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91
91화
낭만 고양이 (9)
징징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짓말 탐지기가 돌아가던 그때.
딩동.
명쾌한 소리와 함께 설채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MC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호라, 그렇게 케미가 좋았는데 공과 사가 분명하네요. 그럼 채빈 씨가 연기를 정말 잘했다는 뜻이군요.”
뼈가 있는 MC의 말에 설채빈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거짓말 탐지기는 이선우에게 향했다.
“이선우 씨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드라마에서 윤수안 씨와 정말 좋은 케미를 보여주셨는데요. 두 분이 실제로 좋은 감정을 가진 적은 없으신가요?”
질문을 들은 이선우가 옆에 있던 윤수안에게 무어라 귀엣말했다.
곧바로 그녀가 얼굴이 확 붉어지며 손사래를 치자, 이선우가 큭큭거렸다.
무척 친밀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여러 스태프가 확신했다.
“이쪽이 진짜네. 한태주랑 설채빈은 연막이고.”
“이선우, 첫 열애설 터지는 건가?”
잠시 후, 이선우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친해진 건 맞지만, 사귀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윤수안 씨에게 아무런 매력이 안 느껴지신다고요?”
엠씨의 짓궂은 말에 이선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파트너죠. 여러 가지를 의논할 수 있는…… 뭐, 그런.”
몇 분 후.
이선우가 손을 올린 거짓말 탐지기에서 딩동,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하, 제가 뭐라고 했어요.”
이선우의 말에 조연출이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에이, 그럼 그렇지. 뭘 바라겠냐, 이선우한테. 이제껏 열애설 한번 안 낸 사람인데.”
피디가 혀를 쯧쯧 차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선우한테 저런 질문한 게 잘못됐다니까. 이선우는 염수정하고 썸씽 있는지 오래라고.”
피디의 카더라 통신에 조연출이 깜짝 놀랐다.
“에이, 염수정하고 이선우하고요? 설마요, 염수정은 백시영하고 열애설 났었잖아요. 그리고 이선우하곤 친구라고 방송에서 얘기한 적 있지 않아요?”
“같은 소속사 식구니까 친구라고 속이기 쉽지. 아무튼, 둘이 가까운 건 사실이야. 사랑과 우정 사이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지도.”
피디가 어깨를 으쓱하며 촬영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선우의 거짓말 탐지기를 태주가 곧바로 이어받았다.
다들 그에게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엠씨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태주 씨도 드라마에서 설채빈 씨와 정말 좋은 케미와 합을 보여주셨죠. 단 한 번도 좋은 감정을 가지신 적, 없으십니까?”
“친하기는 하지만, 사귀는 건 아닙니다.”
태주는 일부러 이선우의 말과 똑같이 골랐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청명한 딩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몇은 다행이라는 한숨을, 몇몇은 아직도 궁금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녹화장 밖 피디는 아쉬움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 분명히 한태주랑 설채빈 사이에 뭔가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안 그래?”
옆에 있던 조연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열애설은 어떻게 잘 넘어간다 쳐도, 거짓말 탐지기에서 뭐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저기요, 피디님들.”
피디들 뒤로 무시무시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차용석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그런 질문은 자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고품격 토크쇼에, 열애설로 계속 분량 채우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다른 할 얘기도 많은데.”
꿀꺽.
차용석의 기세에 눌린 피디들이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 * *
결국, 녹화는 무려 5시간이나 걸렸다.
드라마에 대해서, 배우들에 대해서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게 많았기에 길어진 것이다.
녹화가 끝난 후.
태주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선우를 마주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너나 나나 고생했지. 짓궂은 피디들이 계속해서 연애로 몰아가는 바람에.”
그때, 제작진에게 인사하는 윤수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선우는 그녀가 있는 쪽을 힐끔거리고는 다시 태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유독 반짝거렸다.
“그런데 태주 너, 둘 중에 누구 좋아하냐?”
“네? 무슨 말씀이신지…….”
태주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선우를 바라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눈망울.
이선우는 피식 웃었다.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없는 건지.”
* * *
얼마 후.
태주는 차용석의 옆에 타고 회사로 가는 중이었다.
빨간불에 걸린 틈을 타 차용석이 열심히 말을 걸었다.
“오늘 수고했어. 열애설 관련 질문이 많기는 했는데, 그만큼 작품 속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줬다는 거니까.”
차용석은 태주를 힐끔 바라보았다.
의외로 태주는 차분했다.
오늘 토크쇼에서 거짓말 탐지기를 하고, 그런 질문을 받았음에도.
정말 설채빈에게 감정이 없는 게 확실했다.
그래서 오늘 토크쇼에서 본 설채빈과 더욱 비교되었다.
분명 그녀는 태주를 힐끔거리며 신경 쓰는 얼굴이었기에.
“형, 왜 그렇게 쳐다봐요? 할 말이라도 있어요?”
차용석의 상념을 깨트리는 태주의 목소리.
아까부터 자신을 음흉하게 바라보던 차용석이 의심스럽던 태주였다.
[저 녀석, 무슨 생각하는 거냐?]‘모르겠어요. 아까부터 저래요.’
[저 녀석, 또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냐?]“이상한 생각 하세요?“
태주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차용석은 화들짝 운전대를 잡았다.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 * *
며칠 후.
충무로의 영화제작사 현필름.
서류를 뒤적이던 신예지가 달력을 넘겼다.
“대본리딩 준비는 잘되고 있지? 배우들한테도 다들 알렸고?”
“네, 11월 2일로 잡혔다고 알렸습니다. 대본도 미리 보내 놓았고요.”
“이번 리딩 정말 기대된다. 귀환한 충무로 여신 염수정에 믿고 보는 배우 주세진까지. 그리고 그런 연기 신들 사이에서 한태주가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도.”
