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9
9화
대역 배우, 주목을 받다 (1)
화요일 오전.
태주는 아침 일찍부터 경복궁을 방문했다.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자.
머릿속에 저장된 대본의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호위무사가 밤중에 왕비와 함께 산책하는 모습.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밑, 둘이 서 있는 모습.
궁은 닫힌 곳이었지만 열린 곳이었다.
사랑이 있어 이곳에서 버틸 수 있었기에.
“궁에도 낭만이 있었겠구나.”
감상에 취해 내뱉은 말.
태주는 곧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호위무사 귀신을 빨리 만났으면 좋겠네요. 아직은 안 보이는데.’
[찾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덜덜 마.]이중협이 믿음직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구냐, 대장 귀신이라고. 궁에는 여러 귀신들이 있으니, 내가 그들한테 찾아달라 부탁할게.]* * *
몇 시간 동안.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 모두를 샅샅이 뒤졌다.
궁에 이렇게 귀신이 많은 줄 처음 알았다.
내시, 대령숙수, 궁녀 등등.
그러나 그중에서 호위무사 귀신은 없었다.
무사는 고사하고 무기를 찬 귀신조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자기만 믿으라면서요. 대장 귀신 맞아요? 어떻게 호위무사 한 명을 못 찾아.’
이중협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곁을 배회하던 궁녀 귀신들이 끼어들었다.
[호위무사 귀신을 찾는 거면 여기서 찾으면 안 되지.]그녀들의 말에 태주가 고개를 돌렸다.
‘예?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저기 창덕궁에 검을 차고 다니는 남정네 하나가 떠돈다는 얘기를 들었소만.]태주와 대장 귀신은 동시에 흥분했다.
‘검을 차고 있다고? 그럼 무사가 아닙니까?’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소. 군복을 입고 있거든.] [눈깔이 워낙에 흐리멍덩한 것이 미친놈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이들과 교류하지 않고 늘 혼자 다니는 양반이오. 누군가를 기다리며 찾는 것 같던데.] [참 이상한 게, 그 양반은 해가 떠 있을 때만 활동하는 것 같더라고. 해가 넘어가면 어디 숨어있는지 보이지를 않아.]두서없이 마구 던져지는 귀신들의 정보.
태주는 그들의 말을 잠시 멈추었다.
‘잠시만요. 정리해 보자면 창덕궁에 무사로 추정되는 군복 입은 귀신이 있다, 이 말씀이시죠?’
[그렇지.]“어디서 뵐 수 있을까요, 그분?”
[그건 우리도 모르지. 종일 전전긍긍하며 어디로 싸도는지, 도통 눈에 보이지를 않아.]이상했다.
오늘 궁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귀신을 마주쳤었다.
그들 중 군복 입은 남자는 없었다.
군복을 입고 검을 찬 남자라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옷차림을 하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 없다.
‘일단 그분을 찾아가야겠어요.’
[네가 찾는 건 호위무사잖냐. 군복 입은 남자가 호위무사일 리는 없지 않아?]‘그래도 마음에 걸려서요. 아까 창덕궁을 돌았을 때, 그런 남자는 없었잖아요. 아무래도 만나고 가야 할 것 같아요.’
태주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기 전에 찾아야 한다.
* * *
오후 4시 반.
태주는 한 시간 째 창덕궁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머릿 속엔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군복을 입고 검을 찬 남자, 그를 찾아야 한다.
[답답하군. 도대체가 보이지를 않네.]저 멀리 날아갔다 온 이중협이 곁에 합류했다.
[왕이 기거하던 곳, 왕비가 있던 곳, 궁녀들 숙소, 다 뒤져봤는데, 없어!]‘조금만 더 찾아봐요. 분명 여기에 있다고 했어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한산한 후원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왔네.”
눈앞에 너른 연못과 정자가 나타났다.
햇빛에 반짝이는 푸른 연못.
지금은 쓰지 않는 아늑한 정자.
한쪽에 흐드러지게 핀 꽃 덤불.
눈앞에 조선의 한 풍경이 그려지는 듯했다.
왕과 왕비가 직책을 벗어놓고 남녀로서 마주하는 공간.
아름다운 후원에서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터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
풍경에 취해 마음속 긴장감이 잠시 풀어졌다.
평온한 마음으로 천천히 걷고 있던 그때.
위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두리번거렸다.
[저 양반, 나무에 올라타서 뭐 하고 있는 거지?]이중협의 말에 태주는 고개를 들었다.
아득히 높은 나뭇가지 사이에 있는 웬 남자가 보였다.
성성이 난 나뭇잎들을 헤치며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수상한 움직임에 그를 자세히 보다가, 무언가 발견했다.
다 해진 검은 군복, 허리춤에 달랑거리는 검.
-저기 창덕궁에 검을 차고 다니는 남정네 하나가 떠돈다는 얘기는 들었소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그것.
내가 찾는 호위무사인가?
즉시 남자를 있는 힘껏 불렀다.
‘저기요,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태주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는 남자는 계속해서 나무를 뒤지기 바빴다.
결국, 이중협이 남자를 데리고 왔다.
두 팔이 묶인 남자가 버럭 화를 냈다.
[이럴 시간 없어, 나는 찾아야 할 것이 있다고!]예전에 이중협한테 들었었다.
목적을 가진 귀신은 한이 있는 거라고.
그래서 저승으로 성불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거라고.
‘무엇을 찾는 겁니까?’
[분명히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어. 성 나인과 부용지에서 만나기로 했단 말이다.]‘궁녀를요?’
태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남자가 핏대를 올렸다.
