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8
8화
데뷔작은 단편영화 (3)
이제 대회가 일주일도 채 안 남았다.
그동안 열심히 했지만, 현석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새벽마다 했던 러닝 훈련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러나 오늘은 그가 평소에 뛰었던 코스가 아니다.
평소에는 한강 공원으로 뛰었지만.
오늘은 사람들로 붐비는 청과물 시장으로 향했다.
숨이 차도록 열심히 뛰다가 좁은 골목에 접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게에 시선이 꽂혔다.
진열대에서 과일을 정리하던 중년의 여인.
현석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달싹였다.
“엄마…….”
그때 그녀가 허리를 펴며 몸을 돌렸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고, 아들을 알아본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현석아!”
현석은 서둘러 뛰어갔다.
아직 엄마를 마주할 때가 아니었다.
집안 사정 때문에 극구 반대했던 복싱을 다시 하는 그였다.
그렇기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들고 마주하고 싶었다.
그게 그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죄였기에.
그래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공기 중에 떨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아들, 파이팅! 엄마가 열심히 응원할게!”
주먹을 꼭 쥔 채 뛰어가던 현석.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은 어머니에게서 도망쳤는데.
그녀는 기대를 저버리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신을 응원해준다.
못난 아들인데, 어머니 걱정이나 시키는 아들인데.
울음을 간신히 참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미치겠다, 진짜…….”
현석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자신을 다잡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이제는 정말 우승뿐이다.
자신을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우승을 하고 싶다.
태주는 있는 힘껏 이를 악물었다.
현석이 어머니께 우승컵을 갖다 드리려 하는 것처럼, 자신도 비슷했다.
가족이 그의 연기를 응원하는 걸 안다.
그래서 좋은 연기로 그들에게 보답하고 싶다.
그래야 그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기에.
그것이 자신이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기에.
“열심히 하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 * *
카메라에 태주가 가득 찼다.
그의 표정이 좋다며 동락이 클로즈업을 가득 주문했다.
“좀 더, 좀 더 클로즈업.”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었다.
붉어진 눈매, 떨리는 입술.
그리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간절하지만, 닿을 수 없는 자그마한 목소리.
“열심히 하자!”
주변에서 지켜보던 스태프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대박, 대박, 대박!”
“처연함, 그리움, 절절함이 다 들어있어.”
“눈빛 좀 봐라, 살아있다!”
어떤 이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와씨, 사람을 울리고 그러냐.”
태주의 연기를 본 스태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틈을 타 박우돈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보기 시작한 촬영.
이제는 그 호기심이 집착으로 바뀌었다.
한태주란 배우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했다.
얼마 전까지는 피곤함에 하품을 애써 참던 그의 눈이, 이제는 보물을 찾은 사람처럼 반짝였다.
* * *
“어땠냐?”
태주는 헐레벌떡 카메라 쪽으로 달려왔다.
모니터 앞에 붙어 있던 동락은 자리를 내주었다.
“네가 직접 봐.”
아까 찍은 장면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엄마와 스쳐 지나가는 장면.
스스로를 다잡으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장면.
화면 가득히 자신의 얼굴이 꽉 찼다.
“이걸 이렇게 클로즈업으로 찍는다고?”
“바스트 위로 찍는 것보다 얼굴을 확 클로즈업하는 게 감정전달이 잘 되더라. 찡하기도 하고.”
동락이 씩 웃었다.
“태주야, 아까 네 연기, 겁나게 좋았다.”
멋쩍어하는 태주에게 옆의 스태프들이 재잘거렸다.
“솔직히 걱정 많이 했는데, 태주 씨, 감정 몰입 정말 잘하네요. 어머니에 대한 애잔함, 꼭 좋은 결과로 보답하고 싶다는 감정이 절절했어요.”
“아주머니도 잘하셨지만, 태주 씨가 이 씬 다 살린 거예요.”
“정말 좋았어요.”
[당연히 잘해야지, 배우 고집으로 현장에서 대본까지 고쳤는데 못하는 게 말이 되냐?]태주가 휙 고개를 돌렸다.
입을 씰룩거리는 이중협과 눈이 마주쳤다.
