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84
84화
낭만 고양이 (2)
태주는 부국제에 참석했다.
이곳에 독립영화 ‘자유선언’이 초청된 덕분에, 그는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다.
양군보 감독, 손우현, 그리고 늦게 합류한 김선정까지.
감독과 배우들이 모두 모인 ‘GV’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태주가 마이크를 잡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극장이 떠나갈 듯했다.
손우현이 장난으로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와, 우리 막내 인기가 이 정도였나? 태주야, 네 인기 절반만 떼주라, 나도 인기 좀 누리고 싶다.”
많은 관심에 쑥스러워하는 태주였지만, 연기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면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다.
“한태주 배우님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연기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마이크를 잡은 태주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연기할 때, 다른 이의 연기에 반응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대사 외우기 급급해 눈과 귀를 닫고 연기하면 상대가 제게 전하려는 감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더라고요. 결국, 연기도 감정의 전달이잖아요.”
옆에 있던 이중협이 흐뭇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한 말 잘 기억하고 있었네.]“상대 배우의 대사를 제가 처음 듣는 것처럼, 매 순간 정성스레 반응해야 합니다. 상대의 연기에 집중하는 순간, 제 연기는 그에 따라 자연스레 나올 테니까요.”
관객과의 대화가 끝난 후.
태주는 양군보 감독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손우현과 김선정은 둘이서 복어탕을 먹는다고 따로 빠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태주와 양 감독이 그들을 배려해 준 것이랄까.
“두 분이 지금 사귀시는 거, 맞죠?”
“선정 씨 말로는 썸이라는데, 에잇. 제가 보기에는 이미 사귀고 있어요. 아주 진지하게.”
“감독님, 저희끼리 더 맛있는 거 먹어요.”
“전 오히려 좋아요. 우리 태주 씨를 제가 독차지하는 건데, 너무 좋죠!”
한껏 웃던 양군보 감독의 눈길이 태주에게 살포시 내려앉았다.
“태주 씨는 어쩜 이렇게 한결같은지 모르겠네요.”
“하하,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촌스럽단 말씀이죠?”
“그게 아니라, 배우 한태주는 여전히 연기에 대한 갈망이 크고, 여전히 공부하는 성실한 배우라는 뜻이었어요. 연예계에서 이렇게 한결같은 사람, 별로 없거든요. 아니, 일상생활에서도 별로 없죠.”
[꼭 자식 바라보듯이 보네. 하지만 우리 태주, 빼앗길 수 없다고!]태주가 괜히 쑥스러워 보조개가 팬 볼을 씰룩였다.
그런 그를 양군보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중에 저랑 같이 또 작품 해요. 떴다고 나 까먹지 말고, 응?”
“감독님, 이 무슨 황송한 소리세요. 제가 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제가 작품 하나 준비하는 게 있어서 그래요.”
그는 태주를 오롯이 바라보며 말했다.
“태주 씨한테 정말 잘 어울릴 배역도 있고요.”
* * *
밥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영화제 심사위원인 윤이도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같이 저녁 먹게, XX 식당으로 와라.
태주가 순진하게 저녁을 먹었다고 답장을 하려는 찰나.
[가보는 게 좋을 거야. 윤이도 감독님뿐만 아니라 동료 감독님, 업계 종사자분들도 계실 거 같은데. 가서 뭐라도 듣고 배워 와.]이중협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꿔 식당으로 가니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미 식사는 끝나고 술판이 벌어진 뒤였다.
얼굴이 벌게진 윤이도가 태주를 자기 옆에 앉혔다.
“얌 마, 태주야! 우리 태주!”
“얘가 한태주구나. 화면으로도 잘생겼는데, 실물은 진짜 조각이네.”
“최 감독이 탐낼 만하네. 애가 분위기가 있어.”
“미련 가지지 마, 최 감독. 어차피 이탁원이 쟤 가졌잖아.”
태주의 눈에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안 좋게 헤어진 전여친과 밥을 먹는 심정이 바로 이런 걸까.
하필이면 바로 앞에 최준모 감독이 있다니.
태주는 정신없이 여러 사람에게 술잔을 받으며 생각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영화제에 출품한 작품도 없을 텐데. 윤이도 감독님이랑 친분이 있는 건가?’