[나는 그저 함께 임금을 섬기던 사이로써, 고독한 궁에서 의지가 되었던 그녀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라고.] [너는 누구지?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그래. 말해봐, 우리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이중협의 물음에 남자가 대답했다.
[내 이름은 최무백. 일제가 통치하던 무렵, 나라님을 모시던 호위무사였다.]* * *
드디어 찾았다.
호위무사.
한나절 동안 궁궐을 돌아다니며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태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그쪽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뭐라고? 네가 뭔데?]최무백이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중협이 냉큼 끼어들었다.
[이 사람아,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몰라? 얘가 걔라고, 한 풀어줄 수 있는 능력자.]그 말에 최무백의 얼굴이 싹 달라졌다.
[정말로? 한을 풀어줄 수 있다고?]‘그렇습니다. 예전에 복싱하시던 어르신의 한을 풀어드린 적도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그쪽 한도 풀어드리겠습니다. 대신…….’
[내 능력 따위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성 나인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러니 내 한을 풀어주게, 제발.]최무백이 야윈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올렸다.
[성 나인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딱 한 번만 만나고 싶어. 만나서 해줄 말이 있다고.]그의 절절한 말에 태주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부모님을 막 잃었을 때, 미친놈처럼 이 세상에 없는 그들을 찾던 자신을.
태주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그것이 무사님의 한입니까? 도대체 그분이 무사님께 무엇이기에?’
[외로운 궁 안에서 나비처럼 피어오르던 사람. 다정함으로 온몸을 감싸준 사람. 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사람.]최무백이 태주를 흔들리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녀는 내 모든 것이었네.]* * *
구한말.
순종 황제가 돌아가시고 일제가 나라를 집어삼킨 이때.
황제의 죽음은 궁 안에 혼란을 일으켰고.
여러 가지 헛소문들이 두려움을 몰고 왔다.
이에 황제를 모시던 궁인들 또한 혼란에 빠졌다.
모시던 분이 죽으면 궁을 떠나야 하는 게 궁녀들의 도리였다.
“너희들, 이제 어떻게 할 거니? 나갈 거니?”
“난 갈 곳이 없어.”
옹기종기 모인 궁녀들의 겁먹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 중 한 소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나라님을 모시던 무사님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궁에 남지 않을까?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데, 궁에서는 적어도 봉급은 나오잖아.”
“모래와 돌이 섞인 쌀이 무슨 봉급이라고.”
“그래도 밖보다는 낫지.”
“옥희 네가 그런 건 왜 궁금해하니? 호위대에 아는 분이라도 있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소녀는 큰 눈을 내리깔았다.
그날 밤.
휘영청 달이 뜬 고요한 부용지에 한 청년이 서 있다.
그의 이름은 최무백.
호위대에서 근무하던 실력 있는 무사였다.
그렇지만 임금이 돌아가신 지금.
그는 지독한 번뇌에 시달렸다.
“주군도, 나라도 못 지켰는데 무사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원수를 갚기 전까지는 내가 숨을 쉬는 것도 죄일 뿐이다.”
결심이 서자, 그는 곧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다만, 이것을 말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무사님!”
저 멀리 그에게 뛰어오는 고운 소녀.
찰랑거리던 땋은 머리 사이로 붉은 댕기가 반짝였다.
최무백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성 나인.”
그들은 함께 임금을 모시며, 오고 가며 보던 사이.
어느덧 서로에 대한 마음이 피어났다.
성 나인을 보며 느끼는 이 몽글몽글한 감정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녀를 지켜주고 싶고, 늘 보고 싶고, 가까이 두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임금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혹 오해를 받을까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꼭 전할 것이다.
“흠흠.”
성 나인이 헛기침을 해 그의 시선을 끌었다.
토끼 같은 동그란 눈이 그를 오롯이 응시했다.
“절 부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랬지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최무백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떼며 말했다.
“나는 궁 밖으로 나갈 생각이오.”
성 나인은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무사님, 혹 다른 분과…….”
“가정을 이루러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오. 주군과 나라의 복수를 하기 위함이오. 선대왕께서도, 주군께서도 일제의 견제하에 허망하게 돌아가셨소. 내 주군을, 나라를 집어삼킨 일제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소.”
최무백은 성 나인의 손을 꼭 잡았다.
성 나인의 커다란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비쳤다.
실망감, 걱정스러움, 결연함.
고독한 남자의 눈이 애달픈 여자의 모습을 온전히 담았다.
“그대에게 기다려달라는 말은 못 하오. 귀중한 그대의 청춘을 내게 바쳐달란 말도 못 하겠소.”
“무사님…….”
“그러나 일이 다 끝나면 그대에게 반드시 돌아오겠소.”
“제게 꼭 돌아오실 겁니까?”
“꼭이오. 약조하오.”
최무백은 하고 싶은 말들을 애써 삼켰다.
그대는 내게 소중한 인연이오.
그대를 지독하게 연모하오.
그대에게 기약 없는 기다림을 선사해서라도 그대를 갖고 싶을 만큼.
성 나인의 눈에서 눈물이 또륵, 떨어졌다.
“부용지에 꽃이 만발할 때, 그곳에서 무사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가 왔다는 표시로 이 댕기를 나뭇가지에 걸어 놓을게요.”
머리칼을 묶은 붉은 댕기가 시선에 걸리는 순간.
닿을 듯 말듯 여린 손길이 뻗쳤다.
최무백은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꿈에서 수없이 잡았던 조그마한 여인의 손.
자신의 손에 들어온 작디작은 여린 손이 따스했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떨리는 목소리로 덮었다.
“꼭 돌아오리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