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Beyond Fantasy Smartphones RAW novel - Chapter 206
악신강림 (5)
고요속에 몰아치는 미려한 음색.
파멸의 찬송가와 함께 세상에 거대한 어둠이 휘몰아친다.
위기를 감지한 벌레들이 밖으로 기어나와 사방으로 뛰쳐나가고, 온갖 새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죽음을 피해 날아갔다.
쩌저저저적.
지면이 갈라지고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한 가운데, 에스타시아는 태연한 모습으로 노래를 이어나갔다.
“······.”
세계가 멸망하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에 보이는 세계는 확실히 어마무시한 광경이었다.
지평선까지 보이는 모든 풍경이 요동치며 무너져내린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콘크리트의 요새가 내 손짓을 따라 붕괴하며 연기를 피워올렸다.
도미노와 같이 무너져내리는 세계의 모습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장관이네.”
모든 것이 파탄나며 파멸한다.
괴성과 굉음이 난무한 파멸의 영역에서 저주받은 이들이 허우적대며 자리에 쓰러졌다.
안식을 허락받지 못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안식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구원이었다.
이지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들에게 나는 공평한 죽음을 내려주었다.
이러한 기적을 행하는데 더 이상 스마트폰은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조그마한 스마트폰에 매달리지 않더라도 내 뜻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판을 벌려놨는데, 초대받은 손님이 나와주지 않으면 섭섭하지.”
그와 동시에 권능을 행사하는 나를 억제하려는 원인모를 압박감이 전해져왔다.
일방적이고 광범위한 권능의 행사에 대한 의 제재였다.
스마트폰이 멀쩡했다면 분명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띄우고 있었을 것이다.
한쪽 방향으로 지나치게 편향된 카르마는 ‘인과율 보정’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말이다.
물론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은 그쪽이었다.
고강도의 제재가 아니고서야 제멋대로 날뛰는 악신을 억제할 방법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안그래, 에스텔?”
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는 어느새인가 옥상에 나타난 에스텔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검은 양산을 들고 있는 에스텔의 표정은 일말의 여유조차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내가 지금 그녀의 숨통을 조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람은 자신의 숨이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하물며 지고한 위치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던 신이라면 어떻겠는가.
모든 가능성이 틀어막힌 채로 그저 살아갈뿐인 여생을 바라고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아는 에스텔에게 있어서 지금의 상황은 죽는 것과 크게 다를바 없는 것이었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있는거야?”
“우리 여신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얼굴이네.”
일그러진 얼굴의 에스텔이 나를 보며 선명한 증오를 표출하고 있었다.
살갗이 짜릿해질만큼의 짙은 살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마주보며 환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이 순간 누가 우위에 서있는지는 명확했으니까 말이다.
스마트폰 너머의 세계에서 가능성을 잃어버린 에스텔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서 숨만 붙어있을뿐인 최후의 생존자가 상대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너는, 정말······!”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옥상에 울려퍼졌다.
화가 날 것이다.
짜증이 치솟을 것이다.
어디로도 표출할 수 없는 분노에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있을 것이다.
당연했다.
그 전부가 그때의 내가 느낀 감정이었으니까.
눈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신에게 농락당하고 숨통이 조여지며 괴로워하던 시절의 기억이었으니까.
나는 괴로워하는 에스텔을 향해 두 사람의 추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에스텔. 언젠가 네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어?”
언젠가의 에스텔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누군가 힘겹게 쌓아올린 모래성을 자신의 손으로 망가트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거라고.
하지만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에 에스텔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고작해야 모래성을 망가뜨리는걸로 즐거움을 느껴서야 곤란했다.
망가뜨리려면 그보다도 더 커다란 것을 망가뜨리는 편이 더욱 즐거울 것이다.
“재밌지 않아? 남이 만든 계획을 성공하기 직전에 눈앞에서 내 손으로 쳐부숴버리는거 말이야.”
“너······.”
“역시, 모래성 따위보다는 이 세계가 제격이지.”
