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dam fort RAW novel - Chapter (34)
34. 그 후에
하늘과 땅의 구분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세상이 온통 하얗다. 장엄한 설경을 이루는 영산은 그 누구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천연 요새였다.
그 중심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파벽으로 쏟아져 내리던 용천폭포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눈 쌓인 정상에는 초가집 한 채와 작은 우물 하나가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다.
바람 한 점도 허락을 받고 지나야 할 듯 근엄한 산세를 자랑하는 그곳에 신선의 경지에 오른 두 선인이 살고 있으니. 하나는 ‘묵’이라 불리는 장대한 사내요. 다른 하나는 그의 아내로.
“야아아아아아아아아! 당장 이리 오지 못해에에에!”
목청이 불개 못지않은 개귀신이라.
사람들은 그녀를 ‘은여울’이 아닌 ‘개여울’이라 불렀다.
“이 우라질 놈의 자식!”
“자식은 이화랑을 뜻하니 그럼 우라질 놈은 나를 말하는 거요, 부인.”
“아니, 그게 아니라, 어우!”
홀딱 벗고 눈밭을 뛰어다니는 아들의 모습에 약이 바짝 오른 여울이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며 몸서리를 쳤다.
“당장! 이리 오지 못해에에엣!”
극성맞은 아들의 뒤를 쫓던 아내의 허리를 낚아챈 묵이 바동거리는 그녀의 정수리를 입술로 꾸욱 눌렀다.
“그만하시구려. 아이들이 다 그러하지.”
“어우, 누굴 닮았는가 몰라. 말 드럽게 안 들어.”
“하하하하. 그대를 꼭 닮은 듯한데.”
“내 나이 여덟에는 그러지 않았다고요.”
어느새 팔 년이라는 시간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구나.
묵과 여울의 아들 이화랑은 그녀가 처음 이곳에 왔던 딱 그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랬던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묵은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아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서른셋의 그녀는 스물다섯보다 더욱 농염한 살내를 뿜어내고 있었다. 마음의 평안보다는 온몸을 들끓게 하는 향기이니 조만간에 둘째를….
“후후후, 그대를 꼭 닮았어. 잘 보시게.”
묵의 손이 여울의 얼굴을 붙잡아 파벽에 들어붙어 있는 이화랑에게로 돌려 주었다.
눈치를 보는 듯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 여울과 눈이 마주치니 새까만 눈동자를 깜박깜박, 이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버린다.
“야아아아아. 당장 이리 오지 못해!”
그녀를 안고 있는 묵의 몸으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싫다고요오오오! 더워 죽겠는데 왜 자꾸 옷을 입으래!”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여덟 살의 여울을 영락없이 닮아 있었다.
“먹는 것도 고기 아니면 아니 먹으니 그대와 같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으니 그 또한 어찌 다르다 할까.”
육삭둥이로 태어나 한 달여의 시간을 결계 속에서 보내야 했던 이화랑은 그들의 기대 이상으로 건강하게 자라났다. 기대를 너무 했는가 보다.
세 살 경에는 언문을 떼고, 그해 가을 집을 태워 먹었다.
밤하늘에 불꽃을 쏘아 올리는 것을 좋아했다. 뻗치는 혈기를 감당 못 하니 이화랑의 불꽃은 월천녀의 월궁에 다다랐다.
꼬리에 불이 붙은 토끼가 절굿공이를 집어 던져 파벽의 허리에 박혀 버렸다. 그 바람에 집이 또 무너졌다.
한 달 걸러 한 번씩. 부부는 초가집을 새로이 지었다.
염화의 열기 때문인지 유난히 더위에 약해 여름에는 꼭 설계를 펴고 그 안에서 잤다. 또한 무엇이든 태워 버리는 것을 좋아하여 사고를 칠 때마다 상사굴에 보내니, 그곳에서 보내는 날이 일 년에 열 달을 넘어섰다.
“하여 우리 아들도 요즘은 개화랑이라 불린다던데. 크크크, 성씨를 현가가 아닌 개가로 바꾸어야 할 듯하오.”
“딸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개귀신 여울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묵뿐이다.
“하나를 더 낳아 준다 하지 않았던가.”
