지만,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그녀는 곧 일패기생의 자리까지 올랐다.
용모도 뛰어난 덕에 홍 대감의 눈에 들었고, 그런 그녀를 기방의 행수는 거액을 주고 팔아넘겼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녀가 원하던 삶이 아니었다.
“난 다른 이들 앞에서 자유로운 무대를 펼치고 싶을 뿐인데…….”
그런 그녀의 귓가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왜 밖에 나와 있느냐, 찬바람까지 맞으면서.”
연홍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5년 전에 헤어졌던 남사당패의 대장, 바우 오라버니가 서 있었다.
“오라버니!”
그를 보고 놀라서 일어난 연홍.
그러나 바우는 선을 그었다.
“오늘은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거다. 네가 홍 대감네 첩실로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 말에 연홍의 눈동자가 배신감으로 잘게 떨렸다.
“진작 오시지…… 왜 이제야 오셨어요?”
“…….”
“분명 그러셨지요. 제 다리가 괜찮아지면, 절 이곳에서 빼내 남사당패에 다시 끼워 주신다고. 그런데 왜 이제야 오셨어요. 네?”
그녀는 기침을 콜록거렸다.
재빨리 입을 가린 붉은 소매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죄책감으로 고개 숙인 바우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시야를 가려 바우는 감정을 애써 진정하는 중이었다.
“연홍아, 이제 남사당패는 그만 잊어라. 무려 5년이다, 너도 천한 광대가 아닌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아야지. 그래야 행복하지.”
“전 여자의 삶보다 광대의 삶이 좋은걸요.”
“연홍아!”
“오라버니, 저 좀 보세요. 이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어요.”
다급한 연홍이 사뿐한 몸놀림과 가벼운 발걸음을 보여주었다.
다리에 찌릿 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바우에게 환한 미소를 비춘다.
“이것 보세요, 잘하잖아요!”
그러나 그녀의 미간에 새겨진 고통을 본 바우.
연홍의 어깨를 꾹 잡으며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연홍아, 네가 더 잘 알잖느냐. 네 몸 상태로는 더 이상 광대놀음을 할 수 없어.”
“오라버니!”
남자는 그녀의 눈을 마주치며 그녀를 설득했다.
“양반댁 첩으로 들어가는 건 천민의 신분을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생각해 봐라, 연홍아. 우리가 천민으로 살아가며 얼마나 멸시와 천대를 받았느냐.”
“전 그래도 무대가 좋아요, 오라버니.”
연홍은 물기 어린 눈을 남자에게 맞추었다.
“오라버니도 아시잖습니까, 제가 얼마나 광대의 삶을 아꼈는지를. 자유롭게 무대를 노니는 걸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녀의 말에 남자는 침묵을 지켰다.
“대감의 첩실로 들어앉는 것보다 광대짓하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 이 말입니다.”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으냐!”
굳게 다문 남자의 입술에서 진심이 튀어나왔다.
“무대 위에 올라서 광대놀음 하는 거, 네가 제일 좋아한다는 거 안다. 하지만 그건 다 천민들의 삶이야! 너는 이제 곧 대감집에 들어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바우는 흔들리는 연홍의 손을 꼭 잡았다.
“굳이 광대가 아니어도, 다른 이들 앞에서 네 재주를 펼칠 일은 많다. 이곳 기방에서도 수많은 손님에게 네 재주를 보여주지 않았느냐?”
“행복하지 않은 채 재주를 뽐낸들, 무슨 소용이에요?”
연홍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오라버니. 제가 바람처럼 자유롭게 노닐 수 있게 도와줘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