쩌저저저적.
갈라진 건물의 외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중력의 영향을 받아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철근이 드러난 콘크리트.
바닥에서 분리되어 엉켜버린 전신주.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엉망으로 뒤섞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의 중심에 있는 것이 눈을 마주하고 있는 나와 에스텔이었다.
“그만해······! 이런 짓을 한다고 달라지는게 있을리가 없잖아!”
나를 향해 그만하라고 외치는 에스텔의 모습이 퍽 우스웠다.
내가 그만하라고 외치던 때에는 일말의 고민조차도 하지 않던 그녀가, 지금은 내 앞에서 내가 멈춰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에스텔은 두려운 것이다.
기울어지기 시작한 천칭이 만들어낼 형벌이.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한계까지 맞춰놨을 균형을 무너뜨리면 찾아올 대가가.
이미 한 번 세계를 망가뜨린 에스텔이 그만한 업을 짊어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지금 짊어지고 있는 생명의 업조차도 에스텔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버거운 수준이었다.
적어도 그녀와 같은 신이 되어버린 내 눈에는 그것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잃어버릴 것이 많아 두려워하는 에스텔의 모습이 말이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어. 이미 네 손으로 전부 망가뜨렸으니까.”
선악의 균형이 무너진 세계에 천칭이 내리는 규칙은 하나다.
무질서속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 지옥에서 썩어가는 불멸의 악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무런 권능도 행사하지 못한 채로 그저 살아갈뿐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글쎄, 내 생각에는 전혀 아니었다.
“전부 다 너를 위한 일이었어. 알고 있었잖아······?”
떨리는 손으로 양산을 쥔 에스텔이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추락하고 있는 여신님은 아무래도 잃어버릴게 많으신 모양이었다.
누구보다 고귀하던 시절과 다르게, 이렇게까지 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물론 악신의 사랑을 파멸이라고 부른다면 그녀의 말은 크게 틀린 것이 없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크게 사랑받았다.
충분히. 만족을 넘어 눈물을 흘릴정도로.
“그래, 그렇겠지. 너라면 그렇게 말할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이걸로 영원히 함께야. 에스텔.”
그러니 이제 받은만큼 그녀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 시작은 에스텔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양자택일의 선택지였다.
불합리와 모순으로 가득찬 선택의 강요.
잃어버릴 것인가. 가진 것을 내려놓을 것인가.
한치의 양보도 없는 선택지속에서 그녀는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이 불합리한 도박에 내가 판돈으로 내걸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영원히 함께하길 원한건 너였잖아?”
허공으로 부유하기 시작한 옥상이 파멸하는 세계의 경치를 화려하게 비추었다.
종언의 노래가 만들어내는 멸망이 어느새 우리가 서있는 건물의 옥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한 멸망을 맞이하고 있는 에스텔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
“그러니까 이게 네 사도가 내린 결정이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닥을 향해 힘차게 내던졌다.
콰앙!
스마트폰의 액정이 깨져나가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더는 나에게 필요없는 물건이었다.
이 작은 기계장치에 모든걸 의존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
수없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며 나는 성장해왔다.
이제는 조율의 권능이 아닌 나 자신의 힘으로 이 세계에 발을 내딛을 때가 찾아온 것이다.
“으······.”
에스텔은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두개의 신격을 지구에 묶어놓고 있는 천칭의 카르마가 극단적으로 기울고 있었으니까.
양자택일의 선택지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에스텔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왜 그러지? 설마 멸망해버린 세계에는 역행의 여신님에게 마땅한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건가?”
천칭을 반대쪽으로 기울이는 것.
지금까지 그녀가 취했던 모든 것들을 토해내고서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싫어하던——
시시하고 재미없는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으으윽······!”
수많은 감정들이 뒤엉킨 신음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어지간히도 괴로운 모양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전부 자신의 손에서 내려놓는다는게 말이다.
나는 나락의 끝까지 떨어질 각오조차 하고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에스텔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너는 운이 좋은 편이네.”