“서방님, 이화랑을 보세요.”
겨울에도 저리도 벗고 뛰어다니니 참으로 민망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여아를 낳으면 조금 다르지 않을까.”
“동생 낳아 주시게요?”
어느새 귀신같이 다가선 이화랑의 말에 묵이 웃었다.
“동생이 갖고 싶으냐.”
“예. 어머니를 닮지 않은 얌전하고 착한 누이가 갖고 싶어요.”
휙! 부우우웅.
여울이 팔을 뻗자 이화랑이 잽싸게 허리를 꺾어 뒤로 재주를 넘었다. 어찌나 잽싼지 도대체가 잡을 수가 없다.
화르르르륵.
“화라사 마.”
이화랑을 향해 주문을 외는 여울의 손을 낚아챈 묵이 그 손에 입술을 맞췄다.
“아이에겐 도력을 쓰지 않기로 하지 않았던가.”
“아… 그랬지요. 그랬었지요.”
어깨가 축 늘어진 여울을 보고 있자니 묵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아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도 기다렸던 태양이요, 우리의 미래인데. 어쩌누.”
어리광을 부리듯 여울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흐어엉, 다시 배 속으로 집어넣고 싶어요.”
그녀의 등을 다독이는 묵의 다정한 손길에 눈물이 찔끔 났다. 약이 오르고 속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서 잡아 와요.”
“후후후, 그리하리다.”
여울을 놓아준 묵이 순식간에 파벽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묵이 갔으니 금세 잡아 올 것이다.
“하아, 내 손으로 잡아야 하는데….”
수많은 요괴들과 대적하며 생사를 넘나들었던 그녀에게 꺾을 수 없는 유일한 적이 생겼으니 바로 이화랑이다.
“내년부터나 움직여 볼까 했는데…. 어쩐다?”
뿔 없는 백록과 함께 있는 늑대를 보았다는 말에 확인을 위해 북쪽으로 날아간 반야는 닷새째 소식이 없다.
***
“아니 될 말이요.”
영산을 떠나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는 여울의 말에 묵이 고개를 저었다.
“답답하여 그러니 휙 바람도 쐴 겸 다녀오고 싶어요.”
그녀의 답답함은 그리움이다.
“이 시간이 지나고, 벚꽃 휘날리는 봄이 되면 그때는 나랑은 잊고 살아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흥! 그러자꾸나. 전생의 빚도 다 갚았겠다. 내 너와 얽혀 삼천 년을 눈물로 보냈으니. 서로 뚝 떨어져 남처럼 살자꾸나.”
백원후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여울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뱉어 낸 말이건만 그 때문에 백원후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마다 봄이 되면 새로 깨어난 바람나비 수만 마리를 날려 보냈다. 풍접들이 대륙을 돌아 그녀에게로 돌아오기까지는 꼬박 일 년, 그 숫자 또한 백을 넘기지 못했다.
‘이번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구나.’
아이가 잠든 밤, 홀로 파벽에 선 여울의 시선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듯 산맥을 넘어선다.
여울의 그리움은 명과 백원후 그리고 이랑군에게로 흘렀다. 명이 백원후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긴긴 인연의 결실을 맺었노라 이야기해 주었음에도 여울은 그들을 그리워했다.
“그 마음 모르는 바 아니니 조금만 기다려 주면 아니 되오? 적어도 아이가 크면 우리에게도 여유가 생길 테니.”
다정한 음성에 여울의 시선이 이화랑에게로 향했다. 차가운 돌바닥에 누워서도 무엇이 그리 더운지 강아지처럼 문가에 코를 박고 잔다.
“알겠습니다.”
답은 그리하였으나 여울은 그다음 날부터 끼니를 거르기 시작했다. 팔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울의 단식은 사흘 동안 이어졌다.
잠시라도 묵의 사냥이 늦어질 때면 하늘이 노랗게 변하며 피가 마르고 있다며 엄살을 부려 대던 그녀였는데.
“조금이라도 들어 보오, 응?”
커다란 노루 다리를 통째로 건네도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묵의 가슴이 타들어 간다.
“어찌 그러하오.”
