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98
98화
과거와 현재, 만나다 (7)
“희재 형!”
영화 촬영이 끝나자마자 바로 대표실로 직행한 백시영.
서류를 보던 장희재는 씩씩거리는 백시영을 마주했다.
“뭐야, 영화 찍는다더니 왜 미친개가 됐어?”
“내가 지금 미치지 않게 생겼어?”
백시영이 일전에 들은 소식을 복기했다.
“베리폰 광고 한태주한테 갔다며. 어떻게 된 거야, 그거!”
장희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 계약 기간 끝났잖아. 그러니까 베리폰이 새로운 모델을 찾은 거지. 순리대로 돌아갔는데 뭐가 문제야?”
“형, 정말 왜 이래. 내가 그거 재계약하게 도와달라고 했잖아. 근데 나 버리고 한태주 민 건 아니지?”
“시영아. 너 여자 없이 못 사는 그 버릇, 도대체 언제 고치려고 그러냐.”
장희재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놓았다.
렌즈 뒤에 숨겨졌던 매서운 눈빛이 백시영을 마주했다.
“예전엔 LX그룹 장녀하고 놀더니, 이제는 입맛이 달라졌어? 재벌가 장녀에서 만만한 술집 여자들로?”
“형, 왜 이래”
“너 요즘 소문이 아주 화려하던데. 밤에 강남 가면 십중팔구 너 볼 수 있다고. 그 옆에 남도경도 있다고 했던가? 내가 걔랑 어울리지 말라고 했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거기 가면 너하고 잔 얘들만 한 트럭이야. 너 그런 쪽으로 전문인 건 알겠는데 엔간히 해야지. 이 바닥에서 매장당하는 거 순식간이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백시영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형. 걔네,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애들이 뭉치면 무서운 거 몰라?”
“그렇다고 내 광고를 한태주한테 넘겨?”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보다는 깨끗한 애가 낫잖아?”
장희재와 백시영의 팽팽한 눈빛이 서로 맞섰다.
먼저 꼬리를 내린 건 백시영이었다.
“형, 그러지 말고 나 좀 도와줘.”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너 연기에만 집중하라고. 이번에 최준모 영화 개봉할 때까지는 영화만 찍어.”
“하, 재미없게 진짜!”
“고윤하한테도 베드신 이외에는 집적대지 말고. 또 이상한 소문 퍼지기만 해 봐.”
“알았어, 알았어.”
투덜거리던 백시영이 입을 쭉 내밀었다.
“그래도 한태주한테 그게 넘어간 건 화나는데. 그 새끼, 진짜 싸가지 없다고.”
“너, 걔랑 사이좋은 거 아니었어? 노블 화보에서 너희 둘, 사이좋게 이야기 나눴다고 그러던데.”
“그거 다 쇼였지. 그 새끼, 보통이 아니야. 하늘 같은 대선배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말이야.”
그의 말을 듣던 장 대표의 입가가 만족스러움으로 씰룩거렸다.
“그런 깡도 없으면 연예계에서 어떻게 버티냐. 그리고 너도 한심하다. 데뷔 20년 차가 신인이나 다름없는 애랑 각을 세우냐? 모양 빠지게. 나 같으면 걔를 내 방식으로 길들이고도 남았겠다.”
“형, 끝까지!”
“시영아, 나 한태주 잘 키워볼 생각이다. 그러니까 걔 건드리지 마. 지금 걔한테 걸린 프로젝트만 수십 개가 넘어. 황금알을 품은 거위라고.”
장희재가 정색하고 내뱉은 말에 백시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 이제 곧 재계약 기간이야, 장 대표. 이렇게 나오면 딴 데로 가는 수가 있어.”
“그럼 우리도 터뜨릴 게 많지.”
“나 같은 금맥을 잃을 수 있겠어?”
“너야말로 나 같은 방패가 없어도 되겠냐?”
잠시 뜸을 들이던 장희재가 피식거렸다.
“이참에 그 건도 폭로해줘? 너 유명세 좋아하잖아. 화제에 오르는 것도 좋아하고. 분명, 언론이 좋다고 달려들 거야.”
