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Beyond Fantasy Smartphones RAW novel - Chapter 198
타천사 : 에스타시아 (1)
두 사람만이 남아있는 세계.
그렇게 부르기에는 아무래도 이 세계가 지나치게 넓은 모양이었다.
사람이 없는 옥상의 난간에 기대어있으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조율의 여신.
그리고 역행의 여신.
두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에스텔과 마주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의지에 따른 일이었다.
“그 아이랑은 잘지내고 있어?”
전투가 시작된지 게임 시간으로 어느덧 4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의 전황은 우리쪽에 압도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지구에 찾아온 에스타시아와 보낸 시간은 그보다도 훨씬 더 길었다.
이 세계의 진실을 내가 처음으로 알게되었던 날부터, 나는 에스타시아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에스텔이 나에게 잘지내고 있냐고 묻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거 아니야?”
“신역에 간섭하려면 힘을 많이 써야하거든.”
나와 에스텔의 사이가 제법 까다로운 관계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눈앞의 여신님은 그런 인간의 사고에 공감을 못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지금 당장 날을 세울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숨기고 있는 칼날을 드러내는 것은 대상을 확실히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부터니까.
아직은 칼날을 내보일 때가 아니었다.
“잘난 여신님도 못하는게 있는 모양이네.”
“이곳에 있는 나는 더 이상 조율이 아니니까.”
역행의 신, 에스텔.
그것이 지금 이곳에 있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스마트폰 너머의 세계에서 그녀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이곳에 있는 그녀가 짊어진 것은 어디까지나 악신의 업이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에스텔의 이름이 그러한 추측에 확신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름이 중요하다고 했었나? 그럼 에스텔이라는 이름은 역행의 신격인 모양이네.”
“이름··· 응. 이름도 중요하지.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나타낼 수 있는건 이름밖에 없잖아?”
“결국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건 이름밖에 없다··· 그런가.”
에스텔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머릿속에 생각이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신. 세계. 그리고 운명.
크고 복잡한 것들이 어느새인가 나약한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불합리로 가득차있는 어지러운 선택지 속에서, 나는 무언가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고작해야 평온한 인생을 바라고 있었을 뿐인데.
찰나의 평온을 위해 희생해버린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셈이겠네.”
“그래. 그 잘난 신들도 참 복잡하게 사는구나.”
맑은 하늘. 그 아래에서 태양이 선명하게 옥상을 비추고 있었다.
복잡한 심정이 뒤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옆자리에 선 검정일색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기억속에서 빛이 바랜 것은 오로지 초라해진 자신뿐이었다.
에스텔은 양산너머로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보이며 미소지었다.
“괜찮아. 복잡한 세상속에서도 특별한 것들은 돋보이기 마련이니까.”
“아직까지 살아있는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특별했나보지?”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평범하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특별했다고도 볼 수 있을거야.”
변덕이 심한 여신님이었다.
난간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와 나의 머리카락을 뒤흔들었다.
어지러이 흔들리는 머리카락 너머로, 나는 흑요석을 닮은 에스텔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평범하다면서. 나같은 사람을 왜 신으로 만드려고 하는건데?”
“너만이 가능한게 여기에 있으니까. 내가 너에게 바라는건 그것 하나뿐이야.”
“뭘 바라고 있는거야?”
“모든 일이 끝나고나면, 네가 이 세계를 번영시켜주면 좋겠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계를 네가 원하는대로 다시 만드는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제멋대로다.
도망칠 기회를 준다고 했었으면서, 막상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남겨진 세계를 다시 재건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거기에는 나에 대한 배려도 어느 정도 섞여있을 것이고, 두 세계의 신이 되기 위한 본인의 의도 역시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가지 깨달은 사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한가지 규칙을 정하자.”
적어도 강림이라는 것이 마냥 불가역적인 것은 아닌게 틀림없었다.
내가 원하면 그곳에 머무는 것도, 이곳에 남아있는 것도 가능한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두 세계의 신으로 군림하게 만드려는 계획이었다.
탄생과 죽음의 순환을 끊임없이 반복해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나가는 것이다.
영원을 함께 살아가는 신들이라.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스마트폰 너머의 세계에서는 악을 표방하고, 폐허가 되어버린 지구에서는 선을 표방하라는 이야기었으니까 말이다.
“네가 이 세계에 빛과 번영을 가져오고, 내가 이 세계를 망가뜨리는걸로. 그렇게 우리만의 세계를 영원히 이어나가는거야.”
언젠가의 나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면, 어쩔 수 없이 에스텔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악신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에스텔에 의해 처음으로 그릇된 길을 걷게된 시점부터, 나는 이미 비틀리고 망가져버린지 오래였다.
이제와서 선한 흉내를 내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뼛속까지 질척거리는 감정에 물들어버린 채로, 퇴색되어가는 내가 이곳에 남아있을 뿐이었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처음부터 나한테 선택권은 없는 일이었잖아?”
“좋아. 착한 아이네.”
“대신에 내 소원이나 하나 들어주던지.”
“무슨 소원인데? 무리한게 아니라면 하나쯤은 들어줘도 괜찮아.”
그렇기에 나는 거짓말을 했다.
진심따위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시선으로,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채.
눈앞에 있는 신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이 세계를 원래대로 되돌려.”
“그건 곤란하겠네. 카르마를 너무 많이 써버렸거든. 노력해봤자 절반정도가 고작일거야.”
“······.”
“물론 그런 소원이라면 들어주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대신에 간단한 소원이라면 괜찮아. 다른 소원은 없어?”