“그만······.”
“나는 누구랑 다르게 친절한 편이라서 말이야. 네가 뭘 해야할지는 친절하게 알려줄 수 있거든.”
다행히도 새로 신좌에 오른 나조차 그녀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이 남아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에서야 신이 되었기에 해줄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방금 전에 깨달아버린 것이기에 아직 내 안에서 생생하게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
에스텔의 계획을 따라 100만 카르마를 모으고서 진리의 파편을 손에 넣었던 순간.
나는 비로소 이해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무엇이 신인가.
그리고 무엇이 세상의 올바른 질서인가.
규율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지금에 와서는 일말의 의미조차도 갖지 못했다.
그야, 그 규율 위해 자신만의 규칙으로 성립하는 것이 신이라는 존재가 아니던가.
“이제부터 내가 악신이다.”
말문이 막힌 에스텔을 향해 나는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나 자신을 가리키던 엄지 손가락을 접어들이고서, 이번에는 눈앞에 있는 에스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손가락이 의미하는건 하나였다.
“그러니까 네가 세계를 구해.”
이 세계의 질서를 뒤엎는다.
내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모든 것이 파멸로 수렴하는 질서 아래에서, 그녀는 유일한 질서에 역행해야만 한다.
그것이 ‘역행의 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기적일테니까.
지금 이 순간 에스텔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너는······.”
“역행시켜라. 그게 네가 제일 잘하는거잖아?”
툭—.
떨리는 손으로 양산을 쥐고 있던 에스텔이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불안과 초조에 젖은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가려진 얼굴 사이로 보이는 입술이 떨리는 목소리를 입밖으로 내뱉었다.
“너는··· 미쳤어.”
이제서야 결심을 마친 것일까.
에스텔의 짧은 한마디를 기점으로 세계 전체에 압도적인 밀도의 힘이 퍼져나갔다.
막대한 카르마를 가진 에스텔의 권능이 내 힘을 짓누르고는, 세계에 보다 강하게 간섭하려는 것이다.
역행의 권능이 발동하면서 세계가 인과의 흐름을 거스르기 시작한다.
균형을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선은 절반이었다.
세계의 절반을 그녀에게서 돌려받는다.
그것이 인생 전부를 배팅한 내가 노리고 있던 리턴이었다.
“에스타시아. 이제 그만.”
“······네.”
질서를 거스르는 에스텔의 권능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더 이상 내가 권능을 사용해봐야 무의미했다.
나는 기도를 올리던 에스타시아를 제지하고서, 되돌아가기 시작한 세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가는건가요.”
무너져내린 건물이 영상을 되감듯이 서로 결합하기 시작했다.
뽑혀나갔던 전신주가 자연스럽게 지면에 되돌아갔다.
망가졌던 것들이 인과를 거스르며 원래의 모습을 서서히 되찾아간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역행의 권능은 무척이나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었다.
“그래. 좋은 경치네.”
“그러게요. 주인님 말대로에요.”
세계가 되돌아가고 있다.
내가 동경하던 온전한 세계는 아닐지라도, 이 세계 전체가 사람들이 살아숨쉬던 생동감넘치는 세계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랜 기억속에 묻어두고 살았을 세계의 풍경이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멸망하기 전의 세계는 무척이나 따분하고 지루한 곳이었다.
누군가는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해야만 했다.
또 누군가는 상사의 잔소리에 괴로워해야만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게임을 해야만 했다.
“누가 게임이라고 말해줘도 믿을 수 있을만큼 좋은 경치야.”
매일같이 반복되는 똑같은 하루.
변화라고는 쉽게 보이지 않는 지루한 나날.
피로와 책임감에 짓눌려살았던 괴로운 시간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 시절, 그 순간.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던 게임보다도 더욱.
에필로그
역행의 신 에스텔과의 싸움이 끝난 이후로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지난 1년동안 대륙에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풍요의 신전은 성지의 아래쪽으로 남하했으며, 교단이 제국의 국교를 차지하게 되었다.
