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97
97화
과거와 현재, 만나다 (6)
몇 시간 후.
화보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태주는 백시영 말고도 여러 배우와 커플샷을 찍었다.
그중 제일 많은 환호를 받은 건 윤수안과의 투샷이었다.
등을 드러낸 과감한 드레스를 입은 윤수안과 단추 두어 개를 풀은 와이셔츠 차림의 한태주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두운 조명, 드러난 살결, 그리고 두 배우 간에 오고 가는 관능적인 눈빛.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최고의 화보를 완성했다.
“브라보!”
촬영 내내 흥분해 있던 포토그래퍼는 이 샷에서 정점을 찍었다.
촬영이 끝난 후, 태주와 윤수안을 불러 그 사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화면 안에는 태주가 윤수안의 허리를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윤수안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정면을 바라보는 도발적인 포즈가 담겨 있었다.
“정말 멋있지 않아요? 유경 씨, 그렇죠?”
화보 디렉터인 한유경은 정신없이 사진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옆을 슬쩍 보다가 태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누가 뭐랄 것 없이 서로 고개를 돌렸다.
태주는 고모가 보는 앞에서 저런 치명적인 표정 연기를 했다는 것이 죽을 맛이었다.
가족 앞에서 연기한다는 거, 생각보다 매우 부끄럽고 수줍다.
한유경은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더니 황홀한 척 말했다.
“한태주 씨가 너무 섹시해서 제 눈이 다 멀 것 같네요.”
“유경 씨, 태주 씨 팬이라더니 오늘 호강하고 좋았겠어요.”
“정말 좋았죠”
한유경은 태주의 빨개진 귀를 보며 짓궂게 덧붙였다.
“오늘만큼 태주 씨가 멋있어 보였던 적은 없었어요. 제가 볼 때 이 사진 실리면 우리 잡지, 그달 매출 1위 찍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이제 태주의 얼굴은 곧 터질 것처럼 붉게 익어 있었다.
* * *
옷을 갈아입고 여러 선후배와 인사를 나눈 후.
태주는 다음 스케줄을 위해 바쁘게 현장을 빠져나왔다.
옆에서 그를 따라오던 차용석은 잔뜩 신이 났다.
“태주야, 나 오늘 눈이 멀어버릴 뻔했잖아. 네가 너무 빛나서.”
“하하. 칭찬 고마워요, 형. 역시 형밖에 없어요.”
“나는 태생적으로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야. 태주야, 너 오늘 특출나게 멋있었어. 역시 나의 스타 한태주!”
[솔직히 백시영 옆에서도 너 별로 안 꿀리더라. 완전 멋있었음.]한쪽에서는 차용석이, 한쪽에서는 이중협이 칭찬을 퍼붓는다.
‘아, 어색하지만 좋은 이 기분은 뭐냐고.’
그러고 보니 이제 집에서도 고모가 자신에게 이런 칭찬을 폭격할 거 아닌가.
팬들에게 칭찬을 받는 건 좋은데 친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부끄럽다.
태주는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밴에 타려던 도중, 차용석이 옆에 주차된 차의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었다.
“인우야, 오늘도 고생한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저쪽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태주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트렁크에 짐을 정리하는 박인우가 있었다.
“아니, 형이 여기는 웬일이에요?”
태주가 그를 부르자 얼굴을 확 붉혔다.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에서 기인한 홍조였다.
“너희 둘이 아는 사이였냐?”
“네. 저희 과 선배예요, 인우 형.”
“학교가 같은 줄은 알았는데, 과도 같았구나. 그럼 우리 쪽 로드로 뽑을 걸 그랬네. 인우, 지금 수안이 로드로 가 있거든.”
“윤수안 씨요?”
놀라웠다.
박인우가 여배우의 로드 매니저라니.
‘그것보다, 인우 형이 이쪽에 뜻을 두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당연히 자신의 형과 동생처럼 공부 쪽으로 갈 줄 알았다.
“뭐, 널 만났으니 하는 말인데. 사실 나, 너 보고 용기를 얻어 이쪽 길 걷기로 결심했다.”
“네? 그게 무슨…….”
박인우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매니지먼트 쪽에 뜻이 있었는데, 그동안 아버지랑 형제들 눈치 보느라 못했었거든. 그런데 너 보고 나도 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고.”
“정말요?”
“응, 그래서 휴학하고 로드로 입사한 거야. 너 보기 부끄럽지만, 나도 열심히 해보려고.”
[쟤가 너 보고 자극받았나 봐.]이중협이 박인우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당당하게 포부를 밝혔음에도 연신 태주의 시선을 피했다.
아마 저번에 학교에서 태주에게 공부가 안되니까 연기 쪽으로 간 거 아니냐는 악담을 한 게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주는 그에 대한 악감정 자체가 없었다.
당시에는 그 발언이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요. 자기 꿈을 향해서 열심히 뛰는 건데요. 정말 대단해요, 형.”
태주는 박인우를 보고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같이 열심히 해봐요.”
“그래.”
