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dam fort RAW novel - Chapter (33)
33. 기다림
쿠구구구구. 크르르르르.
요신을 잃은 화산이 울고 있다. 그녀는 버려진 대지 위에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그 안에 알을 품듯 자신의 궁을 만들었다.
언젠가 자신을 찾아 줄 연인을 위해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소리 없이 다가선 시간은 바람이 되어, 혹은 비가 되어 주인을 잃은 둥지를 갉아먹었다.
쿠르르르르. 드드드.
남쪽으로 가장 큰 산맥의 기둥을 이루었던 화산이 그 끝에서부터 먼지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두 개의 결계를 지키던 야차가 감았던 눈을 떴다.
‘시작되는 것인가.’
염화를 잃어버린 그는 몰려오는 수마와 굶주림에 야위어 있었다. 얼굴을 덮은 수염과 움푹 꺼진 눈, 광대뼈 아래 드러난 그림자는 태무신 야차가 인간으로 돌아왔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처컥. 처컥, 처컥.
천 근 무게의 갑옷을 두른 채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 온 야차가 무릎을 낮춰 대리석 바닥으로 손을 댄다.
한없이 약해져 가는 지력이 느껴졌다.
‘미안하구나.’
야차의 마음이 느껴졌는지 몸을 떨며 괴로워하던 화산이 잠잠해졌다.
백원후의 죽음 이후 마흔하루가 지났다.
원천을 잃은 샘물이 말라붙고, 빛을 잃은 꽃은 시들어 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며 순환의 법칙이다. 그럼에도 화산은 요신의 사랑을 기억하며 버티고 있었다.
두 개의 결계를 지키는 야차처럼.
요신의 흔적을 지키려 애쓰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야차의 시선이 명의 결계 아래 잠든 요신에게로 향했다. 뚫린 가슴 속으로 반짝이는 보석이 보였다.
‘쉬이 떠나갈 수 없을 것이라.’
마지막 선물이라며 야차에게 건넨 반쪽짜리 심장은 여전히 그녀의 가슴 속에 머물러 있다. 영원을 살아가는 강인한 생명이건만, 제자리로 돌아간 심장은 철저하게 그녀의 의지에 따라 숨쉬기를 거부했다.
‘미련이라 하는 것이다. 그대가 아직 떠날 수 없는 그 이유 말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을 백원후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보석을 담는 아름다운 궤가 되어 도자기 인형처럼 누워 있다.
“백원후…. 그대는 제천대성의 순혈. 나는. 그대의 소멸을 믿지 않는다.”
야차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요신의 보살핌에서 벗어난 화산은 인계의 시간 앞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간힘 쓰며 버티던 화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데는 일흔닷새가 걸렸다. 요신의 손이 닿기 이전으로 돌아간 화산의 자리는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초원이 펼쳐졌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요.”
그의 곁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반야는 어느새 문조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구나.”
“이랑군은 어디로 간 걸까요?”
이랑군이 사라진 뒤 나타난 반야는 그의 부제를 아쉬워했다. 늘 토닥거리며 싸우기만 했던 것 같은데.
“어디에 있든 다시 만날 날이 있지 않겠느냐.”
“췟! 인사도 없이 가 버렸는데, 누가 다시 만나 준다나?”
“후후후, 한데 너는 왜 다시 문조로 변하였느냐.”
“남이야, 문조로 변하든 타조로 변하든, 무슨 상관이래.”
“후후후후.”
주둥이를 삐죽거리는 것이 여울을 꼭 닮았다.
“인간이 되었다더니 이제는 웃기도 하네요.”
“후후후후.”
“백원후 님의 눈물을 삼키고 수명을 연장했지만, 먹이를 먹지 않으면 기력이 떨어져요.”
“가서 먹이를 찾으려무나.”
“됐어요. 그냥 기다릴래요.”
반야는 처음 여울을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내가 처음 눈 떴을 때 커다란 눈동자가 날 보고 있었어요. 내 얼굴이 고대로 보이는 그 까만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어. 새까만 눈동자에 비치던 그 못난이가 나인 줄은 한참 뒤에나 알았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면 알려 주마.”
“아, 됐다니까요.”