살아남은 여섯 신전의 성직자들 역시 제국의 영향권 바깥으로 도망쳤다.
크로스브릿지에는 여섯 신전을 대신해 교단의 신전이 성대하게 지어졌으며, 성황이 된 로안을 필두로 교단의 조직구조 역시 크게 개편되었다.
그렇게 개편된 교단의 조직구조를 따라 교단의 교세 역시 크게 성장했다.
지상에 강림한 신을 마주하기 위해 수많은 신도들이 매일같이 성지에 찾아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오늘도 정말 멋지네요.”
물론 그렇게 찾아온 이들을 위에서 굽어살피는건 당연히 나의 몫이었다.
나를 만나기 위해 제국에서 성지까지 찾아온 이들이었다.
무례한 행동을 보인다면 제재를 가해야만 하겠지만, 나를 위해서 목숨도 바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이들에게 인사를 해주는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오늘도 신도들을 만나기 위해 성체에 맞는 예복을 입고 있으면, 내 예복을 골라주던 유테니아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지상에 강림한 이후부터는 이런 행사는 쭉 유테니아의 몫이었다.
그녀가 첫번째 사도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점도 있을뿐더러, 그녀가 나에게 빌었던 소원 역시 그 이유중 하나였다.
“네가 어울리는 옷을 잘 선별해준 덕분이다.”
나름대로 근엄한 말투를 흉내내며 유테니아의 질문에 화답하자, 유테니아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녀는 이러한 반응에 유달리 약한 편이었다.
내 칭찬 한마디에도 하루종일 행복해하는 모습이었고, 내게 선물을 받은 날에는 하루종일 성지를 돌아다니며 사도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유테니아에게 어째서 광신도라는 특성이 붙어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물론 내가 지상에 내려온 이후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이제와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맹목적인 사랑에 가까운 감정처럼 보이고 있었다.
“위대하신 분께는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는걸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르시스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은 제법 멋있는 편이었다.
원래의 나도 충분히 멋있는 편이긴 했다.
가끔 가다가 거울을 보면 1초정도는 연예인의 모습이 겹쳐보이고는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내 모습은 그보다도 조금 더 멋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육안으로 보이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외견이었다.
내가 거울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만족하고 있으면, 유테니아가 가까이 다가와 어깨에 망토를 걸쳐주었다.
“저는 진심인걸요.”
“그래. 언제나 진심이겠지.”
“그러니까, 위대하신 분께서도 저에게 진심이 담긴 한마디를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거울속의 유테니아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왔다.
그 모습을 보자 유테니아가 나에게 빌었던 소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지상에 강림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날.
내가 사도들에게 그들의 소원을 물어보았던 그때에, 오직 유테니아만이 특이한 소원을 빌어왔다.
그녀의 소원은 무척이나 투박하면서도 특별한 것이었다.
“사랑하고 있다. 유테니아.”
그럼에도 그 소원을 이루어주는 나에게 있어서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으로서의 위엄이 망가지는 그런 말을 어떻게 태연하게 내뱉는다는 말인가.
허나 유테니아의 뜻은 완고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나도 부끄러움을 감수하고서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주세요. 그게 제 소원이잖아요.”
“이 세계에서 너를 첫번째로 사랑하고 있다.”
일체의 거짓도 담겨있지 않은 한마디였다.
유테니아 하이로스트.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그에 그녀는 만족하면서 눈을 감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네요. 위대하신 분께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서.”
행복해하는 유테니아의 모습을 보면서 그날의 기억을 머릿속에 조금씩 되새겨본다.
언젠가, 그녀가 나에게 소원을 빌었던 날.
나는 그때의 유테니아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이 세계에서의 남은 생애 전부를 그녀를 위해 쓰겠노라고.
분명 그것만이 나의 첫번째 사도에게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 * * * * *
강렬한 태양이 내리쬐는 바다 한가운데.
