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03
어쩌구 왕자
바다엔 드문드문 놀러 온 사람들이 보이긴 했지만, 그들도 다른 관광객에게 신경을 두지 않아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일부러 서혼 형이 사람이 없는 바닷가로 골라준 것 같다.
우리는 누가 봐도 물놀이를 즐겼다는 표시를 잔뜩 내면서 바다에서 나왔다. 혼자 래시가드를 입지 않은 서혼 형이 바닷물을 짠다고 웃통을 벗었다가 멤버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쉰다고 그새 헬스장에서 살았어?”
컨셉 때문에 운동 시간을 제한당했던 서혼 형의 몸은 휴식기(?)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또렷하게 갈라진 장골과 복근은 옷을 입으면 안 보이니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팔과 가슴 근육이 잔뜩 펌핑되어 있었다.
“머리 긁적이면 끝이야? 어휴.”
이골이 난 듯, 초록 형은 한숨만 쉬고 잔소리를 더 추가하진 않았다.
“코티지들은 좋아할 텐데. 왜.”
노출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코티지들은 그렇지 않을 거다. 짓궂긴 해도 순수하니까.
“코티지들은! 좋아하겠지!”
오란에 이어 박하까지 코티지들이 좋아할 거라고 단언했다. 그럴 리가…?
“내가 다 찍어뒀어!”
박하한테 카메라를 맡긴 건 큰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회사 직원이었다면 적당히 넘겼을 장면도 전부 찍어버리는구나.
“역시~ 잘했어. 자연스러운 노출, 얼마나 바람직해? 서혼 형이 성인이라 얼마나 다행이야. 미성년자였으면 이 훌륭한 몸을 꼭꼭 숨겨둘 뻔했네. 아깝게.”
서혼 형의 몸매마저도 상품으로 내놓는 초록 형의 냉정함이 두려웠다.
팬들이 좋아할 거라고 판단을 내리면, 내 부끄러운 과거도 마구 뿌려버릴 것 같아서.
인, 무슨 왕자 같은 별명이라던가 하는….
“원래 일정은 펜션 들어가서 씻고서 스카이타워….”
“우우우~! 낮잠 타임 하자! 낮잠! 물놀이엔 역시 낮잠이지!”
“오란아. 애들 피곤한 거 같은데.”
“하, 알았어. 쉬다가 저녁 먹고 야시장이나 가자.”
지금 여행 일정도 오란 기준에선 듬성듬성 짠 거지만, 자유 여행파 박하는 그마저도 불만스러운 듯했다. 하긴, 물놀이는 에너지 소비가 크니까.
오란도 그걸 인지하고 계획을 바꿔준 듯했다. 억지로 끌고서라도 갈 것 같이 으름장은 다 놓고서.
“이렇게 다 져줄 거면서.”
“뭐라고 했냐?”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귀를 후비적거리는 행동마저 오란의 외모 보정을 받았다.
오란은 저 외모를 물려준 부모님께 백 번 감사해도 모자란다. 비즈니스 모드로 변신하는 오란을 목격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진저리치듯 머리를 흔들었더니 오란의 눈썹이 삐쭉 솟았다. 자기 때문에 그러는 걸 아는 모양이다.
“한번은 넘어가 준다. 함이원.”
눈치는 빨라 가지고….
* * *
저녁도 식당으로 먹으러 오라는 서혼 형 부모님의 권유를 간신히 뿌리쳤다.
우리가 불편할까 싶어 식당을 휴업까지 하신 분들이다. 한번은 갈 수 있지만, 연속으로 두 끼나 부탁드릴 순 없었다.
초록 형이 많이 아쉬워해서 사람이 없는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사람이 방문하지 않는 애매한 시간에 한 번 더 들르기로 했다.
저녁 메뉴는 신선한 숭어, 삼치, 병어 모듬 회와 갑오징어 샤브샤브.
매운탕까지 맛있게 먹는 동안 우리를 알아보는 분들이 계셔서 사인과 사진 촬영을 해드리기도 했다.
젊은 여자 두 분이셨는데, 둘이 속닥거리다가 수줍게 태블릿을 내미셨다. 사인받을만한 물건이 없으니 태블릿 케이스에 해달라고.
코티지라고 밝힌 두 분은 이 멀리에서 볼 줄은 몰랐다면서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끼리 여행을 왔다고 하자, 볼만한 관광지를 추천해주기까지 하셨다. 아직 서혼 형이 여기 출신인지 모르시는구나.
