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78
78화
광대 (7)
한편, 태주는 영화 오디션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집에서도, 회사 연습실에서도 연홍의 도움을 받아 광대 연기를 연습했다.
미리 받아본 효원의 대사들을 연습한 건 물론.
여장남자의 캐릭터성을 위해 완전히 다른 인격을 덧입혔다.
서서히 태주는 ‘효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걸이는 더욱 가볍고 사뿐하게 바뀌었고.
쩍 벌어졌던 어깨와 다리는 안으로 얌전히 오므려졌다.
평소 힘을 줘 씩씩하게 말했던 말투는 더욱 부드럽고 낭랑하게 바뀌었다.
연홍은 자신의 지도를 받아들인 태주를 칭찬했다.
[잘했어, 짧은 시간에 많이 노력했네!]물론 이 모든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고모와 태희와 같이 살아서 여자처럼 행동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관객에게 위화감 없는 여장남자 연기를 보여주려면, 보다 섬세하고 자연스러워야 했다.
그래서 태주는 연홍이 알려준 여성스러운 몸짓, 자세, 걸음걸이 등을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그리고 영화 속 ‘효원’이 소속되어 있던 남사당패의 공연을 직접 보러 다녔다.
효원 역 오디션을 준비하는 일환이기도 했지만, 연홍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녀의 한은 자신을 통해, 다시 한번 광대가 되어 무대를 즐기고 싶다는 것이었으니까.
공연을 보고 난 후.
태주는 수첩에 적었던 것들을 여러 번 복기했다.
“남사당패 공연에도 종류가 많네. 풍물놀이, 가면극, 꼭두각시극…….”
이중협은 조금 전 본 공연의 여운에 젖어 있는 연홍을 힐끔거렸다.
[나도 뭔가 조언해주고 싶은데, 생전 이런 캐릭터를 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솔직히 말하면, 저도 ‘효원’이란 캐릭터가 좀 어려운 것 같아요. 특히나 무대 위 광대라는 점이…….‘
태주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동안의 그가 해왔던 역할과 효원은 결이 달랐다.
단편영화, 독립영화, 드라마 등등에서 해왔던 연기는 카메라를 신경 썼었다.
어떻게 하면 화면에 자신의 연기가 오롯이 담길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남사당패의 일원인 효원을 연기하려면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무대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전달해야 했다.
“아, 그거구나, 관객과의 교감.”
오디션의 포인트를 드디어 잡았다.
자신의 연기는 카메라를 통해 담기지만, 자신이 신경 써야 할 건 카메라가 아니라 관객이었다.
그들을 감동하게 할 수 있는 연기를 해내야 했다.
완벽한 효원이 되어서 말이다.
태주는 연홍에게 고개를 돌렸다.
’연홍, 한과 관련된 무대를 보여주는 대상이 꼭 정해져 있는 건 아니죠?‘
[광대가 관객을 가리는 거, 본 적 있어? 그런데 누굴 상대로 무대를 하려고 하는데?]연홍이 엄격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요즘 열심히 연습하고는 있지만, 넌 아직 광대라고 하기에 많이 부족해. 내 눈에 차려면 한참 멀었어.]‘아,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 앞에서 제 무대를 연습하려고요.’
태주가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네, 안녕하세요, 정규범 감독님. 저 태주인데요, 혹시 다른 단원들하고 같이 제가 연습 좀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 * *
어느 바쁜 아침의 한 버스정류장.
여러 학생이 자기들끼리 핸드폰을 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요즘 이선우 미모 미쳤더라. 당누봄에서 윤수안하고 케미도 완전 쩔어.”
“진짜 2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겠어.”
“난 한태주 안 나와서 요즘에 안 보는데. 좀 재미가 덜한 거 같아.”
“맞아. 이선우가 연기를 못한다는 게 아니라, 아역을 한태주가 워낙에 잘 살려놔서.”
“아, 한태주가 오강준 연기하는 거 보고 싶다.”
한참 수다를 떨던 도중, 한 여학생이 불쑥 끼어들었다.
“근데 백시영 미국에서 돌아왔더라? 할리우드랑 여러 가지 계약조건이 안 맞았다고 하던데.”
“순진하게, 그걸 믿어? 그냥 할리우드에서 안 받아준 거지.”
“그래도 최준모 감독 작품에 들어갔으니 곧 다시 명성이 올라갈걸. 이번에도 천만 찍을 거 아냐.”
“아니야. 최준모, 이번에는 제작자로 나서는 거던데? 감독은 변태준이란 사람이야.”
“그래도 최준모라는 이름값이 있잖아. 암튼 거기 백시영하고 고성열하고 동반 캐스팅됐더라.”
“근데 한태주는 영화 안 찍나? 왜 소식이 없지.”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검은 재킷을 걸친 청년이 그들을 지나쳐 버스를 올라탔다.
늘씬한 자태가 지나간 자리에 은은한 향기가 남았다.
버스가 떠나자 여학생들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응? 뭐지? 아는 사람인가, 익숙했는데.”