그곳에서 심연마수 쿠에베르그는 머리에 파라솔을 꽂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쿠에베르그 본인의 의사는 아니었지만, 그의 머리에 앉아있는 세입자들의 강한 요청에 따른 일이었다.
쿠에베르그의 머리에 앉아있는 흡혈귀들은 햇빛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편이었으니까 말이다.
쿠에베르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플루토를 향해 느긋한 목소리로 의사를 전달했다.
–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건가?”
“여긴 흡혈귀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햇볕을 가리는 파라솔의 아래에서 플루토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는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외딴 섬을 보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런 플루토의 오른쪽에는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보필하고 있는 에이린의 모습이 있었다.
한때 성녀였다는 사실은 진작에 잊어버렸는지, 에이린은 무척이나 플루토에게 순종적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지금까지 플루토의 옆을 따라다닐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 “뭐가 문제인거지?”
“피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햇볕이 너무 강하잖아. 차라리 어디 밀림에 들어가서 사는 편이 낫겠어.”
플루토의 이야기에 쿠에베르그가 분수를 내뿜었다.
툭. 투두둑.
힘껏 빨아들였던 바닷물의 일부가 파라솔의 위에 떨어져내렸다.
가벼운 물장난을 친 쿠에베르그는 등에 있는 세입자들을 향해 짧은 불만을 표했다.
– “조건이 까다롭군.”
“심연에서도 환경을 가리는 마수들은 있지 않았어?”
– “심연은 하나같이 최악의 환경이었다. 거주할 곳을 가리고 있을만한 여유는 없었다.”
“······.”
쿠에베르그의 말에 플루토는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내 깔끔하게 고민을 접고서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흡혈귀의 나라를 세우기에 알맞은 땅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햇볕이 강한 곳에 나라를 세우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여기는 안되겠어.”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에 쿠에베르그가 잠시 멈추어섰다.
하지만 이내 쏘아내던 분수를 거두어들이며 그녀에게 답했다.
– “그런가.”
“미안하지만 계속 움직여줘. 조금 더 어두운 곳을 찾아서 움직이자.”
쿠에베르그를 향해 이야기를 마친 플루토는 손바닥으로 쿠에베르그의 머리를 몇차례 두드렸다.
퉁. 퉁.
부드러운 살갗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쿠에베르그는 불만으로 가득찬 물장구를 보여주고서는, 이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장구를 치는 쿠에베르그를 보던 에이린은 쿠에베르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이야기했다.
“아무리 괴물이라도 시조님 말에 거역하면 용서하지 않을거에요.”
– “흡혈귀들은 하나같이 예의가 없군.”
그렇게 두명의 세입자를 태운 쿠에베르그는 바다를 가르며 미지의 땅을 찾아나섰다.
흡혈귀의 나라를 세울 적당한 땅을 찾을 때까지,
세 괴물의 여행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 * * * * *
성지, 크로스브릿지.
이제는 교단의 성지가 되어버린 장소에서 피터는 따분함에 가득찬 눈으로 자신의 왼쪽을 보았다.
피터의 왼쪽에는 난간에 걸터앉은 페린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난간에 앉은 채로 사과를 한입 가득히 베어물고 있었다.
사과를 먹는 페린의 얼굴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거 맛있냐?”
“맛있어요. 마부도 한 입 먹어볼래요?”
피터의 질문에 페린은 한입 베어먹은 사과를 내밀면서 이야기했다.
피터는 잠시 페린이 내민 사과를 바라보다가,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스타시아가 회의에서 사라진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페린의 호칭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 모습이었다.
“······됐다.”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쉰 피터가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피터가 서있는 난간의 오른쪽에는 가벼운 갑옷차림의 에반이 자리한 모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무게감있는 얼굴로 인파가 들어찬 성지의 길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피터는 지상을 내려다보는 에반을 향해 아까전부터 보이지 않던 다니엘에 대해 물어보았다.
“다니엘님은 어디로 갔답니까?”
“위대하신 분을 위한 잔치에 쓰일 고기를 준비하러 갔다.”