처음부터 들어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에스텔이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을테니까.
나는 거절의 의사를 전하는 에스텔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머나먼 저편의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그녀를 속이기 위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럼 아로니아를 여기로 보내줘.”
“천사가 하나로는 부족했던 모양이네. 알았어. 대신 지금 시작해도 며칠은 걸릴거야.”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이다.
그럼에도 조만간 비가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자신의 직감으로 내리는 결론이었다.
우중충하게 변한 하늘 아래에서 장대비가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도착했으면 좋겠네.”
물론 내 직감은 자주 들어맞는 편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 * * * * *
제1사도, 유테니아 하이로스트.
그녀는 며칠째 이어지는 전투에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몰려오는 피로를 억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뿐인 그녀의 신을 위한 전쟁이다.
이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해 대업을 망치는 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랫동안 보고싶어하던 대상을 눈앞에서 놓치는 일따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또각. 또각.
고요한 계단 아래에 유테니아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지식의 신전의 지하로 향하는 계단은 무척이나 좁고 어두운 편이었다.
성지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물건이 존재하는 곳이니만큼, 모두에게 허락된 장소는 아닐 것이다.
성지에서도 극소수의 인간만이 통행할 수 있는 장소임에 틀림없었다.
“결국 여기까지 침입자가 찾아왔군요.”
기나긴 계단을 통과한 유테니아가 통로의 끝에 다다르면, 그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성이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나이가 든 황혼기의 여성이었다.
지긋한 나이를 대변하는 흐린 눈이 유테니아를 마주보았다.
유테니아의 앞에 서있는 수녀복차림의 노인은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두꺼운 경전을 양손으로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저는 이곳을 지키고 있는 지식의 성녀, 아우로라라고 합니다.”
위대한 존재에게 내려받은 신기, 그리모어를 끌어안고 있는 유테니아의 모습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단지 두 사람의 사이에는 그 신앙이 끝을 맞이할 시기가 다르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유테니아는 자기 소개를 하는 아우로라를 바라보며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는 이에게, 그 역할을 끝마칠 기회를 주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그런가요.”
“그럼 이제 제 앞에 있는 당신의 이름을 물어도 괜찮을까요?”
“······위대하신 분의 첫번째 종, 유테니아 하이로스트.”
“유테니아. 좋은 이름이군요.”
유테니아가 생각하기에도 그러했다.
그녀의 부친은 자신의 이름을 지어주기까지 무척이나 고생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런 이야기를 듣기에 너무나도 멀리 돌아왔지만 말이다.
피냄새에 짙게 물들어버린 그녀에게 있어서 귀족 아가씨의 사교생활은 무척이나 덧없는 꿈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건 오랜만이네요.”
“저에게도 당신같은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군요.”
아우로라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비어있는 유리관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면서도, 또 화려했던 순간의 흔적이 엿보이는 미소였다.
지식의 성녀는 경전을 끌어안고있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가늘어진 손가락 사이로 보석이 빠진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금단의 방법을 사용한건가요.”
“······성지의 모두가 동의했어요. 우리에게는 그런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악신의 숭배자라고 부르면서 멸시하더니, 결국 당신들도 다를게 없었네요.”
“조금이나마 꿈을 꾸고 싶었으니까요.”
이치를 거스르는 일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
하늘을 열어젖히는 일은 더더욱 그러했다.
악이라고 멸시하던 교단에서나 사용할만한 방법을, 그들 자신의 손으로 태연하게 행하고 있던 것이다.
또각—.
유테니아는 위선에 젖은 성녀를 내버려두고서, 그녀의 뒤편에 있을 원초의 심장을 향해 나아갔다.
“여기서 제가 당신을 말린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도 없을테지요. 이제 이 늙은이에게는 조그마한 힘도 남아있지 않으니.”
여섯 여신에게 바쳐지던 영광의 시대는 서서히 끝을 보여가고 있었다.
대륙에 숨어있는 모든 이들의 믿음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낡은 신앙은 서서히 무너져갈 것이었다.
유테니아를 마주하고 있는 구시대의 성녀 역시 저물어가는 역사속에 사라질 것이다.
시대가 기록하는 것은 승자의 이야기 뿐이었다.
난립하는 신념속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가장 강렬하게 타오르는 하나를 제외하고 사그라들 것이었다.
“위대하신 분은 당신들이 섬기는 가짜들과는 다르니까요. 저는 그분을 보기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했어요.”
“······당신같은 사람이 다음 지식의 성녀가 되었다면 좋았을텐데. 아쉬운 일이군요.”
“올바른 일이에요. 그 순간에 저에게 손을 내밀어준 분은 그분밖에 없었으니까요.”
울려퍼지는 발걸음 소리를 따라 바닥에 퍼져나간 그림자가 일렁였다.
지면을 뒤덮은 사도의 그림자는 어느새 공간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우로라를 지나쳐간 유테니아의 발걸음이 원초의 심장 앞에서 멈추어섰다.
빛을 품고 있는 거대한 보석은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웠다.
원초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은 유테니아가 뒷편에 있을 아우로라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이야기는 전부 끝난건가요?”
“여신이여, 길을 인도하소서——.”
“그럼, 안녕히.”
아우로라를 향한 유테니아의 마지막 인사가 끝을 맺는 순간.
푸욱, 푹—!
날카로운 그림자의 가시들이 아우로라의 복부를 꿰뚫었다.
일렁이는 어둠속에 핏방울이 떨어지며, 묵직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