“고집이 꼭 그녀를 닮았다.”
“고마워요.”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반야가 함께인지라 기다림도 그리 나쁘지 않다.
야차의 생각은 다시 백원후에게로 흐른다. 명과 여울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고, 반야에게는 요력을 나누어 주고…. 야차에게는 염라와의 거래를 위해 반쪽밖에 남지 않은 심장을 건넸다.
‘이기적이고 잔혹했던 요신은 누구였을까.’
여든하루 되는 날.
수정궁의 외벽에 균열이 생겼다. 모두 떠나갔으리라 생각하였던 식신들이 하나둘씩 애화랑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육백을 넘어선다.
“너희의 주인은 이제 이곳에 없으니 다른 주인을 찾아 떠나거라.”
식신들은 고개를 저으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어서 가! 너희들은 나랑 다르다고. 꼭 요신이 아니어도 상급 요괴를 찾아가. 응?”
반야의 설득에도 식신들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어휴! 바보들 같으니라고.”
식신들은 화묘도 죽고 없는 청동화로에 둘러앉아 얼마 남지 않은 서로의 기운을 나누고 있었다.
‘주인 잃은 식신들은 그 생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나서기 마련인 것을….’
그들이 백원후의 요기가 서린 결계를 찾아든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야차의 가슴은 또다시 일렁인다.
‘그녀의 보살핌이 그리도 지극하였더냐.’
수정궁의 외벽이 사라지고 하늘이 열렸다. 아름다운 보석이 달렸던 수려한 나무도 자수정 벽을 타고 흐르던 물도 말라 버렸다.
“그림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반야의 말처럼 요신의 생을 담은 목간의 그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식신들도 하나둘씩 스러져 가기 시작했다.
“흐어어엉! 진작에 다른 주인 찾아가라니까!”
반야가 운다. 제 주인 닮아 정이 많은 반야는 끝도 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잘 가. 흐엉엉! 다음에는 엉엉! 식신 하지 말고 예쁜 새로 태어나서 자유롭게 살아, 응?”
낮에는 민들레 꽃씨처럼, 밤에는 반딧불처럼 사흘 낮밤을 이어 날아오른다.
만 년에 달하는 요신의 역사는 찬란하여 아름다웠다.
요신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 요신으로 태어난 순혈.
요신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던 백원후였다. 그 역사가 사라지는 데에는 백 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야차의 몸에 남아 있던 염화의 기운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배고픔과 잠들지 못하는 고단함보다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역시나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었다.
‘더 이상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염화를 잃은 야차의 손이 닿아도 뿌옇게 얼어붙은 결계는 투명해지지 않았다. 안에 잠든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미치게 했다.
“아직도 백 일….”
지쳐 쓰러진 반야를 억지로 날려 보내고 얼마 있지 않아 지축이 울리기 시작했다.
콰르르르. 콰르르르르.
화로가 있던 자리의 땅이 움푹 꺼져 들어간다. 자욱한 흙먼지에 싸여 땅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열락이었다.
한걸음에 달려오는 열락을 야차가 막아섰다. 그의 시선은 백원후에게 화살처럼 박혀 있었다. 그녀와 열락의 사이가 각별했던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염라가 보냈더냐.”
묵에서 야차로 각성하며 그의 산을 부숴 버린 뒤, 열락은 마계로 돌아갔다.
“주군!”
그 또한 삼천 년의 인연을 이어 온 야차의 또 다른 벗이었다. 율국의 중랑장으로 북국대전을 함께하고 마계까지 그를 따라온 열락이었다.
“어찌하여 저의 앞길을 막으십니까.”
나지막한 그의 음성에서 익숙한 기운이 묻어난다. 원망.
“이제 같은 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열락은. 호국선을 위해 청운제를 시해하고, 원수를 갚기 위해 다시 천명제를 죽였습니다.”
“나를 따라 마계에 들어 파천왕의 칭호를 받고 인요대전이 끝나기까지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켰음을 알고 있다.”
“한데, 어찌하여 저를 막아서십니까.”
“너의 주군은 누구더냐.”
각성 이후 열락은 밀궁에 드는 대신 마계로 돌아갔다. 그때에 이미 길은 나뉘어 버린 것이다.