에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몇번이고 들어서 익숙해진 패턴이었다.
농부를 자처하는 그가 평소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닌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었다.
암살자를 본업으로 삼고 있는 다니엘이지만, 그의 도축실력만큼은 군더더기없이 깔끔했다.
사람을 소리없이 죽이기위한 암살기술을 동물을 이용해 터득한게 분명했다.
이제는 그렇게 쌓아올린 기술을 이용해 성지에 오는 고기를 가공하고 있는 다니엘이었다.
“거 참, 그게 다 위장용 직업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러신답니까.”
“글쎄. 위대하신 분을 위한 고기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군.”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던 암살자가 소나 돼지를 잡는 일에 만족한다니.
피터로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만약 자신이 다니엘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결코 그런 수준에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야망을 가지고 전세계에 자신의 위명을 떨치려고 들었을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피터의 생각과 정반대로 움직였기에 그가 은밀한 암살자가 되었겠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니 위대하신 분께 빌었던 소원은 이루어졌나?”
난간에 기대어있던 피터가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번에는 에반이 먼저 그를 향해 질문을 던져왔다.
위대한 존재에게 빌었던 소원.
모든 대업이 끝난 이후, 그가 사도들에게 약속했던 소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연하지만 피터는 잃어버렸던 자신의 가족들을 되돌려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그런 피터의 소원에 대해 그의 주인은 3년의 유예를 내걸었고 말이다.
아직은 피터의 가족이 돌아오기까지 2년이나 남았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2년이나 남았습니다.”
“분명 위대하신 분께서 3년을 기다리면 이뤄주겠다고 하셨던가.”
“그렇게 약속하셨죠.”
“벌써 1년이 지나갔으니, 남아있는 시간도 금방 지나갈거다.”
태연하게 그런 말을 늘어놓는 에반의 모습에 피터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쓸었다.
다니엘도 그렇고, 눈앞의 에반도 그렇고, 하나같이 초탈한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이었다.
위대한 존재가 소원을 물었을때도 소박한 꿈을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날 에반이 빌었던 소원은 알레미어 가문의 번영이었다.
당당하게 정신나간 소원을 빌었던 ‘그 여자’와는 명백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에반 경은 참 대단한 것 같네요. 가끔 보면 욕심이란게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보이나?”
“그렇죠. 잘 생각해보면 위대하신 분 앞에서 하루에 한번씩 사랑한다고 말해달라던 정신나간 여자도··· 읍읍······.”
태연하게 유테니아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피터의 입을 에반의 두터운 건틀릿이 가로막았다.
피터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입을 가로막은 에반의 모습을 보며 의문을 표했다.
셋만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낸 것인데,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에반은 진지한 얼굴로 그를 향해 경고의 이야기를 전했다.
“유테니아는 크로스브릿지 전역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가능하다면 조심하는 편이······.”
– “이미 다 들었어요.”
에반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에서 뻗어나온 손이 피터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뒷덜미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손길은 피터를 건물의 기둥에 쳐박았다.
쿠웅!
둔탁한 충격과 함께 피터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비명을 내질렀다.
전신에서 전해져오는 통증에 피터는 토가 쏠릴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끄아악······!”
“미리 조언했어야 하는데, 너무 늦어버렸군.”
기둥에 쳐박힌 피터를 보며 미소를 지은 에반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쓰러진 피터를 향해 손을 뻗은 에반의 머리 위에서는 태양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 * *
에스텔이 인과의 흐름을 역행시킨 이후.
제법 긴 시간을 거쳐 지구는 상당한 수준까지 회복될 수 있었다.
비록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고 상당한 숫자의 기반시설이 망가졌지만, 인류는 그만큼의 상처를 이겨내고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만큼 강인했다.
매일같이 같은 내용만이 반복되던 성역의 TV에서는 새로운 내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침묵하며 멈춰있었던 인터넷에도 새로운 정보들이 매일같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만이 존재하고 있던 망가진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성역만큼은 여전히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있었지만, 그건 세계의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스타시아. 네가 떨어뜨린 깃털 좀 정리해라.”