여울의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으니 덩달아 이화랑조차 조용하다. 노루 다리를 쳐다보며 침만 꼴깍꼴깍 삼키니 새삼 이런 효자가 따로 없다.
“그리합시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대의 뜻대로 세상에 한번 나가 봅시다.”
“되었습니다.”
시큰둥한 여울의 반응에 묵이 웃었다. 이랑군의 소식을 듣고 북으로 향한 반야가 돌아오지 않으니 더욱 마음 쓰여 하는 것을 알기에 묵이 더욱 힘주어 말했다.
“한번 가 봅시다. 나도 세상 밖이 궁금하던 참이니.”
“진정이십니까.”
“하하하, 그대에게 향한 내 마음이 진정이 아닐 때가 있었는가.”
“당신 뜻이 정히 그러하다면…. 한번 생각해 보겠어요.”
말끄러미 묵을 쳐다보던 여울의 손이 슬그머니 노루 다리로 향했다.
“후후후후.”
바보 같은 묵은 그저 너털웃음을 흘릴 뿐이다.
‘어떻게 얻은 아내인데 그대의 말을 거역할까.’
언젠가 이화랑이 크면 그들을 찾아 나서 볼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린 이화랑을 보면 아직, 아직은 조금만 더 이대로 머무르고 싶다.
“갑시다. 아이가 아직 열 살을 채우지 못했으니 이 년 정도 오신산에 맡겨 두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지난 사흘간 고민이 깊었기에 묵이 대안을 제시한다.
“이미 천계에 소식을 띄워 두었습니다.”
“천계?”
“북두나 남두 성군은 하루를 버티지 못하였으니, 아무래도 천선께서 돌보아 주시는 것이 나을 듯하여.”
생각을 해 보겠다는 것이 일다경 전인데, 어느새 천선에게 아이를 맡길 생각까지 하였을까.
양 볼이 미어터지게 고기를 씹던 여울이 가장 질겨 맛 좋은 힘줄을 잘라 이화랑의 입에 덥석 물렸다.
“아들~ 맛나지?”
“웅, 웅, 헤헤헤.”
“그럼. 답신도 받았소?”
“받았지요.”
두 눈이 동그래진 묵이 탄성을 터트린다.
“아니 내가 허할 줄 어찌 알고.”
“소녀가 밥을 굶는 것이 어디 흔한 일입니까.”
“흔하지 않지.”
“소녀는 사흘 이상 굶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
“사흘을 굶으면 죽지 않겠습니까.”
“설마, 죽기까지야. 그대는 귀녀가 아니오.”
“사흘을 굶으면 이 개귀신은 분명 죽습니다. 몸은 견딜지 몰라도 이 빈약한 영혼은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말라 죽을 거예요. 설마 나를 죽게 둘까 싶어 미리 소식을 전했지요.”
“아….”
영산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나 되면 움직여 볼까 했는데.
“그럼….”
“내일 동이 트면 떠나야지요.”
“짐은.”
“이미 개복치 주머니에 다 넣어 두었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묵의 한숨이 깊어만 간다.
이튿날.
끝도 보이지 않는 대라천의 앞에 멈춰 선 여울이 멀리 천선의 모습이 보이자 두 손을 들어 벌새처럼 팔락였다.
“하아, 하아. 낭랑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호호호호, 참으로 반갑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두 분뿐입니까. 이화랑은.”
천선의 물음에 여울이 허리춤에 찬 복 주머니를 두드렸다.
“설마 그곳에 넣어 오신 겁니까.”
“흐흐흐, 자고 있는 사이에 덮쳐서 담았다지요.”
“이런, 이런.”
이미 알고 있으나 다시 보아도 참으로 별나다.
당혹스러워하는 천선의 시선이 묵에게로 향하니 그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영산의 묵, 천선 낭랑께 인사 올립니다.”
“혼인과 출산을 관장하는 천선, 반선 묵의 예를 감사히 받아 평안을 전합니다.”
인사를 나누고 대라천을 건너는 천선이 묵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찌 된 일입니까.”
“아이의 성품이 조금 남다른 면이 있는지라.”
아들을 주머니에 넣은 여울을 탓하는가 싶어 묵이 아내의 편을 든다.