“형,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중협이 말이야.”
장희재가 백시영에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너 수정이 두고 중협이하고 말 많았잖냐.”
* * *
백시영은 반박을 하지 못한 채 대표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무척 분하다는 듯 씩씩거렸다.
쾅!
벽에 주먹을 치며 그가 이를 갈았다.
“장 대표 저거. 뒤통수칠 궁리만 하고 있다, 이거지.”
처음에는 좋은 형 동생 사이로 시작한 매니저 관계.
하지만 지금은 서로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백시영이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이중협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헛소리를 지껄여.”
마음속 깊이 숨겨둔 기억들이 스멀스멀 흘러나오자, 백시영은 입술을 콱 깨물었다.
느껴지는 고통보다도 불안감이 그를 잠식했다.
“그래도 그 인간이 날 버릴 리 없어. 아니, 못 버리지. 나도 쥐고 있는 게 있으니.”
백시영은 장 대표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둘은 회사의 시작을 함께하며 좋은 꼴, 못 볼 꼴을 다 공유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부유하던 생각은 곧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죽어서도 날 괴롭히냐, 이중협.”
분노에 찬 백시영은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난 너처럼 무너지지 않아, 절대로.”
* * *
스타뉴스의 우성림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썼던 기사를 확인하고, 수정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기다림에 지친 홍은지가 그에게 돌진했다.
“이제, 기사 다 쓰지 않았어?”
“선배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지금 공들이는 중이라서요.”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한 지 벌써 3시간이 넘었어! 너 지금 종일 이것만 붙잡고 있잖아!”
“선배가 이해해주세요. 제가 애정하는 한태주 기사인데 어떻게 대충 쓸 수 있겠어요.”
우성림은 흥분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 진짜 이건 센세이셔널이라고요. 베리폰 모델이면 요즘 트렌드의 척도인데, 역시 한태주. 이제는 베리폰의 선택마저 받다니!”
결국, 조금 더 기다린 후 기사를 받은 홍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썼네. 이대로 작업해서 올려. 아, 그리고 내일 ABS 대본 리딩은 네가 다녀와라.”
“ABS 대본 리딩이요?”
“내일 ‘낭만 고양이’ 대본 리딩 있거든.”
우성림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기대되는 한편 우려도 되네요. 한태주랑 윤수안 연기는 별로 걱정이 안 되는데, 솔직히 아이돌 연기는…….”
“저번에 당누봄에 하강웅이랑 설채빈 캐스팅됐을 때도 사람들이 똑같은 소리 했었어.”
홍은지는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그리고 한태주가 선택한 대본이잖아. 웬만큼 재밌으니까 이걸 택하지 않았겠어?”
* * *
다음 날.
ABS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대본 리딩을 하고 있다.
당사의 내년 상반기 최고의 기대작, ‘낭만 고양이’였다.
한데 모인 피디와 작가, 그리고 배우들은 장장 6시간의 리딩을 진행 중이다.
ABS의 기대작인 만큼 리딩장에는 수 대의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현장에 있던 모두가 숨죽여 배우들의 연기를 관찰했다.
처음 연기한다던 레이븐의 승현, 퀸즈의 시율은 생각보다 연기를 잘했다.
아마 그들의 연기가 안정된 건, 그들을 이끄는 두 명의 베테랑 덕분일 거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그들을 담았다.
한태주와 윤수안이었다.
‘그림자 무사’에서는 안타깝게 헤어졌고, ‘당누봄’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그들은 드디어 이곳에서 커플로 처음 만났다.
태주는 그동안 보여준 강인한 무사, 츤데레 등의 모습에서 벗어나 다정하고 귀여운 고영민을 연기했다.
데뷔 이후 늘 제 나이보다 나이 많은 역할만을 맡았던 윤수안은 처음으로 학생 역할을 연기했다.
한태주와 윤수안은 척하면 척, 감정이 실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분명 리딩인데 그들만 보면 촬영에 들어간 듯한 착각도 들었다.
김유경 작가는 속으로 박수를 치며 선화철 피디에게 속삭였다.