파멸의 힘을 가진 타천사가 하나.
지나치게 성실한 천사가 하나.
그리고 신격을 가진 존재가 둘이나 존재하고 있는 공간이었으니까 말이다.
세상의 평온을 위해서는 거주구역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는게 정답이었다.
물론 가끔은 장을 보러 나가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끔에 불과했다.
기본적인 전제는 초월적인 존재들을 이곳에 억누르고 있는 것이었다.
“싫어요.”
다만 안타깝게도 나와 함께 사는 동거인—— 아니, 동거천사는 극히 불친절한 편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TV를 보고있는 주제에, 바닥에 떨어진 깃털은 외면하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입에 넣으며 무척이나 단호한 태도로 내 부탁을 거절했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에스타시아를 향해 조금 더 강경하게 나설 필요성을 느낄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게으르다고 하더라도 신의 명령이라면 듣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래? 그럼 명령이야. 좀 치우고 살자.”
“에스타시아는 주인님 명령도 안들어요.”
“······왜?”
“그게 타천사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퍼먹는 에스타시아였다.
냠.
한입 가득 아이스크림을 집어넣고 우물거리는 에스타시아의 모습에 나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그렇게 말하니까 무어라고 대답해야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까닭이었다.
에스타시아를 타천사로 만들어버린건 나였으니 부정하기도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에스타시아. 청소정도는 하는 편이 좋아요.”
보다못한 아로니아가 옆에서 에스타시아를 향해 한마디를 거들어왔다.
그녀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서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에스타시아에게 이야기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그녀를 향한 에스타시아의 대답이 무척이나 차가운 편이었다.
“어차피 아로니아가 전부 할거잖아.”
“······.”
“나는 안할래.”
끼이이이익.
에스타시아의 대답을 들은 아로니아의 고개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나를 향해 돌아갔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눈은 나에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금이라면 옳은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의 편을 들어줄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본인 깃털은 본인이 치우는게······?”
“힘내라, 아로니아.”
“주인님!”
다만 나는 그녀를 향해 응원을 전해줄 뿐이었다.
지금의 내 논리로는 무적의 타천사 논리를 파훼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아로니아를 향해 짧은 응원을 전달한 나는 새로 구매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에스타시아와 아로니아가 있는 이 공간에서 떠날 채비를 했다.
신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해야하는 일이 많은 편이었다.
“나는 이만 옥상에 올라가야 될 것 같은데.”
“제발 열심히 하는 천사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아로니아는 옥상으로 가려는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비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악신이었다.
나는 가차없이 아로니아를 내버려두고서 방을 빠져나갔다.
방을 나가면서도 아로니아와 에스타시아에게 단단히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돌아올때까지 깃털 전부 치워두고. 아이스크림도 적당히 먹고.”
“다녀오세요.”
쿵.
아로니아의 통곡소리와 에스타시아의 배웅을 받으며 문을 닫으면, 재건되기 시작한 도시의 풍경이 멀찍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도시의 풍경은 무척이나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헤드라이트를 키고 있는 자동차가 도로를 달려나가며, 수많은 인부들이 망가진 도시를 복원해나가고 있었다.
얼마전까지 불이 꺼진 채로 죽어있던 도시의 풍경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참 보기 좋은 풍경이야.”
되돌아온 사람들을 볼때마다 가슴속에 뿌듯한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전부 되찾지는 못했지만, 손에 넣은 절반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이것이 지상의 인간들을 바라보는 신들의 감정인걸까.
비록 그들이 나에 대해 모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얼마든지 사랑할 것이다.
그들이 보고싶어서 밤을 지새던 수많은 나날들이 내 기억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네.”
피식.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무도 없는 계단을 걸어올라간다.
몇번이고 걸어올라갔을 계단은 예전과는 다르게 깨끗해진 모습이었다.