“아니요. 갑작스레 아이를 맡기고 요괴를 잡으러 가신다기에.”
“아…. 요괴가 아니라 벗들을 찾아보려 합니다.”
천선의 궁이 있는 옥청에 다다르니 여울이 복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꾸물꾸물 허물을 벗듯 조그만 주머니에서 화가 잔뜩 오른 이화랑이 머리를 내밀었다.
“네가 이화랑이구나.”
아름다운 천선의 모습에 이화랑이 두 눈을 반짝였다.
서책에서만 보던 천신을 처음으로 접한 이화랑은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그의 머리 위로 작고 예쁜 불꽃들이 파르륵 튀어 올랐다.
“이화랑이 천선께 반했나 봅니다.”
“기분이 아주 좋을 때 보이는 불꽃이라지요.”
“그러합니까, 후후후후.”
묵의 말에 여울이 한마디 보태자 천선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이리도 어여쁜 염화를 본 적이 없습니다.”
“반은 천화예요. 천선 낭랑의 핏줄이지요.”
“맞습니다. 그러하여 그런가 더욱더 어여쁩니다.”
천계와 마계의 결합으로 태어난 이화랑이 얼굴을 붉히며 천선을 향해 절을 했다.
“현가의 삼십팔 대 장자 이화랑 천선 낭랑께 인사 올립니다.”
“호호호호, 이화랑, 제가 한번 안아 보아도 되겠습니까.”
“흐음,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정인이 있어 천선께는 품을 내어 드릴 수 없으니 송구합니다.”
“하하하하. 하하하. 태어나지 않은 정인이라.”
생각지도 못한 거절에 천선이 웃음을 터트렸고 묵과 여울은 기함을 토한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도대체 무얼 본 거야, 이화랑!”
“화랑아, 꿈에 네 정인을 보았더냐.”
그 부모가 범상치 않고 출생 또한 평범하지 않은 아들이었다. 이미 네 살의 나이에 명상에 잠기기 시작했으나 아이가 먼 훗날을 보고 있음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분명히 보았습니다. 눈처럼 하얀 얼굴에 제비꽃 눈동자를 가진 어여쁜 계집아이를.”
동쪽 어귀에 위치한 천마산.
여느 야시들이 그러하듯 온갖 허접한 물건들이 가득한 천마산 야시는 요선들과 요괴 그리고 반선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북적였다.
“백원후 님이 딸을 낳았나? 오라버니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지 않던가. 이화랑이 아직 어리니 그가 본 것 또한 분명치 않아.”
“그래도. 제비꽃 눈동자는 순혈 요신의 특징인데….”
한숨을 내쉬는 여울이 오가는 이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묵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요괴들의 장이란 쓸 만한 물건도 없이 요란하기만 하군.”
제일 큰 장이 열리던 수요산이 야차에게 초토화된 이후 천마산의 야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역시나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유요, 마유! 인간 피보다 진득하니 맛이 좋아!”
염소 몸통에 말 머리를 가진 마록의 젖을 파는 이의 목청이 야시의 시작부터 쩌렁쩌렁하다.
“그가 제천대성에게 다녀갔습니까.”
“하늘의 율법이 있는지라 알려 드릴 수는 없으나, 하얀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는 사내가 종종 야시에 나타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조심해.”
천선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묵을 잡아당기며 여울이 투덜거렸다.
“명은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데, 정말 나타날까?”
“백원후와의 첫 재회가 수요산의 야시였으니 신빙성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구나.”
“그때는…. 맞다! 목치 눈깔!”
“비목어 새끼의 눈을 말하는 건가?”
“응! 백원후가 술안주로 꼭 먹어. 완전 좋아했어.”
“금슬의 상징을 술안주로 먹다니.”
“후후후후, 반야랑 똑같은 말을 하네.”
묵과 손을 잡고 목치 장사를 찾아다니던 여울의 눈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우아아아, 개복치이!”
수요산 야시에서 처음 보고 이게 얼마 만이야!
어마어마한 덩치를 자랑하는 개복치 요괴가 코딱지만 한 반상 위에 주머니 하나를 올려놓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보오, 날 기억하시오?”
“…요.”