“안 그래도 이를 악물고 열심히 했습니다. 노력하는 만큼 연기에 반영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여튼 입은 살아서.]툴툴대는 이중협의 얼굴에는 이따금 미소가 씰룩거렸다.
“그럼 이제 슬슬 정리하자.”
동락의 신호에 스태프들이 자리를 정리했다.
새벽에 왔던 시장에는 강렬한 햇빛이 쏟아졌다.
그때, 호흡을 맞추었던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옆에 다가온 남자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 친구가 연기를 얼마나 잘하던지. 나 아까 울 뻔했잖아.”
남자가 코를 씰룩거렸다.
“이 친구가 한태주인가요?”
“네, 제가 한태주인데요.”
태주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한 채 앞으로 나왔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눈가에 난 흉터가 수상했다.
“누구세요?”
“박우돈이라고 합니다. 윤이도 감독님 밑에서 조감독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윤이도 감독님? 와, 대박.”
“요즘에 차기작 준비하신다고 하던데. 사극이었나?”
“강재하하고 윤수안이 주인공인 거, 맞지?”
박우돈이 헛기침을 하며 태주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쭉 지켜봤는데, 연기를 참 잘하네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딱 우리가 찾던 배우라서 그럽니다.”
* * *
한적한 카페 안.
이중협은 맞은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조감독 박우돈과 연출부 사람들.
그들을 보던 이중협의 눈초리가 샐쭉해졌다.
크랭크인이 곧 들어갈 영화에 오디션을 본다는 게 이상했다.
[캐스팅 다 끝났을 텐데 뭔 오디션이라는 거지?]그때, 연출부 막내가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드세요.”
구석에 앉아 커피를 받아든 태주는 눈치를 살폈다.
그의 조심스러운 눈초리에 박우돈이 싱긋 웃었다.
“일단 한잔 마시고 얘기합시다.”
태주는 커피를 한입 마셨다.
맞은편의 사람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선일제작사에서 일한다는 그의 명함도 받았다.
무엇보다 윤이도 감독과 함께 일하는 그를 안다던 이중협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8년 전인가, 내가 윤이도 감독 영화에 형사로 캐스팅된 적이 있었거든. 거기서도 박우돈이 조감독으로 뺑이쳤었지.]이중협이 뒤에서 속삭였다.
[저쪽도 어지간히 급한가 보다. 현장에서 이런 식으로 캐스팅 들어가는 거 보면.]태주는 긴장감에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윤이도 감독은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스타 감독이었다.
작품성과 상업성을 둘 다 잡는 유일무이한 감독.
그런 그가 최근 강재하와 윤수안을 필두로 준비 중이라는 신작에 거는 사람들의 기대가 컸다.
그런 작품에 날 왜?
-조감독이 직접 캐스팅하는 거면, 뭐 대단한 거 아니에요?
-작은 배역은 아닌 것 같아요.
-태주 너, 이번 기회 꼭 잡아.
아까 스태프들과 동락이도 그를 응원했었다.
조감독이 직접 캐스팅하는 거면, 중요한 배역 아니겠냐고.
이건 일생에 한 번 있을 법한 기회라고.
긴장감과 기대감이 동시에 드는 순간.
박우돈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윤이도 감독님이 새로 작품 준비하시는 건 알죠?”
“네, 사극이라고 들었습니다.”
제목은 ‘그림자 무사’.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으로 사람들은 점치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강재하가 1인 2역으로 나와요. 강재하랑 태주 씨랑 비슷한 점이 참 많아요. 체구도 비슷하고 나이대도 비슷한 것 같은데…….”
박우돈은 태주에게 한 권의 대본을 내밀었다.
“태주 씨가 강재하 뒷모습 대역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 * *
“도대체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거야.”
태주는 생전 처음 마주한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앞에는 열심히 공부한 대본이 놓여 있다.
박우돈 조감독이 그에게 주고 간 대본이었다.
그가 제의한 배역은 다소 특이했다.
주인공인 강재하가 1인 2역을 하는 상황.
두 역할이 동시에 등장할 때면 뒷모습만 보이는 강재하의 대역배우가 필요했다.