박인우는 멋쩍은 듯 그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열심히 해보자.”
태주가 차를 타고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윤수안이 그곳에 도착했다.
“인우 씨,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인우 씨, 태주 씨하고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아까 둘이 얘기하고 있던데.”
윤수안의 질문에 박인우는 솔직히 대답했다.
“사실은 저랑 태주, 같은 과 선후배입니다. 태주가 연기하는 걸 보고 자극받아서, 저도 뒤늦게나마 제 꿈을 찾아 이곳에 온 거예요.”
“어머, 그래요?”
무언가를 생각하던 윤수안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그럼 태주 씨, 대학에서 여자친구 있었는지 아세요?”
“외모가 저렇게 훌륭한데, 당연히 있었죠.”
눈치 없는 박인우는 회상에 잠기듯 말을 이었다.
“태주가 사귄 여자애, 엄청 예뻤어요. 둘이 1학년 때 비주얼 CC로 제법 유명했었거든요.”
그 말에 윤수안의 눈동자가 세게 흔들렸다.
마치 없다는 대답을 기대한듯한 반응이었다.
“6개월 만에 깨졌지만요.”
그 말에 윤수안의 얼굴이 확 펴졌다.
1분 만에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 그녀였다.
다행히 박인우는 둔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차가 출발하자 윤수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늘 화보 촬영에서도 태주와의 스킨십에 심장이 두근거렸던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기대했다.
어서 ‘낭만 고양이’ 대본 리딩 날이 오기를.
* * *
며칠 후.
태주는 한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 중이다.
“내가 고양이였을 땐 말이야, 맨날 너를 뒤에서 바라보기만 했어. 그런데 인간이 돼서 제일 좋은 게 뭔지 알아? 네 앞에서, 네 눈높이에서 너의 얼굴을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거야.”
다정한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가득 울려 퍼졌다.
드라마 ‘낭만 고양이’의 프리퀄 만화에 들어갈 주인공 고영민의 대사였다.
밖에서 녹음을 지켜보던 관계자가 태주의 연기에 감탄했다.
“와, 진짜 잘하네요. 솔직히 처음이라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이번 주 내내 고영민 목소리 톤 잡는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만족하십니까?”
관계자는 차용석에게 만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좋은데요? 눈을 감고 목소리만 들어도 정말 황홀해요. 와, 이거 컷툰 형식으로 해서 목소리 넣으면 환상적이겠어요.”
“컷툰 형식이라뇨?”
“보통은 세로로 스크롤을 내려서 웹툰을 보잖아요. 그런데 컷툰은 핸드폰 가득 한 컷이 담겨요. 그리고 화면을 클릭하면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 형식이죠. 이렇게 하면, 한컷 한컷 더 자세히 보여줄 수 있고, 좀 더 다이내믹한 효과를 넣을 수도 있거든요.”
“저라면 태주 목소리가 담긴 컷에서 멈춰, 듣고 또 들을 것 같아요.”
팬심 가득한 차용석의 말에 관계자가 키득거렸다.
“사실 저도 그럴 것 같아요. 저렇게 솜사탕 같은 목소리라면 몇 번이고 듣고 싶을 거예요.”
“그런데 아까 들어보니까, 웹툰 작가님이 상당히 유명한 분이시던데요? 얼마 전에 완결 내신 ‘얼굴천재’, 연재 내내 조회 수도 매출액도 1위를 놓치지 않은 작품이잖아요.”
“맞습니다. 냐옹이 작가님이라고, 아주 유명하신 분이죠. 사실 그분이 그림체도 예쁘고 컷 배치랑 연출이 탑급이라 모시기 힘들었어요. 그런데……”
관계자가 비밀을 말하는 듯 속삭였다.
“그분이 태주 씨 팬이시더라고요.”
“정말요?”
“작가님께서 원래 쉴 때는 확실히 쉬시는데. 이번에 태주 씨가 나오는 드라마를 웹툰화 한다고 하니까 수락하신 거예요. 태주 씨 팬이라고. 아, 그리고 작가님께서 꼭 여쭤보라 하셨는데. 혹시 태주 씨 팬클럽은 언제 창단해요?”
눈앞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차용석은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커뮤니티에 있는 팬분들이 상당하더라고요. 이제 곧 창단할 겁니다.”
* * *
동 시각, 드림액터스.
탁시준은 본부장실에서 직원들의 보고를 받았다.
“네이비 웹툰에서 ‘낭만 고양이’ 프리퀄 웹툰, 내년 4월부터 한 주에 1화씩 연재한다고 합니다. 3월에 ‘낭만 고양이’ 드라마가 끝나면 바로 바통을 이어받으려는 모양입니다”
“오케이. 안 그래도 오늘 차 팀장이 한태주 데리고 네이비 웹툰 갔다고 했어. 웹툰에 넣을 목소리 녹음한다고.”
“어떻대요? 연기랑 성우는 좀 다르잖아요.”
“아주, 죽인대.”
탁시준이 직원을 보고 씩 웃었다.