역시나 변함없이 소심한 성격에 목소리도 안 들린다. 양갓집 규수처럼 조신하게 앉아 있는 개복치의 모습에 또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대에게 이 복 주머니 사 갔던 여울이라오.”
“…합니다.”
허리춤에 찬 복 주머니를 두들기던 여울이 한껏 몸을 숙여 개복치에게로 다가앉았다.
“또 각시 줄 선물 사러 나왔소?”
여울이 전에 주려다 주지 못했던 이무기 비늘을 내미니 눈알을 굴리던 개복치가 고개를 저었다.
“으잉? 왜? 각시가 취향이 바뀌었나?”
설레설레.
무어라 웅얼거리기는 하는데 들리지 않으니 여울은 속이 터진다. 뜬금없이 개복치와 말씨름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묵이 한숨을 내어 쉰다.
‘갈 길이 먼데 어찌 저러고 앉아 있을까.’
마음은 그러하지만 아내의 행동을 막아 본 적이 없는 묵인지라 그저 이름처럼 묵묵히 지켜 서 있다.
“그럼 누구 주려고? 아기? 아, 아기가 있었어?”
“오백여든… 이요.”
“큭큭큭, 그럼 이건 어떠오?”
주머니에서 납작하고 둥근 돌 세 개를 꺼내 들었다.
“이게 말이지. 이렇게 놓으면 자기네들끼리 들러붙는다오. 자, 신기하지. 또 이렇게 뒤집으면.”
자웅석은 이화랑이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것이다. 서로에게 들러붙는 형질을 가졌으나 반대로 뒤집으며 서로를 악착같이 밀어낸다.
“오….”
작고 짧은 감탄사가 개복치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마음에 들었는지 개복치가 복 주머니를 내밀었다.
“됐다오. 지난번에 세 개나 받아 갔는걸. 다시 만나 반가웠으니 선물이라 생각하오.”
반상을 챙겨 든 개복치는 기어이 그녀의 손에 복 주머니를 쥐여 주곤 돌아섰다.
“개복치가 자웅석을 무엇에 쓸까?”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한 묵의 물음에 여울이 웃었다.
“오백여든아홉 번째 딸을 주려 한다는데, 큭.”
“오백여든아홉?”
“큭, 큭큭큭. 재주도 좋아.”
은근하게 올려다보는 여울의 표정에 묵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오가는 이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묵의 품 안에서 걷던 여울이 멈춰 섰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한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너른 어깨 위에 앉아 긴 꼬리를 살랑대는 하얀 물체가 돌아본다.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요괴들을 헤치며 달려 나간 여울이 거침없이 소리를 질러 댔다.
“오라버니이이이이이!”
벼락같은 목소리를 못 듣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고함 소리에 주변의 요괴들이 모두 멈춰 서 버렸다.
“오, 라버니.”
짙은 담갈색의 눈동자가 여울을 마주한다. 산맥처럼 우뚝 솟은 코와 강직한 성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입술은 분명히 명의 것이었다.
사내답게 굵은 선을 그리는 턱이 씰룩인다.
“나, 를 부르는 것이오?”
“명!”
사내의 어깨에 앉아 있던 하얀 원숭이가 그에게로 뻗은 묵의 손등을 순식간에 긁어 버렸다.
“캬아아악, 캬악, 캬악.”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 원숭이가 이빨을 드러내며 거침없이 공격성을 드러냈다.
“설아, 그만하여라. 그마안.”
부드러운 음성에 사내의 몸을 오르락내리락 미친 듯이 날뛰던 백설이 잠잠해졌다. 그럼에도 드러낸 이빨을 감출 생각을 않는다.
“많이 다쳤습니까.”
“아니, 난.”
피가 흐르는 손을 감싼 묵이 입술을 깨물었다.
삼천 년 전에도 백원후는 그의 손을 할퀴었다.
‘어찌 된 것인가. 요신은 사라지고 본능만이 남은 것일까. 하지만 명은…. 그는 왜.’
그들을 바라보는 사내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원래가 이리 거친 아이는 아닌데.”
“원숭이의 이름이 백설이 아닙니까.”
눈물이 그렁그렁한 여울을 바라보던 사내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눈처럼 하얗다 하여 그리 지었지요.”