“아까 그분들이 우리 먹는 양 보고 놀라시던데.”
“목격담 당첨이네.”
자꾸 뭔가를 시켜주려고 해서 사양하느라 애를 먹었던 이유가 있었다. 잘 먹는 게 신기해서 자꾸만 먹이고 싶었던가 보다.
이 사태를 만든 초록 형이 딴청을 피웠다.
나머지 멤버들은 ‘코티지’임을 밝힌 우리 팬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코티지라는 이름을 오프에서 실제로 들으니까 이상하다.”
야시장의 복작복작한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걸었다.
실상은 포차 거리에 가까운 길을 여섯이서 가로지르니 말 거는 분은 더 없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기도 했지만, 사적인 시간이라 양해해주시는 듯했다.
“그분들도 팬덤 명 투표했던 초가삼간일까?”
초가삼간이라고 부를지, 코티지라고 부를지 머릿속으로 잠깐 고민했다.
“이원이한테 찍히지 말자, 우리.”
“그러게! 여태 초가삼간의 원한을 잊지 않는다니!”
“시작은 코티지들이 했어.”
나를 실컷 놀린 코티지들에게 이런 복수는 개미가 신발에 올라탄 정도 아닐까? 간지럽지도 않다는 의미로.
“팬들이랑 기 싸움?”
“아니야, 지온. 이건 밀당이라고 하는 거야.”
친절한 척 왜곡된 설명을 덧붙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목소리만 나긋하다고 해서 그 속에 담긴 날 놀리려는 속뜻이 달라지진 않아!
“Ah, 밀당! 그거구나.”
아니라고 해명해도 들어줄 것 같지 않다. 지온에게 잘못된 지식을 심어주는 초록 형을 말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진실은 언제고 승리하는 법이니까!
* * *
여행 첫날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우리는 펜션 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방향을 돌렸다. 마침 펜션 앞에 바닷가가 있어서 한적한 밤바다 산책을 하기로 했다.
펜션까지 바래다주러 왔던 서혼 형도 덩달아 밤 산책을 하게 됐다.
한참을 바람을 맞으며 느리게 걷다가 다리가 아파져서 백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짠!”
아까 박하가 왜 펜션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왔나 했더니 불꽃놀이를 가져오느라 그랬구나. 박하가 들고 온 불꽃놀이는 쏘아내는 불꽃놀이가 아니라 막대형 스파클라였다.
“분위기 잡아보려고 준비해왔지! 나 준비성 최고지!”
파도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바닷가에서 불꽃놀이라. 해본 적은 없지만, 썩 괜찮은 선택 같았다.
둥그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앉은 멤버들은 손에 하나씩 스파클라를 들고 불을 붙여주기만을 기다렸다.
“…어떡하지? 불이 없어!”
어이가 없었다. 라이터도 준비하지 않고 불을 붙이려고 했다니. 초록 형이나 서혼 형은 소리도 없이 어깨만 떨고 있었다.
지온은 모래 가득한 바닥에 팔을 베고 털썩 누워버렸다. 누가 어떻게든 해결하겠지 하는 느긋한 심보가 느껴졌다. 태평함으로는 제일이다.
기가 찬 지 헛웃음을 짓던 오란은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며 일어났다. 그러더니 주위를 걷던 사람에게 다가가서 라이터를 빌려와서 박하의 손바닥에 턱 올려줬다.
“됐냐?”
“난 오란 형만 믿었어! 최고야!”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진 박하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야. 뛰지 마. 모래 튀어.”
“웅웅~. 나는 안 들려용~!”
오란이 눈이 더러워진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든 말든, 박하는 우리의 스파클라 심지에 불을 붙여줬다.
치지직?
어두운 백사장 한가운데 작은 빛 덩어리가 우리 주위를 밝혔다. 따스한 색의 불꽃이 타들어 가는 모습이 아련했다.
모래 위에 둘러앉아 가만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감상에 빠졌다.
이 조그만 불빛이 캠프파이어 대신이라도 되는 양, 그리운 사람을 찾게 되는 건 순리였다.
“한 명씩 비밀 얘기할까?”
스파클라가 사그라드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두고 초록 형이 말을 꺼냈다.