[야, 최준모 감독이 너 아직도 쳐다본다.]이중협이 혀를 차며 태주에게 말해주었다.
[저 양반, 뒤끝 긴 건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최 감독,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어! 우리 태주 그만 좀 쳐다보라고!”
취기가 잔뜩 오른 윤이도가 최준모에게 일갈했다.
그 말에 최준모는 태주에게 대뜸 물었다.
“이번에 이탁원 감독하고 같이 영화 들어간다면서? 내 거 싫다고 거절하고 간 게 그런 영화냐?”
[뭐야, 저 양반. 왜 갑자기 시비야?]마치 신문하듯 묻는 말에 태주는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감독님 영화도 좋았습니다. 다만, 제가 원했던 영화가…….”
“쯧쯧, 작품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이도 형님, 얘가 이래요. 아직 어려서 그런가, 마냥 도전적인 것만 좋아하고.”
최준모의 하소연에 윤이도가 태주에게 궁금한 듯 물었다.
“너, 최 감독하고 미팅도 했다면서? 백시영 복귀작에다 우리 최 감독이 제작하는 영화면 흥행도 보장된 건데. 이걸 두고 이탁원한테 간 이유가 뭐야?”
옆에서 술에 취한 사람들이 끼어들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얘도 다 생각이 있어서 선택한 걸 텐데요.”
“요즘 제일 주목받는 젊은 배우 아닙니까, 한태주 군. 분명 무슨 생각이 있었겠죠.”
“생각이 있는데 최 감독 작품을 거절해? 바보같이 왜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그래.”
“왜요, 이탁원 감독도 이번에 제대로 이 갈고 영화 준비했다고 하던데요.”
“이탁원 걔, 영화 두 번이나 망했던 애잖아.”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양반들이! 태주야, 너 왜 가만히 있냐? 한번 들이박아, 네 선택인데 왜 꼰대들이 이래라저래라하냐고.]잔뜩 화난 이중협이 옆에서 뭐라고 하는 사이.
잠자코 있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다들 너무 섣불리 판단하지 말게. 여기 한태주 군의 혜안이 맞았는지, 준모 말이 맞았는지는 나중에 알게 될 거 아닌가.”
무게감 있는 발언에 모두가 조용해진 순간.
태주는 아까 정신없이 술잔을 받느라 빠르게 지나갔던 그를 발견했다.
윤이도, 최준모와 함께 대한민국 3대 감독으로 불리는 모황국 감독이었다.
해외의 유수 영화제를 휩쓸고 다니는 그는 대한민국의 거장으로 불렸다.
그리고 이번에 영화제 위원장을 맡았기도 했고.
“난 이 친구, 제법 괜찮은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원래 진짜 배우는 흥행에 휩쓸리지 않아, 자기 마음이 부르는 작품을 골라 연기하는 법이거든.”
모황국이 태주를 인정하듯 눈을 찡긋했다.
“진정성이 묻어나는 연기를 해야 비로소 그 작품이 대작의 반열에 드는 법이니까. 이건 준모, 너도 좀 배워야 해.”
최준모의 얼굴이 벌게지던 순간.
[와, 모황국 감독님이 저렇게 얘기 길게 하시는 건 처음 본다. 너가 마음에 들었나 봐.]태주는 남몰래 모황국에게 감사를 올렸다.
* * *
술자리는 의외로 평탄하게 이어졌다.
최준모는 먼저 호텔로 가버렸고, 태주는 술에 취한 감독님들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술에 강하다는 윤이도도 태주를 취하게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테이블에 남은 건 모황국과 태주뿐.
백발의 머리를 목 뒤까지 길게 기른 그는 태주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준모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하지. 이번 신작에 자네를 캐스팅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컸던지라, 그 아쉬움이 화로 표출된 것 같더군.”
태주는 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닙니다. 제가 더 예의 바르게 행동했어야 하는 건데요.”
“그보다 더 어떻게 예의 바르게 해.”
모황국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를 보았다.
“이탁원, 아주 괜찮은 감독이야. 스토리텔러로서도 훌륭하고. 자네는 잘해 낼 걸세.”
“감사합니다.”
“자네가 감사할 게 아니지, 충무로가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니.”
뜻을 이해하지 못한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중협은 알 수 있었다.