아로니아가 부지런히 청소를 해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렇게 올라간 계단의 위에는 불길한 기운이 흐르는 커다란 새장 하나가 놓여있었다.
물론 새장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익숙한 얼굴의 소녀였다.
“요즘 들어서 자주 찾아오네.”
“여기 계신 여신님이 도망갈까봐 걱정되거든. 다시 한 번 세계가 멸망하면 큰일이잖아?”
역행의 신, 에스텔.
대부분의 힘을 소진하고서 약화된 에스텔을 내가 이곳에서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새장안에 갇힌 에스텔은 손에 쥔 책을 느긋하게 읽고 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아로니아를 시켜 그녀에게 챙겨주었던 물건이었다.
나는 에스텔을 억누르고 있는 새장에 기대어 앉아서는, 책을 읽는 에스텔을 힐끔 바라보았다.
에스텔은 본인과 퍽 어울리는 고풍스러운 제목의 책을 읽고 있었다.
“어제는 잘 지냈어?”
“그럴리가 없잖아. 어떤 분이 이렇게 가두어놓고 있는걸.”
“봉인이 풀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도 신의 임무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고서는 에스텔을 가두어둔 새장의 견고함을 확인해보았다.
손끝에서 전해져오는 강대한 기운이 자신의 건재함을 알려오고 있었다.
아직은 새장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에스텔의 힘이 충분하게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는 이 새장도 무너질거란건 알고있잖아?”
“뭐, 그런 날도 오겠지.”
“그때가 되면 내가 가만히 있을거라고 생각해?”
새장을 점검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에스텔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경고를 전해왔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내 힘으로 영원히 에스텔을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에스텔 자신의 힘으로 이 새장을 부수고 빠져나오는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100년 뒤가 될지, 1000년 뒤가 될지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그때가 되더라도 내 행동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다시 너를 막아야겠지.”
“막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거야?”
“아직은 잘 모르겠네. 그때쯤이면 나도 충분히 훌륭한 신으로 성장해있지 않을까?”
앞으로도 나는 몇번이고 에스텔의 앞을 막아설 것이다.
그녀가 이 세계를 망치려고 드는 모습을 두 번 다시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신이라는 존재에게 주어진 역할일테니까.
몇번이고 이 세계를 망가뜨려서, 몇번이고 이 세계를 다시 구해낼 것이다.
그것만이 파멸의 이름을 가진 내가 짊어질 수 있는 유일한 업이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걸.”
“너라면 당연히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았어.”
여전히 차가운 대답을 늘어놓는 에스텔을 등뒤에 두고서, 나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도시에서 새로 구매한 스마트폰은 새것임을 증명하듯이 깨끗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스마트폰의 액정에 손가락을 뻗어 화면의 잠금을 풀었다.
스윽.
손가락이 넘어간 자리에서 사도와 신도들의 사진이 보이고 있었다.
건너편의 세계에서 내가 촬영한 이미지를 받아와 스마트폰의 배경화면으로 설정해놓은 것이었다.
“꽤나 악취미네. 그렇게 당하고도 결국 스마트폰에 사진을 넣어놓는거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거라서.”
“지극한 정성이구나.”
에스텔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진속에 보이는 사도들의 면면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유테니아. 에반. 플루토. 페린. 다니엘. 피터.
그리고 그 가운데 서있는 성황 로안까지.
시간이 지나더라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소중한 추억들이 그곳에 남아있었다.
“이렇게 넣어두는 편이 좋잖아?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싶은 것들이니까.”
“······.”
툭.
화면속의 사도들을 지켜보던 나는 화면을 기울여 그것을 에스텔에게 보여주었다.
에스텔의 무뚝뚝한 눈동자가 스마트폰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사도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나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함께 스마트폰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진 하늘 아래에서도 스마트폰의 액정은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은거지.”
조그마한 스마트폰 액정의 너머.
그곳에는 세계가 있다.
결코 잊어버리지 못할 소중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내가 있다.
스마트폰 너머의 악신님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