“네가 열고 온 그 문 뒤에 나의 적이 있다.”
“주군!”
“나는 더 이상 너의 주군이 아니니 돌아가라.”
깨끗하게 베어지는 인연은 단 하나도 없다. 그것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무장이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그녀의 심장을 가져가야 합니다.”
“심장의 주인은 따로 있다.”
“하나….”
“나는 염라에게 그녀의 소멸을 약조하였다.”
“하여 그 증거를 가지러 왔습니다.”
“염라에게 전하라. 증거를 건넬 것이라 약조한 적은 없노라고.”
염라대왕이 그에게 하였던 그대로 야차는 염화를 대가로 했던 약조를 읊어 주었다.
“삼천 년 전 말장난에 놀아났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덧붙여 전해 주면 고마울 듯하구나.”
홀로 백원후를 마음에 담았던 열락은 야차의 뒤로 보이는 그녀에게 흐르는 시선을 멈출 수 없었다.
“심장의 주인이 황제라 생각하십니까.”
“그녀가 선택한 정인이다.”
“황제는 그녀를 버렸습니다. 그녀의 심장을 제게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염라가 네게 무엇을 약조하였더냐.”
“그녀를 제게 주겠노라 하였습니다.”
“어리석구나. 염라에게 속아 염화를 삼켰던 나를 잊은 것이냐.”
야차의 꾸짖음에 열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염라가 바랐던 것은 그녀의 소멸이었다. 한데 네게 그녀를 주겠다? 믿고 싶겠지. 그리도 가지고 싶어 하였던 외사랑이니. 하나 다시 깨어난다 한들 그녀가 널 용서하리라 생각하는가.”
“그녀를 데려가고 싶습니다.”
단 한 번도 그의 명을 거역한 적 없던 열락이 고집을 부린다. 그 또한 예전의 열락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돌•아•가•라•.”
“주군!”
“그녀의 심장이 염라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너는 진정한 지옥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천화를 잃은 주군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지켜본 열락은 야차의 마지막 말에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한 번만 그녀를 보게 해 주십시오.”
“불허한다.”
그 누구도 욕심낼 수 없는 여인이었기에 그 선택 또한 존중되어야 했다. 단 하나의 사랑을 위해 생의 전부를 태워 버린 요신이었기에.
“돌아가라.”
마지막 경고에 열락이 몸을 일으켰다.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는 마계, 그곳에는 더 이상 섬겨야 할 주군도 지켜야 할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둠의 계단을 내려서는 그의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다.
열락이 떠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야차의 귀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요신의 죽음 이후 꼭 백 일째 되는 날이었다. 바람 소리와도 같고 공허한 산울림과도 같다.
“그, 곳, 에 있는가.”
떨리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답을 요구했다.
“요신이여. 물음에 답하라.”
“아직… 그곳에 있는가.”
“나를, 이리 가두어 둔 연유가 무엇인가.”
“나의 벗은 아직도 피 흘린 채 서 있는가.”
“그, 아이는 어찌 되었는가.”
소리의 원천을 따라 야차가 명의 결계에 손을 댔다.
“그대는 누구인가.”
“깨어나는 것인가.”
야차의 물음에 더욱 또렷해진 음성이 대답한다.
“누구인지 물었다. 답하라.”
“그대는 나의 손에 죽었다.”
단단한 장벽 너머 침묵이 흘렀다.
“야차인가. 아니면…. 나의 벗인가.”
물음 속에 묻어나는 망설임.
명이 얼마나 오랫동안 잃어버린 벗을 기다려 왔는지 야차는 알고 있었다.
“답하라. 누구인가.”
‘한검’이라 불렸던 벗의 재촉에 야차는 비로소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뱉어 낸다.
“나는, 율국 현가의 장자 묵, 이다.”
파르르르르. 파르르르.
들썩이는 결계는 이내 빛을 잃고 옅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명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명은 눈을 감은 채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명….”
부름에 응답하듯 그의 눈이 열렸다.
두 손을 뻗어 올린 명이 하늘과 땅을 아울러 팔을 펴자 결계는 그 위에서부터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명의 눈동자가 하늘 아래 너른 초원을 둘러본다.