모황국은 한태주라는 배우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런 얘기 하면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난 자네를 보면 이중협이란 친구가 생각나.”
그 말에 태주도, 이중협도 눈이 반짝거렸다.
“재능이 너무 뛰어나 일찍 떠난 친구인데, 그 친구도 자네처럼 참으로 연기를 사랑했지. 그게 너무 뜨거운 나머지 연기에 대한 꽃을 너무 일찍 피워 버렸는지도 몰라.”
묘한 표정의 태주를 본 모황국이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괜히 죽은 사람 얘기를 했나?”
“아닙니다. 좋은 얘기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주는 모황국을, 그리고 이중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 롤모델이 이중협 선배님이거든요. 배우로서 정말 닮고 싶은, 뛰어넘고 싶은 분입니다.”
그 말에 이중협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 * *
그날 밤.
높게 뜬 달이 환히 빛나는 가운데.
태주는 차용석과 함께 해변을 거닐었다.
내일이 부국제 폐막이었고, 곧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낮에 일정이 바빠서 이제야 해변에 와보네. 미안하다, 진작에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은갈치색 양복 차림의 차용석이 태주가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와서 좋아요.”
“이제 부산에서의 일정도 마무리돼가는데, 어때? 좋았어?”
태주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신없이 여기저기 행사 참석하느라 바빴죠, 뭐.”
“네가 여기서 제일 뜨거운 감자니까. 이탁원 감독 영화 캐스팅도 그렇고, ‘자유 선언’이 부국제에서 수상한다는 소리도 있고 하니.”
“정말 우리 영화, 뭐라도 수상했으면 좋겠어요.”
기대에 부푼 태주의 눈이 반짝거렸다.
“뭐라도 타지 않겠어? 좋은 영화잖아. 그런데 러닝을 3일이나 쉬니까 몸이 근질거리는구먼.”
차용석이 대화를 하다 돌연 자켓을 벗어 태주에게 맡겼다.
“나는 저기 한 바퀴 돌고 올게! 넌 천천히 걷고 있어!”
부스터를 단 것처럼 차용석이 저 멀리 뛰어갔을 때, 태주도 이중협도 놀라움에 혀를 찼다.
“진짜 대단하다, 저렇게 뛰고.”
[쟤는 어째 나이가 들수록 더 체력이 좋아지는 것 같아.]그리고 침묵.
태주도, 이중협도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쑥스러워서였다.
그러다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까는…….’
[태주 너…….]고백하고 나서 눈치를 보는 연인 같다는 생각에, 태주가 크게 웃어버렸다.
‘형, 이게 뭐예요! 그냥 평소처럼 해요!’
[내가 할 소리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아까 내가 너 롤모델이라는 둥 낯간지러운 소리 해서!]쑥스러움에 괜히 큰소리를 내는 이중협.
태주는 입을 씰룩였다.
‘그건 진심이에요. 저, 앞으로 형한테 인정받을만한 연기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때, 태주의 귓가에 야옹,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치에 서성거리는 고양이였다.
“야옹.”
비쩍 마른 하얀 고양이가 그의 곁을 맴돌았다.
예쁘장한 외모가 눈에 띄었다.
새초롬한 눈매, 반짝이는 파란 눈, 깨물어주고 싶은 입, 그리고 요정처럼 서 있는 귀.
“왜 이런 데 고양이가 있지?”
의아해하면서도 태주는 버릇처럼 고양이를 쓰다듬으러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너도 귀신이야?”
고양이가 그렇다는 듯 꼬리를 살랑거린다.
태주는 무릎을 굽히고 고양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윤기 없는 털, 늘어지지 않은 뱃살에 군데군데 난 상처가 보였다.
고양이를 살피던 이중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 너한테서 자기 자식 냄새가 난다는데.]“자기 자식이라뇨? 제가 새끼 고양이도 아니고…… 아!”
그제야 태주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몇 달 전, 권혁두 귀신을 만났을 적에 태희가 발견한 새끼 고양이를 집에 데려왔었다.
‘엘사’라 이름 짓고 현재는 가족이 된.
혹시 엄마 고양이가 있다면 같이 키우려고 주변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엄마 고양이는 입양을 갔다고 했었다.
그래서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고?’
‘그럼 얘가 우리 엘사 엄마예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