-다음 주 수요일에 촬영입니다. 그날 나오세요. 안 할 거면 3일 전에는 말해주고요.
며칠 동안 대본을 분석하고 무술 동작을 연습했다.
그렇지만 이는 언제까지나 뒷모습 대역이었다.
대사도 없고, 표정 연기도 보여줄 수 없고.
애초에 카메라에는 뒷모습만 걸리는 배역.
그렇다고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너, 그거 정말 할 거냐?]이중협이 태주의 옆에서 알짱거렸다.
[하긴,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지. AS 기간도 지났잖아.]“AS 기간이라뇨?”
[안 할 거면 3일 전에는 연락 달라고 했잖아, 그쪽에서도 대안을 마련해야 하니까. 그런데 넌, 연락 안 했고.]이중협이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너, 뒷모습 대역이면 네 연기는 못하는 거 알지?]“알아요.”
[알고도 한다고? 왜? 너는 네 연기를 하고 싶어 했잖아. 아하, 너 강재하 팬이냐? 그래서 하는 거야?]“대본이 재밌잖아요.”
태주가 구겨진 대본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 대본이 어떻게 영상으로 나올지 궁금해서요. 그리고 윤이도 감독님의 현장을 경험할 좋은 기회잖아요. 강재하랑 윤수안은 물론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배울 수도 있을 거고요.”
라이징 스타 강재하와 충무로에서 제일 주목받는 20대의 여배우, 윤수안.
그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될 것이다.
[하긴, 경험은 많이 해볼수록 좋지. 현장에서 배우는 점이 있을 테고.]이중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윤이도 감독님 작품에서 연기해본 적 있어서 말하는 건데, 그분은 모든 걸 계획하고 슛을 들어가. 대본 그대로 가고 애드리브도 허용하지 않지.]“그래서 더 모르겠어요.”
태주가 대본을 이리저리 넘겼다.
“저는 대사도 없고, 화면에는 뒷모습만 나오는데, 어떤 식으로 연기를 하면 좋을지…….”
대본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광증을 앓는 포악한 왕.
매일 밤 암살의 위협을 받으며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
신하는 왕의 안전을 위해 대안을 마련했다.
낮에는 왕을 보호하고, 밤에는 왕을 대신할, 왕과 생김새가 비슷한 호위무사를 구하는 것.
그렇게 왕을 지키러 들어온 호위무사.
그러던 중, 그는 인생 최대의 위기을 맞게 된다.
그것은 바로 왕비와의 대면.
그녀는 왕에게 상처받아 스스로를 가시 안에 가뒀다.
무사는 그런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릴 적 자신이 모시던 주인집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호위무사의 그녀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상처받은 왕비를 녹이게 되고, 그들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태주는 대본을 몇 번이고 읽었다.
특히 호위무사 부분을.
이 영화의 진주인공이기도 했고, 서사가 매력적이었다.
강재하의 대역을 한다면 왕과 무사의 뒷모습을 둘 다 한다는 건데.
광증을 앓는 포악한 왕은 대본을 읽으니 이미지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호위무사는 어떻게 이미지를 잡아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열정적? 냉철한? 열혈한?
오랫동안 고민하다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호위무사 귀신은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왜, 만나서 뭐 하려고?]“왕을 경호하고 지키는 느낌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럼 궁을 가야지. 경복궁이든, 창덕궁이든, 옛날 왕들이 살던 궁.]“궁까지 가야 한다고요? 꼭 거기서만 한이 서렸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그럼 호위무사 귀신들이 학원가에서 떡볶이나 먹고 있겠냐?]이중협이 피식 웃었다.
[평생을 왕을 모신 분들이야. 한이 남아서 이승에 귀신으로 남았다면, 당연히 궁에 있겠지.]잠시 호위무사 귀신들을 만나는 것을 상상했다.
도대체 그들에겐 어떤 한이 있을까?
[사연 없는 귀신은 없다지만, 무사들은 한평생 감정을 억누른 채 검을 잡다 보니 그 한이 더 깊더라.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그래야죠. 세월을 담은 한인데, 얼마나 한이 깊겠어요.”
태주는 손으로 대본을 쓸었다.
‘그림자 무사’라는 제목이 반짝 빛났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