“결국, 이리되었구나.”
묵묵히 서 있는 야차에게 향했던 명의 시선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백원후에게로 옮겨 갔다.
‘백원후! 설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명이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떨리는 손은 그녀에게로 향했으나 차마 닿을 수 없어 움츠린다.
“너의 시간들을 보았다.”
순혈이기에 받아야 했던 지독한 시기와 질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외로이 견디어 냈는지.
“미안하다. 나를,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보석같이 반짝이던 눈동자를 가진 하얀 원숭이가 황자의 눈에 얼마나, 얼마나 어여뻤는지.
“미안하다. 내 욕심으로 너를 거두지 않았더라면….”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율국 황자의 품 안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아름답게 피어났는지.
“미안하다. 미안하다.”
명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아야 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하여도 아픈 기억들은 그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그리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던 너를… 보•았•다•.”
처음으로 받아 본 그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음이라.
끊임없이 그에게로 향하던 백원후의 시간들이 명의 혈관 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었다.
“가자. 나와 함께 가자.”
그녀를 안으려 손을 뻗은 명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에에에에에!”
명의 손길이 닿은 요신의 몸이 부서진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요신의 사랑은 죽어서도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던가 보다. 그의 손길에 그녀의 사랑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설아아아아!”
아무리 움켜쥐어도 머리카락 한 줌 잡을 수가 없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가지 마아아아아!”
제비꽃색의 눈동자와 꼭 같은 반쪽짜리 심장만을 남긴 채 요신은 영영 사라져 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악!”
굳어 버린 그녀의 심장을 움켜쥔 명이 엎드려 울부짖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긴 세월 철저하게 외면하여 돌아섰던 연인의 죽음이, 파도와 같은 상실감이 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그 처절한 통곡에 야차가 명의 몸을 감싼다.
“으어어억, 설아아아아아.”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순혈이기 때문에 배척당해야 했던 그녀의 삶은 율국의 황자로 살아온 명의 삶과 쌍생아처럼 닮아 있었다.
‘너무나도 외롭고 고단한 삶이었다. 단 하루도 편히 잠들 수 없는, 사는 것이 지옥과도 같은 그런 나날들이었다. 그 벼랑 끝에서 너를 만났다. 내 삶의 보상이라 그리 여기었다.’
요신과 황자는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고 속절없이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요신은 그에게 대륙을 선물하였으나 황자의 사랑은 지독하게도 이기적이었다.
인간의 삶을 모르는 그녀는 황제의 누이를 질투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하여 그 대가로 버림받았다.
“결국에 내가 너를… 죽였구나, 나의 사랑아.”
피를 토하며 울부짖던 명의 몸이 잠잠해졌다.
“나의 잣대로 그녀의 사랑을 판단하고, 버렸다. 천화를 잃은 호국선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보면서도. 나는, 너만은 괜찮으리라 생각하였다. 율국의 황자는 얼마나 잔인하였던가. 또 얼마나 교만하였던가.”
야차의 팔을 밀어낸 명이 몸을 일으켰다.
“순혈이란 이유만으로 그녀를 배척하던 이들과 내가 어찌 다르다 할까.”
“아니! 달라! 분명히 다르다. 그 다름이 요신으로 하여금 그대를 선택하게 하였고, 더없이 사랑토록 하였다.”
명은 그에게로 다가서는 야차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더없이 슬픈 표정으로 명이 웃는다.
“내 사랑은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후후후, 너희에게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 구걸하면서도 나는 내가 가진 가장 값진 것을 끝까지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명….”
“천형이 끝나면, 그녀에게 돌아가려 하였는데. 이렇게 돌아갈 곳을 잃고 말았구나.”
상실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에 야차는 차마 미안한 마음을 건넬 수 없다. 야차는 백원후의 심장을 움켜쥔 명의 손을 잡아 그의 가슴에 댔다.
“그녀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아.”
“나는,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명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요신의 심장이 두 사나이의 가슴에 칼처럼 박혀 들었다.
“그녀의 조부를 찾아가.”
제천대성이라면 그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길을 보여 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한다.
“멀고 험한 길이다. 이생에서는 다다를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가 기다린 삼천 년보다 아득하지 않을 걸세.”