“너무 만족스럽네요, 저 두 분 연기. 대본에서 바로 고영민과 황지나가 튀어나온 것 같아요.”
“저 둘이 극의 중심을 잘 잡으니 다른 배우들도 흔들리지 않고 잘 녹아드네요.”
“다들 기대했던 것만큼이나 케미도 좋고요.”
긴 리딩 끝에 드디어 하이라이트만이 남았다.
고영민이 고양이에서 사람이 되는 장면으로. 인간으로 변한 그가 길가에서 죽은 자기 어미를 끌어안고 우는 장면이었다.
“자, 그럼 이번에는 씬 8-1. 고영민이 인간으로 변하는 부분이죠. 어미의 희생으로 고영민은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났지만, 그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죽은 어미 고양이의 사체를 끌어안고 우는 장면.”
태주는 재빨리 대본을 넘겼다.
그 부분만큼은 셀 수 없는 메모가 적혀져 있었다.
일전에 이 장면을 연습할 때, 어미 고양이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그였다.
고양이의 행동, 버릇, 그리고 감정 표현 등등.
태주가 눈을 감자 파르르 떨렸다.
그런 태주를 이중협이 유심히 바라봤다.
지금 태주는 긴장한 게 아니라 연기 연습을 복기 중이라는 걸 안다.
여기서 그가 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태주가 좋은 연기를 할 것이라 믿는 것밖에는.
모두가 태주를 바라보고 있다.
이번 씬은 태주의 원맨쇼나 다름없었고, 드라마의 초반부에서 제일 중요한 씬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 * *
리딩장 안에는 태주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평소보다 좀 더 목소리를 가늘게 내는 듯했다.
평소의 낮은 목소리와는 달리 높은 목소리는 애절하고도 다정했다.
“엄마, 일어나 봐. 나 인간이 됐어. 고양이가 아니라 인간이 됐단 말야. 그러니까 엄마를 병원에 데려갈 수 있어, 좀만 참아.”
모두가 숨을 참고 태주를 바라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매가 축 늘어졌고, 머리카락도, 귀도 모두 아래로 쳐진 느낌이 들었다.
분명 보이는 모습은 인간이었지만, 얼핏 슬픔에 젖은 고양이가 보이는 듯했다.
“엄마, 제발…… 숨 좀 쉬어.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엄마가 없는 세상을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제발 엄마……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방 안 가득히 애달픈 목소리가 울려 퍼지던 순간.
감정에 동화된 여러 사람이 눈을 하늘로 치켜떴다.
“나 왜 이러냐, 왜 저렇게 슬퍼.”
“한태주가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하기는 하네.”
“외모, 스타성, 뭐 그런 것도 중요하지. 근데 한태주를 보니까 알겠다. 역시 배우는 연기를 잘해야 한다니까.”
팽, 하고 코를 푸는 소리도 곳곳에서 조용히 들렸다.
대본을 함께 넘기던 윤수안도 훌쩍거렸다.
그리고 회의실 뒷문을 살짝 열어 리딩을 지켜보던 편준규 CP도.
끼익.
그는 회의실을 조용히 빠져나와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오랜 시간 몰래 훔쳐보느라 다리가 저렸지만, 태주의 연기에 몰입해 미처 느낄 새가 없었다.
“뭐냐, 진짜로. 연기를 정말 잘하잖아.”
이 정도면 ‘오디세이 2’와 정면으로 붙어도 해볼 만할 것 같다.
안종현과 한태주의 연기 대결도 승산이 있어 보였다.
보는 사람의 마음에 감정의 파도를 일게 하는 한태주면, 더더욱.
편 CP는 국장실로 곧장 향했다.
“국장님, 이번에 일 날 것 같습니다.”
“또 혼자 호들갑 떤다. 그러다 나중에 결과 안 나오면 질질 짤 거면서.”
“정말입니다. 신 피디만 잘 받쳐주면 이번 드라마, 대박 날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그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국장에게 선언했다.
“저희 본방 전주 금요일에 편성 좀 내주십시오. 배우들 메이킹하고 비하인드 집대성해서 스페셜 방송으로 내보내게요.”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