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05
돌아가는 길
현오 형에 대해 털어놓은 밤.
스파클라를 정리하고 모래를 밟으며 펜션으로 돌아온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더는 멤버들에게 숨기는 이야기가 없으니 후련한 마음으로 안심하고 잠들어도 될 날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잠이 오지 않아서 베란다로 나가 난간에 기댔다. 별이 선명하게 보이는 하늘을 마냥 바라봤다.
왜 마음이 이토록 심란할까? 모든 일이 잘 풀린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이원. 안 자?”
“지온, 넌?”
“자다 깼어.”
기다란 로브를 걸치고 온 지온이 베란다 난간에 허리를 걸치고 거꾸로 나를 응시했다.
“아깐 말 못 했는데, 너 억지로 그 사람 얘기 꺼냈어? 우리가 다그쳤나?”
“아니, 그건 아니야.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기분이 가라앉는지.”
“이원, 너는 기억에 파묻힌 거다. 좋든 나쁘든 기억은 힘이 세.”
현오 형의 기억을 꺼내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멤버들에게 말하는 거니까.
그렇지만 현오 형에 대한 기억의 책을 본격적으로 꺼냈더니 걷잡을 수 없이 펼쳐져 버렸다. 난 그걸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고.
더군다나 현오 형과의 기억은 마냥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다. 아릿한 감각이 공존하는 기억이었다. 이 감정은 또 어떻게 도닥여야 할까.
“해결법은 매우 simple.”
이 기분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듣고 싶었다. 지온은 흔쾌히 그 방법을 알려줬다.
“인정해. 네가 그 기억에 휘둘리고 있다는 걸. 그리고 충분히 즐겨.”
“…즐기라고?”
“영원히 기억의 늪에 잠길 수는 없어.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라서.”
현오 형을 잊고 싶지 않아도 언젠가 오게 된다는 거구나. 형과의 추억이 흐릿해지는 날이.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시간이 더 흐른다면 어떻게 될지는 명백하다.
내 기억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할 순 없을 거다.
지온의 말대로 현재의 싱숭생숭한 기분을 즐겨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오늘을 그리워할 날이 올 거라면, 먼 훗날을 위해서 지금은 최선을 다해 현오 형을 기억해야 하는 건 아닐까.
“조언 고마워. 지온.”
“하루쯤 늦게 자. 내일도 휴가니까.”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지온은 평소에 아무 데서나 쉽게 잠드는 타입. 그런 지온이 애매한 시간에 깨서 2층 베란다까지 일부러 왜 나왔을까. 나한테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들어가서 자도 돼. 나 혼자라도 괜찮아.”
“흠, 그래?”
지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배정받은 방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별이 초롱초롱한 밤하늘 아래, 나는 하늘을 보면서 마음껏 현오 형에 대한 기억에 잠겨 들었다.
여느 때와 달리 스스로,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이.
* * *
휴가 둘째 날 아침인 오늘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깨어나 보니 11시가 넘은 시각. 멤버 누구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깨우지 말자고 멤버들끼리 이야기라도 했나?
어젯밤, 아니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정오가 가까워지도록 자고도 비몽사몽 한 상태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뽀송한 상태의 멤버들과 내 몰골이 비교돼서 살짝 부끄러웠다.
“푹 잤어? 이제 깨워볼까 했는데 알아서 일어났네.”
서혼 형에게서 늦은 아침 인사를 들으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지온이 잠 깨라면서 차가운 작두콩 차가 담긴 유리컵을 내밀었다.
시원한 컵을 두 손으로 잡고 있다가 얼굴에 댔다. 시리게 차가운 감촉에 잠이 달아났다.
“오전 일정 전부 취소돼서 좋았어!”
그러고 보니 오늘 오전에도 오란이 짜놓은 여행 계획이 있었을 텐데, 못 가게 됐구나. 오란의 눈치를 슬쩍 봤는데 평온 그 자체였다.
응…?
“오란 형이 이원 형 완전 편애해! 형이 안 일어났다니까 나보고 깨우지 말고 가만히 있으랬어! 내가 늦잠 자면 등짝 때려서 깨울 거면서!”
소파에 앉아있던 박하가 부엌으로 들어오면서 투덜댔다.