“묵….”
“절망을 넘어서는 그리움이라면 천계라 하여 들지 못할 리 없어.”
인간의 몸으로 오신산을 넘고 상사천으로 건너야 할 벗에게 야차는 그가 가진 마지막 선물을 건넸다.
“이리하지 않아도 돼. 무장이 군마를 넘기다니.”
“데려가게. 검이 있다면 그것을 내어 주겠네마는. 가지고 있던 설창은 빙요가 다시 가져가 버렸다네.”
“후후후, 무기도, 군마도 없이 어찌 살려는가.”
명의 물음에 야차는 요괴를 잡으러 다니자던 여울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글쎄. 그녀가 깨어나면 요괴나 잡으러 다닐까, 하는데.”
“전쟁의 신에서 요괴 사냥꾼이라. 후후후, 나쁘지 않네그려.”
“어서 가 보게. 갈 길이 멀어.”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용마였다. 요신의 생명을 나눈 명이니 세찬 바람도 견디어 낼 수 있으리라.
“용마야, 나의 벗을 부탁한다. 그를 희망으로 인도해 다오.”
히이이이이잉. 푸드드. 푸드득!
밤하늘을 끊어다 놓은 듯 흙빛 갈기를 찰랑이던 용마가 콧김을 뿜으며 앞발을 굴렀다.
“그녀는… 보지 않고 가려는가.”
“삼천 년 전에도, 지금도 그 아이만큼 강인한 여인을 보지 못했어. 이대로도 좋지 않을까?”
명의 시선이 여울이 잠들어 있는 결계로 향했다.
“후후후, 그녀가 깨어나면 전해 주게. 이 오라비는 아름다운 요신과 행복하게 살고 있노라고.”
“명….”
“형제여, 잊지 말아. 우리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생은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떠나간 자리에 야차는 다시 홀로 남았다.
‘도대체 반야는 어디로 간 걸까.’
배를 채워 오라 달래어 보냈더니 영영 돌아올 생각을 않으니 야차는 새삼 반야의 안부가 걱정되었다.
‘설마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또다시 하루가 지나자 어둠 속에서 기묘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화라사.”
불을 밝힌 야차는 저도 모르게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거대한 회색빛 새 한 마리가 뒤뚱거리며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쌕, 쌕, 쌔애액, 쌔액.
여섯 척이 넘는 크기의 새는 엄청난 머리통과 한 자에 가까운 부리를 가지고 있었다. 넓적한 부리는 둘째 치고 큰 머리통과는 진심으로 어울리지 않는 콩알만 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린다.
쌔액, 쌔액, 쌔애액.
터질 것 같은 몸통에 역시나 어울리지 않는 길쭉한 다리로 주저앉을 듯 쉬지 않고 다가왔다.
‘요괴도 아닌데 무얼까.’
새가 분명함에도 새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명체에서 낯설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설마…. 반야?’
“쌔액, 헤에에. 아우, 힘들어.”
“도대체 네 몸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여울은 아직이지?”
엄청나게 못생긴 얼굴을 들어 반야가 결계를 쳐다봤다. 코딱지만 한 눈으로 보이기나 한 걸까?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너의 형상이 참으로 기괴하다. 도대체 무엇으로 변한 것이냐.”
“넓적부리 황새.”
“무어라?”
“문조는 몸이 너무 작아서 배를 많이 채워 올 수가 없어.”
“하여 황새로 변하였다?”
“응. 머리 좋지?”
“한데, 왜 하필이면….”
“나도 극락조나 천둥새 같은 걸로 변하면 좋지. 한데 신수로 변하고 나면 더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고. 왜? 그렇게 보기 흉해?”
“삼천 년 동안 이렇게 못생긴 새는 처음이로구나.”
“흥! 사내들이란!”
두 다리를 뻗고 야차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반야는 부푼 배를 감당하지 못해 벌러덩 자빠졌다.
“이런, 우라질!”
버둥거리며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반야의 모습에 야차가 머리를 잡아 앉혔다. 머리통의 무게가 혼례를 올리던 여울의 것과 비슷하다.
“답답하구나. 차라리 뱀으로 변하지 그러했느냐.”