“한태주…… 아냐?”
잠시 고민하던 그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뭐야, 진짜로?”
* * *
“와, 이게 얼마 만이냐.”
태주는 커다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그림자 무사’ 때의 인연으로 찾은 액션 아카데미.
무술감독 정규범에게 연락하니 흔쾌히 이곳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곳곳에 있던 직원들이 태주를 보고 반가운 듯 달려왔다.
“태주 씨 진짜 오랜만이다!”
“얌 마, 태주야! 아니지. 이제는 배우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당누봄에서 완전 떴잖아, 태주 씨.”
“그림자 무사에서 대역 연기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티비 드라마에서 연기하고. 진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네.”
태주는 멋쩍게 웃었다.
“하하, 그런가요?”
“애, 털털한 건 여전하네. 그 탐나는 기럭지도 여전하고. 무술 실력도 여전하냐?”
“근데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정규범 무술감독이 태주에게 다가오다 멈칫했다.
“영화 오디션 준비한다더니, 힘든가 보구만? 아주 양기가 쫙 빨린 것 같은데.”
“하하, 아닙니다.”
겉으로 하하거린 태주가 뒤에 서 있던 연홍을 힐끗거렸다.
그녀는 태주와 눈이 마주치더니 싱긋 웃었다.
[설마 나 때문에 힘든 건 아니겠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시켜 주는데.]‘그럼요, 연홍.’
태주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효원’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연홍이 옆에서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광대를 허투루 연기하게 할 수 없다며, 혹독하게 연습을 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평소에 습관이 배어 있어야 여장남자 효원의 캐릭터가 나온다나, 뭐라나.
“그래, 태주야. 우리가 뭐 도와줄 거라도 있냐?”
정규범의 말에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오디션을 연습하고 이들 앞에서 자신의 연기를 테스트해보기 위함이었다.
마치 모의 오디션처럼.
“일단은 혼자 해보겠습니다. 이번 역할은 액션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곡예와 광대극을 해야 하는 거여서요.”
“음, 그럼 우리는 근처에 있을 테니까 도움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무술팀이 뿔뿔이 흩어진 가운데.
태주는 거울 앞에서 혼자서 연습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양옆으로 쫙 찢고, 서 있던 자세에서 허리를 홱 넘겨 두 발과 두 팔로 땅에 딛고.
있는 힘껏 뛰어 공중으로 점프, 그대로 한 바퀴를 도는 연습을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연홍이 혀를 내둘렀다.
[요즘 광대들은 다들 저렇게 몸을 잘 쓰나? 대장 귀신, 그래?]이중협이 어깨를 으쓱했다.
[연홍, 우리 태주가 특별한 겁니다. 태주가 귀신들의 한을 풀어주며 그들의 능력을 얻는데, 그중에서 고지훈이란 친구는 곡예단원이었거든요.] [아무리 능력을 받았다고 하지만, 저런 표현력은 노력 없이는 될 수 없어.]연홍은 태주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광대가 되기 위해서는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게 최우선이었다.
얼굴뿐만이 아닌 몸으로도 연기해 관객들을 감동시키는 자.
그게 바로 광대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태주는 제법 훌륭한 광대가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를 지켜보던 연홍의 가슴이 순간 두근거렸으니까.
홀로 연습하던 태주에게 연홍이 다가갔다.
[손끝, 발끝 하나하나에도 감정을 실어야 해. 손가락의 떨림으로 두려움을, 손가락의 튕김으로 기쁨을 표현해야 하는 게 광대들이야.]온몸으로 연기해야 하는 게 광대의 숙명.
그녀의 조언대로 태주는 손가락 끝에도 신경을 썼다.
커다란 거울 속 수많은 사람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
무술팀 배우들도, 정규범 무술감독도 힐끔거리며 그를 지켜보는 가운데.
태주는 물구나무를 서서는 천천히 걸어갔다.
올곧게 편 발가락이 파르르, 떨리더니 힘을 준 다리가 사르르 벌어졌다.
그리고는 마치 사람의 팔처럼 다리가 힘차게 움직였다.
모두가 신기한 듯 그를 바라봤지만.
태주에게는 오직 자신만이 시선에 들어올 뿐이다.
“대표님, 쟤 뭐 하는 걸까요?”
“광대 역할 준비한다잖아. 이번에 현필름에서 제작하는 영화 오디션 본대.”
“아, 염수정 나온다는 그 영화? 아니, 근데 태주 이름값에 아직도 오디션을 봐야 되나 보네요?”
“그 역할에 지금 3천 명이나 몰렸다잖아.”
“웬만한 신인들은 다 그 오디션 본다고 하더라고.”
직원들이 이제는 대놓고 그를 보기 시작했다.
태주는 거울 앞에서 여러 가지 동작들을 연습했다.
길쭉길쭉한 손가락을 하늘하늘 움직이는 동작.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입술을 삐죽이는 동작.
홱, 물구나무를 서 다리를 쫙 벌리는 동작.
흔히 볼 수 없는 동작들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각시탈을 쓰고 혼자서 독백을 하기까지.