“그래? 홍오란은 툴툴대면서 친절하지 않아?”
“하! 오란 형이 얼마나 차별하는지 이원 형은 모를 수밖에! 그야, 오란 형은 무려 ‘인어21왕자’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 아니겠어?”
“…….”
오란은 왜 하필이면 저런 닉네임을 선택해서는. 멤버들이 두고두고 기억해뒀다가 우려먹을 미래가 보였다.
오란의 약점이라도 찾아서 딜을 걸어야 하나?
그렇지만, 오란은 약점도 약점이라고 인정을 안 할 사람이다. 포기하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다.
“나가서 점심 먹고 설렁설렁 둘러보자.”
이미 여행 계획이 엉망이 돼서 오란이 우리를 풀어두기로 한 듯싶다. 나도 그 결정이 반가웠다.
“느슨한 자유 여행 너무 좋아!”
충동적인 여행을 하고 했던 박하는 당연히 대찬성이었다.
미리 짜둔 여행 일정대로 돌리겠다는 오란의 야심 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건 진즉에 예상했다. 멤버들 한정으로 무른 녀석이라.
“드라이브하다가 경치 좋은 곳에서 멈춰도 좋겠다. 점심은 내가 아는 집에서 먹자. 로컬 맛집인데 가족끼리 자주 가는 숯불 갈빗집이야.”
서혼 형의 입맛은 믿을 게 못 되지만. 입맛이 까다로울 가족들이 자주 간다면 믿을만했다.
“고기고기! 너무 좋아, 고기!”
벌써 신나서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박하를 간신히 말려두고 후다닥 씻고 나왔다.
아침 운동에 외출 준비까지 마친 멤버들은 그동안 여유롭게 TV를 시청했다.
머리를 말리고 반팔 위에 길이감이 있는 린넨 셔츠를 걸치고 나오자 TV를 보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재밌게 보는 거지?
TV에서는 먹방 프로그램인 이 재방송되는 중이었다. 그것도 테오라 멤버들이 나오는 회차가.
“이원이 너도 신기하지. 딱 TV를 틀었는데 우리가 나오더라.”
서혼 형이 다정한 설명이 덧붙여주는 동안 초록 형은 턱을 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만개했다.
“초록 형, 무슨 문제라도?”
“…저 때 더 먹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그런 문제?!
그냥 TV를 보면서 그때 먹었던 마라탕의 맛을 상기하며 아쉬움을 곱씹고 있던 모양이다.
우리가 촬영했던 마라탕 가게는 자주 가기엔 먼 거리에 있었다. 초록 형이 자제하면서 먹기도 했고.
무슨 일 있나 괜히 걱정했다. 이게 다 초록 형이 홍채를 다 드러내서 그런 거다.
“준비 끝났으면 나가볼까?”
“두근두근 테오라의 여행 2일 차! 시작해보겠습니다!”
왜 박하가 혼잣말을 하나 했더니 어느새 캠코더를 자신을 향해 든 채였다.
아, 우리 셀프캠 찍기로 했었지. 여행 영상에 내 목소리가 별로 들어가지 않은 느낌이라 힘내서 말을 붙여야겠다 싶었다.
카메라 렌즈가 나를 향할 때, 최대한 활짝 웃으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이원이도 함께 출발해볼게요!”
“큽!”
“으하하!”
“웃기려고 작정했냐? 크흡.”
어리둥절해하는 나만 빼놓고 멤버들은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웃어젖혔다.
…왜? 왜 다 웃지? 원래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멤버들은 한참을 웃은 후에야 우쭈쭈 모드로 나를 달래기 바빴다. 뭔가 오류가 있었던 모양이다.
TV에서 나오던 아이돌이 하던 애교를 따라 했을 뿐인데. 어색해서 이상했던 건가. 그 멤버는 귀엽다고, 잘 어울린다고 은근 빠져든다고 난리였는데.
아, 나랑은 안 어울렸나. 누가 시키더라도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차에 타서 이동하면서도 멤버들은 열심히 변명을 늘어놨다.
“귀여웠다니까?”
“우리가 너무 웃었지? 귀여워서 그랬어.”