“여기까지 기어 오라고?”
“얼마나 먹었기에 이리 오래 걸렸느냐.”
“헤헤헤, 혼자 적적했나 보지?”
말하는 본새하고는.
“우선 제일 가까운 초산에 가서 꽃뱀 다섯 마리를 삼켰어. 참! 한 마리 뱉어 줄까?”
“쿨럭, 쓸데없는 소리.”
“배가 덜 고팠군.”
“뱀 다섯 마리 삼키는 데 이리 오래 걸린 것이더냐.”
“아니. 뱀 다음에 연어 세 마리, 개구리 네 마리, 구렁이 한 마리, 메뚜기 스물네 마리….”
배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나열하는 반야의 목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운 좋게 홍게도 잡았지. 헤헤헤. 그 다음엔 갯지렁이 열한 마리, 땅강아지 두 마리, 거미 한 마리….”
천계와 인계 마계를 통틀어 가장 못생긴 새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야차가 턱을 괴었던 손에 얼굴을 묻는다.
‘괜한 것을 물었구나.’
반야의 만행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소화가 되어 위가 줄어들 때마다 범상치 않은 존재들로 둔갑을 하였다.
하루는 뱀으로 변하여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에 야차는 저도 모르게 목을 베어 버릴 뻔하였다.
“이렇게 바꿔 줘야 불필요한 소모를 줄일 수 있어.”
또 다른 날은 이름도 모르는 생명체가 되어 염화의 결계를 녹이겠노라 전체를 감싸 안았다.
‘염화가 새로운 주인을 보호하고 있구나. 꺼지지 않은 불꽃을 담을 수 있도록.’
고집을 부리던 반야가 얼어붙은 낙엽처럼 떨어져 내리는 데는 일다경도 걸리지 않았다.
이튿날은 부숴 버리겠다며 부리에 피가 날 정도로 쪼아 대더니 닷새 넘게 입을 다물고 있다.
“듣고 있느냐, 여울아. 며칠 전 반야가 입을 다쳐 오늘까지도 고요하니 인계에 평화가 찾아온 듯하구나.”
반야가 온갖 부산을 떠는 사이에도 야차는 결계 안의 여울에게 대화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날이 참으로 좋다. 너와 함께 거닐던 벚나무 아래 정경이 더욱 그리워지는 날이다.”
대답은 없었으나 야차는 어서 빨리 돌아오란 말을 잊지 않는다. 또한 그녀가 약속한 이백 일을 세어 가며 그 연유를 생각한다.
‘어째서 이백 일이어야 하는 걸까.’
“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결계에 손을 얹고 있던 야차의 시선이 반야에게 향했다.
“이백 일이라 하였다.”
“아직 마흔엿새 더 남았네.”
손가락을 꼽아 세고 또 세던 반야가 그 셈이 틀리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일곱 달에서 열흘 빠지네.”
“왜 백 일도, 삼백 일도 아닌 이백 일이어야 할까.”
“모르지. 워낙 엉뚱한 위인이니까.”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듯한데.”
“일곱 달, 일곱 달…. 맞다! 구주 제일상단의 여식이 일곱 달 만에 아이를 낳았지! 그런데 그게.”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야차가 결계를 응시했다.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고 싶어.”
“아들입니다.”
“떠나 버린 그 아이가 다시 온 거랍니다.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게요.”
돌처럼 굳어 있는 야차에게 다가선 반야가 기절할 듯 놀라며 그에게서 물러섰다.
“설마! 당신 귀신이야? 사부님이 죽던 그날 같이 죽은 거야? 그런 거야? 그래서 귀신으로 나타나 여울을 꼬드긴 거였어?”
달려간 야차가 하얗게 얼어붙은 결계를 두드렸다.
‘어째서. 어째서 깨닫지 못한 것인가!’
“여울아! 말해 봐! 아이를 가진 것이냐!”
두 주먹이 터져 나가도록 야차는 결계를 부숴 버릴 듯 후려쳤다.
“대답해 보란 말이다! 여울아!”
붉은 피가 하얀 결계에 선홍빛으로 얼어붙었다.
“뭐야, 정말 귀신이었어?”
“그녀가, 귀동이었다.”
“여울이….”