그때 태주가 홀린 듯 그를 쳐다보던 정규범에게 바싹 다가갔다.
부드러운 몸선과 살랑이는 발걸음에 그가 침을 바짝 삼켰다.
평소의 듬직한 태주와는 다른 사람 같았기에.
태주는 정규범에게 가서 머리를 살짝 기댔다.
“나으리, 길고 외로운 밤을 나으리와 함께 보내고 싶사온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교태가 넘치는 자태와 간드러진 목소리.
정규범은 자신도 모르게 넘어갈 뻔했다.
태주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는 걸 보고 나서야 그는 화들짝 떨어졌다.
“뭐야, 이거.”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정규범은 애써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다.
뭔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이상했다.
태주의 1인극을 보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뭐지? 가슴이 마구 뛰는데?”
“정신 차려, 태주는 남자라고!”
“알아요, 아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 걸 어떡해요!”
“나대지 마라, 심장아.”
태주를 지켜보던 무술팀은 그의 1인극에 점점 빠져들었다.
“재밌어서 눈을 뗄 수가 없네.”
“관객의 시선을 뺏는 것을 보니까 타고난 광대구만.”
그 모습을 발견한 연홍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광대는 무릇 관객들을 홀리는 법. 한태주도 약간은 그곳에 발을 디딘 셈이군.]* * *
ABS 방송국.
목까지 찰랑거리는 머리를 넘기는 남자가 툴툴거리며 복도를 지나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선화철, 조연출 10년 생활을 거쳐, 이번에 입봉한 단막극이 매우 호평을 들은 유망한 신인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이돌 파티인 드라마를 맡게 생겼고.
그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입봉작 다음으로는 모 아니면 도 이런 작품이 아닌, 안정적인 작품을 원한 그였다.
더욱이 이번 드라마의 기획안을 제출한 건 JSB 엔터의 대표, 봉지수였다.
해외 출장 중 쓱 썼다는 그의 드라마 기획안은 드림액터스의 장희재 대표와 XJ의 사업본부가 발을 들이면서 가속화됐다.
그리고 ABS 편성 심사까지 초고속으로 왔다.
“이 양반들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이돌들로 캐스팅을 채우면 연기력은, 시청률은 또 어떡할 건데.”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그가 국장실에 들어갔다.
“국장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화철이. 여기 앉아봐.”
늘 차분한 표정의 국장 이건호가 그를 앞에 두고 흥분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번에 내가 말한 드라마 있잖아, 드림액터스랑 JSB, 그리고 XJ 합작해서 만든다는 하이틴 드라마. 그거 편성 내기로 했다.”
선화철 피디는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였다.
“국장님,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이돌 천지인 드라마라, 그거 잘 안되지 않겠어요?”
“‘당신도 누군가의 봄이었다’ 봐. 설채빈이나 하강웅도 아이돌이었는데 잘만 연기했잖아.”
“그건 한태주가 중심을 잡고 연기를 잘했으니까 그렇죠.”
“그럼. 만약에 한태주가 주인공을 맡는다면?”
그 말에 선화철의 눈이 반짝였다.
한태주가 연기 잘한다는 건 대한민국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였다.
더욱이 ‘당누봄’에서 격정적임과 부드러움을 넘나드는 미친 연기력을 보여준 이로.
“한태주가요?”
국장이 확신에 찬 눈빛을 내보였다.
“어차피 하이틴 드라마야, 그럼 젊은 애들로 캐스팅을 꾸릴 수밖에 없지. 그러니 한태주가 중심을 잡고 있으면 나머지 애들도 연기가 절로 되지 않겠어?”
“글쎄요. 한태주가 그동안 아역만 해봤지, 주인공으로 극을 끌어간 적은 없지 않나요?”
“어차피 이런 드라마는 주변 케미랑 매력이 중요한 거니까. 그리고 한태주 인기가 요즘 괜찮으니까, 해외 팬들도 이거 보러 많이 몰려올 거야. 이번에 당누봄으로 확 떴잖아, 걔.”
“하, 그래도 저는 모르겠는데요. 당누봄 때는 아이돌이 고작 둘이었고, 걔네는 아역 분량인 4화만 연기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은 16부작이고, 학생들 대부분을 아이돌로 채운다던데. 이거 진짜 괜찮겠어요?”
“김유경 작가가 쓴 1화 극본 볼래?”
국장이 그에게 몇 장의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벌써 1화가 나왔어요?”
“보조 작가 붙여서 쓰니까 금방 나오더라고. 아이디어가 재밌어서 잘 써진대.”
40% 대박 시트콤 출신의 김유경 작가와 보조 작가 심은설.
ABS 드라마 공모전 출신의 심은설은 섬세한 표현력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김유경 작가와 제법 궁합이 잘 맞았다.
선화철이 그들이 쓴 극본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아무런 기대 없던 얼굴에 차차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따금 큭큭 거리며 웃음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선화철이 한결 밝아진 고개를 들었다.
“근데 이거, 한태주가 하는 건 확실해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