진실 게임은 아니었다. 비밀을 캐내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벌칙을 받지도 않는, 변덕이 만들어낸 시간이었다.
“좋아.”
“콜.”
불꽃에서 눈을 떼어내지 않은 채로 하는 대답 소리가 양옆에서 들려왔다.
“그럼 다들 동의한 걸로 알고 나부터 할게.”
초록 형에게서는 어떤 비밀이 나올까. 하나도 예상이 되지 않았다.
“이원이한테 험한 소리 한 그 자식, 내가 묻어버렸어.”
“……!”
알고 싶지 않던 진실이, 무덤을 파헤치고 세상에 드러나 버렸다.
초록 형이 한 일이라고, 정말로?
“내가 그럴 줄 알았지. 그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된다고.”
“적어도 한 명은 몰랐던 것 같은데?”
입을 뻐끔거리는 나를 힐끗 보고는 초록 형이 목 울림소리를 냈다. 오란이 혀를 차는 소리가 뒤이었다.
초록 형에게 제대로 찍히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지 않았는데. 우리에게 무섭게 대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초록 형 눈 밖에 나는 일은 저지르지 말아야지. 절대로.
“다음은 내가 말할까?”
다음 타자는 서혼 형이었다. 왠지 얼굴 근육이 굳어있는 듯해서 이상했다.
“나 사실은, 입양아야.”
“……!”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진짜로.”
농담으로 하기엔 너무 예민한 주제였다. 최대한 가볍게 말하려고 단숨에 얘기한 것 같았지만, 그 무거운 진심은 숨길 수가 없었다.
“갓난아기 때 입양돼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 평소엔 나도 잊고 살기도 해서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그래도 너희에게는 얘기해주고 싶어서.”
다른 멤버들도 놀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랜 세월을 가족으로 지내서 그런지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해서 더 그랬다.
서혼 형이 밝히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모를 수도 있던 이야기였다.
“얘기해줘서 고마워, 서혼 형.”
이런 주제를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긴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본인에게는 현실의 문제니까.
“꺼내기 어려운 얘기였을 텐데. 우리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난 가볍게 꺼낸 제안인데 이러면…. 이 얘기가 어디 새 나가면 죽을 줄 알아라.”
“어, 초록아. 괜찮은데.”
방금 초록 형이 밝힌 진실이 있어서 이 협박을 흘려넘길 수 없었다.
만약 서혼 형의 비밀이 새어 나가면 범인은 우리 중에 있는 것. 그렇게 되면 범인을 잡기 전까지 초록 형이 어떻게 나올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혼이 형이 먼저 말 꺼내줬으니까 나도 말해줄까!”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낸 박하와 부모님의 무관심을 말한 지온까지.
다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곤 속으로 상처를 숨기고 있었던 걸까.
“나는 비밀이 없는데? 우리 부모님 돌아가시고 형이랑 둘이 사는 건 알잖아. 흠, 비밀이라고 할 거는…. 아, 나 최근에 팬카페 가입했어.”
다들 팬카페에 가입했다고 들었고, 나도 박하의 권유로 가입했다. 조만간 공식 ‘코티지’ 1기를 모집할 거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오란이 팬카페에 가입했다는 이야기에 놀랄 이유가 없었다.
“‘인어21왕자’로. 참고로 숫자로 21은 이원이라고 읽어.”
“…뭐? 미쳤어?”
제발 농담이기를. 그러나 오란은 부정해주지 않았다.
“최근 깨달음이 있었어. 이게 입덕 부정기인가 싶더라고. 그래서 이제 부정하지 않고 함프로 활동하려고.”
“함, 프?”
“함이원 프로필, 그렇게 부르던데? 나는 같은 그룹에 있으니까 성덕이겠지?”
“아, 제발….”
“흐.”
내가 정색하는 걸 흐뭇하게 즐기는 오란을 보자니 울분이 올라온다.
나를 마스코트 취급하더니 그걸로도 모자라서 팬이 되겠다고? 내 개인 팬? 그 홍오란이?
오란의 의도는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내게 은근히 시비를 걸었던 행동이 있으니까.
게다가 왜, 하필이면 닉네임이 그건데!
“인, 그거는 어디서 들었어?”
“누구겠어?”
“…초록 형?”
고개를 홱 돌리자 여우처럼 가늘게 휜 눈매가 날 맞이했다. 초록 형의 음흉함을 얕본 내가 바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