세상이 무너져도 놀랄 것 같지 않던 반야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서른세 번 모두 그의 눈앞에서 산화하였기에, 염화가 다시 그에게로 돌아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결계에 갇혀 돌아오지 못한 염화는 그녀의 안에 또 다른 생명으로 탄생하려 한다.
‘어쩌면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까?’
천화는 염화를 파괴하는 대신 그 안에 깃든 분노와 절망을 품어 안았다.
야차는 하루가 멀다 하고 결계를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여울아, 대답해 보아라.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그렇게 백여든하루 되는 날.
퍽!
야차의 주먹이 결계에 파묻혔다.
한 걸음 물러선 야차의 눈에 결계의 변화가 확연하게 박혀 들었다. 결계는 마치 녹아내리는 것처럼 위에서부터 내려앉았다. 꿀렁꿀렁 점점 더 작아져 일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여울아!”
야차는 여울의 크기만큼 작아져 버린 결계로 다가서는 반야를 붙잡았다.
“기다려.”
“저 안에 여울이 있어.”
마치 누에고치를 보는 듯 가늘고 투명한 실이 수천수만 겹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 하얀 물체를 잡아당기니 투두둑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여울아!”
야차가 허물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여울의 얼굴이 드러났다.
“쿨럭, 쿨럭!”
기침과 함께 말간 액체를 쏟아 낸 여울의 입에서 거친 숨결이 터져 나왔다.
“하아아아악! 으으으응. 살살, 해.”
맑고 끈적이는 액체에 휩싸인 여울이 눈을 떴다.
“여울아, 여울아아아!”
입맞춤하던 야차가 그녀의 얼굴을 핥았다.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많이 야위었어. 내내 굶기라도 한 거야?”
“네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굶어 죽는다고. 아읏, 이것 좀 벗겨 줘.”
야차는 서둘러 그녀를 감싼 실들을 끊어 냈다. 조심스럽게 실이 끊어져 나가며 풍만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등 쪽으로 허물을 벗기듯 하얀 뭉치를 밀어내니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등으로 오돌토돌 척추뼈가 드러난다. 앙상하게 마른 그녀의 모습에 야차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하얗게 허물에 감싸인 복부 쪽에 손을 댄 야차가 움찔!
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거칠고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작은 무언가가 꼼지락, 꼼지락 움직인다.
“끼아아아아아아악!”
허물을 벗겨 내다 기이한 생명체를 발견한 반야가 또다시 거품을 물고 나자빠졌다.
“반야? 쿨럭, 쿨러억.”
그녀의 배에 들러붙어 있는 생명체는 너무나도 작고 연약해 보였다. 붉은빛이 도는 투명한 피부 아래 핏줄이 훤히 드러났다.
침착하게 숨을 들이켠 야차가 그녀의 배를 가리켰다.
“네… 네 배에, 개, 구리가 붙었다.”
“개구리, 쿨럭, 이렇게 예쁜 개구리 본 적 있어?”
그러고 보니 개구리치곤 머리통이, 너무 크다. 개구리가 아니라면 무얼까.
야차는 이렇게 생긴 요괴를 본 적이 없다.
“큭, 이화랑을 보고 놀랐나 봐.”
“이•화•랑•?”
“염화와 천화가 낳은 아들.”
“아•들•.”
“내가, 아들이랬지?”
털썩 주저앉은 야차를 올려다보며 여울이 환하게 웃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지. 예전에도 딸을 내놓으라 그리 성화를 내더니만. 너무 일찍 와 버렸잖아.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해. 너무 작다고.”
투덜거리던 여울이 부서질 것 같은 아이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새빨갛게 얼굴을 달구며 울음을 터트린 이화랑의 몸이 두둥실 그녀의 손을 벗어났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깔깔깔깔, 목청 봐라. 나를 닮았나 봐. 화르마사라.”
투명한 결계가 아이를 감싸니 신경질이 났는가 더욱 버둥거리며 악을 쓴다. 이화랑의 몸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투명한 결계는 빛이 되어 야차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삼천 년을….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던 우리의 내일이야.”
붉은빛으로 더없이 아름답게 타오르는 희망.
그것은 삼천 년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내일의 태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