“하면…. 주인의 이름은, 혹 이름을 여쭈어도 될는지.”
“후후후, 주인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그저 벗이랄까요. 제 이름은 천명입니다.”
여울은 뜨겁게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할 말을 잃은 채 눈물을 쏟는 여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설이 갑자기 그녀의 어깨 위로 건너뛰었다.
“설아!”
방금 전의 표독함은 어디로 갔는지 울고 있는 여울의 얼굴을 작디작은 손으로 쓰다듬는다.
“흐어어엉, 할머니이이이.”
울음을 터트린 여울의 눈물을 닦아 주는 백설의 모습이 묵의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그녀에게 나누어 준 너의 생명이 느껴지는 것이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여울과 백설을 바라보던 천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찌 이리 섧게 우시는지.”
“예전에 아내에게도 이렇게 하얗고 아름다운 벗이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이나 백설을 안고 울던 여울의 흐느낌이 잦아들 무렵 천명이 묵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안하지만 이제 가 봐야겠습니다.”
“저, 손에 든 것이 목치의 눈입니까.”
“후후후, 설이의 이름도 아시고, 제가 무엇을 샀는지도 알아맞히시는 것을 보니. 점사를 보시는 도사님들이신가 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는….”
당신의 벗이며, 누이이며, 가족입니다.
뱉어 내지 못한 말을 삼키며 묵이 여울을 품에 안았다.
그에게로 돌아온 백설을 품에 안은 천명이 걸음을 재촉하며 돌아섰다.
두어 걸음 떼었을까. 천명이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혹 저의 미래도 보이십니까.”
아내와 꼭 닮은 미소로 바라보는 천명을 향해 묵은 축원을 한다.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이 보입니다. 천륜조차 넘어서는 인연이 보입니다. 하늘도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억겁을 다시 태어나서라도 끌어안아야 하는 그런 인연 말입니다.”
“후후후, 감사합니다.”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벗의 얼굴에는 그 어떤 고뇌도 읽히지 않았다.
‘비로소 평안을 찾은 것인가.’
천명과 백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물만 죽죽 흘리고 있던 여울이 묵의 품에 안겨 들었다.
“속상해 죽겠어. 어떻게 날, 흑흑, 알아보지 못해.”
이리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제천대성을 만난 것이 분명한 듯한데.
‘백설을 살려 내는 조건으로 그녀에게 받았던 심장 반쪽을 돌려준 것인가. 하여 기억조차 잃어버린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묵은 여울이 한껏 울 수 있도록 그녀의 등을 부드러이 토닥였다.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후후후, 그리될 듯하구나.”
“흑흑, 어떻게 알아.”
“이화랑.”
알 수 없다는 듯 올려다보는 여울에게 묵의 입술이 그윽하게 다가온다.
“아들이 제비꽃색의 눈동자를 가진 아내를 맞이한다니 기다려 봐야지.”
“아아아아!”
쩍 벌어진 여울의 입 속으로 묵의 숨결이 들어찬다.
“하아, 하아. 그럼 이랑군 찾으러 북쪽으로 가 볼까?”
“후후후후.”
환하게 미소 짓는 여울의 얼굴이 희망으로 반짝인다.
언젠가 그들의 아들은 잃어버린 벗의 딸과 만날 것이다.
그날이 되면 모두가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게 되겠지. 오늘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풍접들보다 멀리 퍼져 나가리라.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기에 짧디짧은 인간의 삶은 더욱 치열하게 타오른다.
[참고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원형백과 인귀세상 / 한국콘텐츠진흥원
중국 환상세계 / 도서출판 들녘
도교의 신들 / 도서출판 들녘
가락국의 후예들 / 역사의 아침
불교미술의 기본 / 학연문화사
조선 무사 / 인물과 사상사
지모와 책략 / 시아출판사
사기 3 / 새로운 사람들
일본 기담 / 청아출판사
노자의 도덕경 / 새벽이슬
논어 / 새벽이슬
요재지이 / 민음사
산해경 / 민음사
한국고전용어 사전
환상동물사전
무협사전
한자성어, 고사명언구사전
삼세인과경
한시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