“3천 대 1 경쟁률을 뚫은 배우잖아요. 잘하겠죠.”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진정한 배우라고.”
신예지는 한참을 생각하며 펜대를 굴렸다.
“그런데 우리 저번에 영화 화보 찍기로 한 건 어떻게 됐어? 어디랑 진행하기로 했지?”
“노블에서 먼저 제안이 와서, 그쪽이랑 진행할 것 같습니다. 시안을 괜찮게 잘 뽑았더라고요.”
“어디 봐봐.”
직원이 건네준 아이패드를 한참 넘겨보던 그녀.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괜찮네. 그럼 이렇게 진행해. 아 참, 디렉터는 이분으로 원한다고 해. 일을 잘하시더라고.”
그녀가 가리킨 이름.
‘한유경’이었다.
* * *
직원들로 가득한 한 사무실.
코팅된 종이를 넘기는 소리로 사각거렸다.
“와, 이번 달 GQ 판매량 대박이다. 지난 5년 중 최고 판매량 갱신했대요.”
“한태주랑 설채빈이 정말 케미가 좋았지. 잘 나왔어, 이번 화보.”
“사실 나도 한 권 샀어.”
“이 둘 진짜 사귀는 거 아니야?”
“아니래요.”
“둘이 케미 정말 좋던데, 몰래 사귀는 거 아냐?”
“그럼 이제껏 화보 찍었던 연예인 중에 절반은 다 사귀었게요?”
사무실로 들어오던 여자가 직원들을 보며 눈살을 찡그린다.
“누가 보면 여기가 GQ 사무실인 줄 알겠다! 우리 잡지는 안 사고 다들 그거만 샀니?”
편집장의 등장에 직원들이 서둘러 GQ 잡지를 숨겼다.
그들 중 유일하게 당당한 건 한유경.
태주의 고모이자 매거진 ‘노블’의 팀장이었다.
“볼 만하니까 보는 거죠. 이번에 GQ에서 화보를 특히 잘 뽑은 건 사실이잖아요.”
그 말에 편집장의 코가 벌름거렸다.
“한태주랑 설채빈 조합이면 우리도 그만한 판매량 낼 수 있었어.”
“그렇죠. 우리 시안을 그쪽에서 거절해서 그렇지.”
“한 팀장, 내가 마지막에 시안 갑자기 변경해서 안 됐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글쎄요.”
편집장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 난 한태주랑 설채빈이 아역들이라 귀여운 컨셉으로 가면 좋을 줄 알았다고. 근데 치명적인 컨셉으로 이렇게 대히트칠 줄은 몰랐지.”
한유경이 편집장 옆으로 다가왔다.
“편집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흥분을 감춘 채 편집장에게 귀엣말했다.
그러자 별 기대 없이 앉아있던 편집장이 벌떡 일어났다.
“뭐? 현필름에서 이탁원 영화 기념 화보 촬영? 이번에 염수정 잡으려고 다들 난리 쳤는데 결국 한 팀장이 해냈네! 역시 한 팀장이야!”
“호호, 제 능력치가 이 정도예요.”
“정말 잘했어. 그것도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한태주잖아?”
“네, 제가 정말 좋아하죠.”
한유경이 자랑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우리 태주’
이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태주를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최선을 다해 태주를 멋있게 화보에 담아줄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 태주의 매력을 알도록.
* * *
금요일.
태주는 차용석과 함께 제작사 현필름으로 왔다.
그동안 토크쇼, 드라마 준비 등등으로 바빴었다.
어미 고양이의 한을 풀어주는 데도 시간을 할애했었고.
그런데 새끼와 만난 어미 고양이의 한이 풀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았다.
아직 넥카라를 풀지 못한 새끼의 모습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으니까.
대신 태주는 어미 고양이와 함께 지내며 여러 가지 고양이의 습성과 몸짓을 배웠다.
그것이 드라마 ‘낭만 고양이’의 고영민 역을 준비하는 데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우선 미뤄둘 때였다.
오늘은 영화 ‘광대’의 대본 리딩을 하는 날이었으니까.
그렇게 고대하던 ‘효원’을 다른 배우들과 함께 연기해볼 시간이다.
태주는 다과가 준비된 대회의실에 들어섰다.
자리를 정리하던 직원이 그를 발견했다.
“일찍 오셨네요.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네, 연습 좀 하려고요.”
대사를 맞추려 차용석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화장실에 가고 없었다.
이중협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놈의 과민성 대장 증후군. 태주야, 내가 맞춰줄게.]‘그럼 저야 고맙죠.’
태주는 이중협과 함께 대본을 맞춰보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중협이 유독 긴장한 것 같다.
집에서는 물 흐르듯 그렇게 잘 맞춰주던 대사를, 지금은 연신 틀렸다.
결국, 태주가 연습을 끊었다.
‘형, 긴장했어요?’
[아니, 내가 왜?]이중협이 태주의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뗐다.
이제까지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오늘 대본 리딩에 염수정 선배님도 참석해서 그런가?’
‘염수정 선배님 볼 생각하니까 떨려요?’
[…….]‘분명 대장 귀신은 살아있는 자에게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그런데 수정이는…… 다르잖아.]이중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수정이는 나의……]그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먼저 와 있었네요.”
옥구슬이 굴러가듯 낭랑한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렸다.
우아하면서도 신비로운 모습의 여자가 태주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태주 씨.”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탐스러운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태주는 옆에 있던 이중협을 힐끔거리며 마주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님.”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던 이중협의 시선이 와락 흔들렸다.
마침내 그녀를 만났다.
그의 모든 것이었던, 그의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그만의 ‘수정’을.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