귀엽다는 이유로 배가 아플 때까지 웃는다고? 내가 아무리 어수룩해도 빈말도 못 알아차릴 사람은 아니다.
서혼 형도 유독 나에게만큼은 건성건성 둘러대는 것 같은데.
“코티지들은 좋아할걸. 그럼 된 거 아냐?”
오란의 말에 일리가 있긴 하다.
“으음?”
내가 잠깐 쪽팔려서 코티지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한 몸 희생할 수 있다. 그것이 멤버들이 폭소하는 상황이라도.
아무런 대가 없이 테오라를 좋아해 주는 팬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건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는 무대와 우리들의 일상뿐이니까.
거기에 재미를 보내서 조금이나마 덜 미안해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 허술함을 보여줄 수 있다.
“저기 파란 간판 보여? 저기야.”
여수 외곽에 있다 했더니 널찍한 주차장 안에 차들이 빼곡했다. 맛집 인증은 확실하게 됐다.
“그럼 초록이도 들어가 볼게요!”
“박하도 고기 먹으러 갈게요!”
“제톤, Let’s go!”
“오란이도 가볼게요오!”
“혼이도 멤버들 챙겨서 가보겠습니다!”
“하아….”
한숨이 절로 터졌다.
각자 자기 이름을 넣어서 삼인칭으로 지칭하는 단합력을 보였다. 왜 나 놀릴 때만 척척 뜻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앞으로 얼마나 시달릴지 생각하니 앞이 깜깜하다. 빨리 질리기만을 기도해야 할까 보다.
반응해주지 말아야지. 마음을 단단히 굳히면서 숯불갈비를 먹으러 들어갔다.
향기로운 숯불갈비의 향에 저절로 표정이 풀어지려는 걸 애써 참아내면서.
* * *
친구 여럿이서 여행을 온 건 처음이다.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가본 적은 있어도 그건 학교 일정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거였다.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도 여태껏 없었고.
이번 여행에 기대를 크게 해서 실망하는 건 아닌가 걱정도 했었다. 그런데 이런 여행이라면 평생 여행만 다니면서 살고 싶었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경치를 보는 삶은 행복하지 않을까.
멤버들에게 얘기했더니 놀기만 하면 내 성미에 맞지 않을 거라나?
갓 아이돌이 된다는 목표에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난 딱 멤버들이 하는 만큼만 했는데?
“테오라는 워커홀릭이 모인 그룹이야. 나를 포함해서. 그래서 테오라 리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무리하지 않게 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어.”
“고생이 많다, 우리 초록이.”
“나 고생하는 거 알면, 형이나, 아니다. 무한동력 로봇에겐 할 필요 없는 말인가?”
“아역 때 무리한 적이 있어서.”
“여기도 상습 무리범이 숨어 있었네. 잔소리는 더 하지 않을게. 형은 혼자서도 알아서 잘 조절하니까. 한 명이라도 알아서 해주는 멤버가 있어서 다행이다.”
리더로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라도 초록 형을 돕고 싶다고 했더니 컨디션 조절만 잘해달라는 답을 들었다.
데뷔조가 결정된 무대 평가 이후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적이 없는데. 초록 형에겐 그 기억이 생생한가 보다. 스스로 알아서 잘하기로 재차 다짐했다.
펜션에서 나와서 서혼 형과 함께 여천역에 도착했다. 렌트한 차를 반납해야 해서 서혼 형의 아버지께서 데려다주셨다.
“여행은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다음에 시간 나면 또 여행 떠날 거니까요!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코티지!”
여행의 마지막을 알리는 박하와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우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캠코더 전원을 껐다.
“다들 한결 쌩쌩해졌으니 여행 목적은 달성이네.”
휴식과 힐링을 겸한 여행은 짧았지만 그만큼 알찼다.
“스트레스 완벽하게 풀렸어! 다시 달릴 준비됐어! 차기 앨범 준비! 히히!”
신인상이라는 목표를 위해선 이번 앨범이 중요했다. 신인 아이돌 그룹 테오라의 인기와 인지도를 굳히는 중요한 앨범이 될 테니까.
“여행하길 잘했어! 그치?”
기분 전환하면서 차기 앨범에 들어갈 곡에 대한 영감도 얻을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