“애가 워낙에 목소리가 좋은데다, 거기에 감정까지 실으니까 정말 리얼한가 봐.”
“그 좋은걸, 직접 들은 차 팀장님이 정말 부럽네요.”
“그건 그렇고, 이번에 베일릭스에서 연락 온 건 어떻게 됐어?”
베일릭스, 세계 최대의 미디어 플랫폼으로. 지금은 한국의 여러 드라마, 영화를 스트리밍하고 있다.
그곳에서 인기를 끌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건 시간문제.
그래서 많은 제작사가 베일릭스 입점을 노리고 있었다.
직원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베일릭스에서 동시 방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00억 정도, 추가 투자하겠답니다.”
“100억?”
예상치 못한 액수에 탁시준이 눈을 껌뻑거렸다.
안 그래도 ‘낭만 고양이’는 고양이 CG 때문에 제법 많은 돈이 필요했다.
협상했던 액수의 족히 2배는 되는 금액이었다.
“걔네, 오디세이 2도 투자한다고 하지 않았어?”
“오디세이 2만큼 저희 드라마에도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에요. 최근 베일릭스에 ‘그림자 무사’가 업로드됐는데. 그게 세계랭킹 7위까지 올라가서 태주 씨가 꽤 인기를 끌고 있거든요.”
“그래?”
탁시준은 재빨리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베일릭스 한국 랭킹 1위, 세계랭킹 7위에 당당히 자리한 영화 ‘그림자 무사’가 보였다.
그리고 작긴 하지만 표지의 중앙에 있는 한태주도.
* * *
얼마 후.
태주를 헬스장에 떨궈주고 온 차용석이 본부장실로 등장했다.
“부르셨습니까.”
“왔어? 앉아봐.”
탁시준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차용석을 보며 물었다.
“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다른 게 아니라. 좀 전에 태주가 ‘낭만 고양이’ 프리퀄 웹툰 대사 몇 개 녹음하고 왔잖아요. 그런데 어찌나 대사들을 잘 살리던지,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하여튼 한태주 바라기야. 푹 빠진 게 꼭 마누라 같기도 하고.”
차용석은 그 소리에 더욱 크게 웃었다.
“하하. 한태주 마누라, 나쁘지 않은걸요?”
“근데 차 팀장, 베일릭스에 ‘그림자 무사’ 랭킹 1위로 올라가 있는 건 알고 있었어?”
“2일 전부터 1위로 랭크되어 있는 거 확인했습니다.”
“그 영화, 강재하가 주연이잖아. 그런데 수혜는 왜 한태주가 제일 크게 입었을까? 지금 인터넷 커뮤니티 반응도 강재하보다는 한태주가 더 크더라고.”
탁시준은 턱을 괴고 차용석을 빤히 응시했다.
“아무래도 태주가 연기한 ‘성계훈’ 역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평생을 바쳐 왕비를 지켰고, 목숨으로 그녀를 살린 서사가 매력적이었죠. 그리고 자객들과 맞서 싸운 그 씬, 정말 환상적이었지 않습니까.”
“그 씬에 반한 남자들도 여럿 있었지.”
“저도 그중 하나고요. 아무튼, 베일릭스에 업로드되니 국내에서 개봉할 때와는 또 다른 반향이 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태주 인스타 계정을 개설할까, 고민 중입니다. 국내외 팬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회사 계정으로 올리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요.”
“그래, 개인 계정을 파는 게 좋을 것 같네. 관리는 차 팀장이 하고. 그나저나, 이것 좀 봐봐.”
탁시준은 옆에 있던 얇은 파일을 차용석에게 건네주었다.
빠르게 파일을 살피던 차용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구르트 광고, 주스 광고, 운동화 광고……. 와, 정말 많이 들어왔네요.”
“한태주가 매력적인 모델이긴 하지. 아역 시절이랑 음방 출연 덕분에 전 연령층에게 인지도가 높고, ‘당누봄’에서 젊고 싱그러운 첫사랑 이미지도 얻었으니까.”
파일을 뒤적거리던 차용석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본부장님, 이거 핸드폰 광고는 백시영이 하는 거였잖아요. 잘못 끼워 넣으신 것 아닙니까?”
“아니야, 그거 한태주한테 들어 온 거 맞아.”
“예?”
“대표님도 컨펌한 거니까, 열심히 해봐.”
차용석은 눈을 크게 뜨고 제안서를 확인했다.
자세히 읽어보니 태주에게 온 게 맞았다.
당대 최고의 스타들만 쓴다던 베리폰 광고.
지난 2년간 백시영이 맡았던 광고였는데, 이제 태주에게 그 기회가 왔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잔뜩 흥분한 차용석은 냉큼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태주하고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차용석을 보던 탁시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집안싸움을 할 줄은 알았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빠를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처음에는 광고지만, 그다음에는 영화, 드라마로 번지겠지.
이렇게 된 이상, 그는 한태주의 성장에 큰 기대를 걸기로 했다.
그가 얼마나 가파르게, 얼마나 높게 성장할지.
* * *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았다는 소식이 백시영의 귀에 들어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