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08
탈출과 탈피
자신 있게 외친 박하가 우쭐대며 웃었다. 확신에 찬 눈빛이 반짝였다.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공유 좀 하지?”
궁금한 사람은 오란만이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도 귀를 쫑긋거렸다.
냐앙?
현이도 궁금하다고 울음소리를 냈다. 현이를 무릎에 올려두고 거실 테이블에 노트와 펜을 던져두고 뒤에 있는 소파에 기댔다. 아무리 붙잡고 쥐어짜도 더는 나오지 않았다.
‘상업성’에 대한 이해를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오만했다. 곡까지는 어찌어찌 작곡할 수 있었을지라도 글로 하는 표현은 내 전문도 아니다.
“후후후! 휴가와 여행, 모험의 공통점이 뭐겠어. 떠나는 거잖아! 그러니까 현재의 위치를 벗어나는 거기도 하고!”
“아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애타는 우리의 모습을 즐길 만큼 즐기다가 오란이 화를 낼 지경이 되어서야 박하가 결론을 꺼냈다.
“그, 러, 니, 까! 탈출! Escape!”
Escape라는 단어는 ‘탈출하다, 벗어나다, 달아나다’로 번역할 수 있다. 탈출이라는 단어는 직관적이어서 좋았고, Escape는 중의적이라 느낌이 괜찮았다.
“…웬일로 박하준이?”
“일단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은데? 그럴듯해.”
오란과 초록 형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현실에서 Escape? 아니면 일상에서 Escape라는 의미도 되네.”
“탈출이라, 탈피나 도망이랑 비슷한 느낌일까?”
핑?
지온과 서혼 형이 덧붙인 발언에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탈피?”
어떤 상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탈피’라는 단어에서 바로 연상되는 장면은, 허물이나 껍질을 벗어던지는 것.
이전 앨범 ‘각인(Imprinting)’은 알을 깨고 나온 우리의 이야기였다. 뮤직비디오를 자세히 보면 우리가 태어나던 장소 근처에서 알껍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탈피’? 데뷔 앨범에서 태어났던 우리가 껍질을 벗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이미지가 바로 연상됐다.
서혼 형의 꿈에서부터 영감을 얻은 장면이었는데, 이렇게 연결될 줄이야.
“박하야, 아이디어 고마워. 그리고 서혼 형도 고마워. 다들 신경 써줘서 힘이 됐어.”
가사를 써봐야 알겠지만, 일단 실마리는 잡았다. 나 혼자서 막연하게 존재하던 이미지를 이 세상으로 꺼내는 게 가능했을까? 멤버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여럿이서 잠깐 협력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성과를 냈다. 이게 바로 브레인스토밍인가?
“도움이 돼서 기뻐, 이원아.”
부드러운 저음이 귀를 울린다.
서혼 형은 말투가 다정하기도 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말할 때 유독 직설적이다. 보통 기쁘다거나 행복하다는 말은 일상적으로 하지 않는데 말이다.
아니, 돌이켜 생각해보니 부정적인 감정을 되도록 입에 담지 않는 것 같다. 다정함을 사람으로 만들어놓으면 서혼 형이 아닐까 싶다.
“고마워. 혼이 형.”
“음? 혼이 형? 이제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
박하만 가끔 ‘혼이 형’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곤 했다. 보통은 이름이 두 글자라는 이유로 성까지 붙여서 불렀다.
하지만 서혼 형은 성을 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혼이 형’이라는 호칭은 다 큰 남자가 하기엔 간지러운 듯하지만, 서혼 형, 아니 혼이 형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있다.
“응.”
“난? 란이라고 안 불러줘?”
뻔뻔한 낯으로 말도 안 되는 발언을 하는 자에겐 먹이를 주지 않겠다.
그런 생각으로 오란을 외면하자 덥다고 뿌리칠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왜 질색할수록 더 즐거워하는지. 코티지도 그렇고 홍오란도 그렇고, 왜 모두 짓궂어지지?
이게 팬이라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 정말 그런 거라면 난 이제 큰일 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작사 노트를 다시 잡았다.
이 아이디어가 빠져나가기 전에 바로 시작하지 않으면 손안에서 모래처럼 흘러내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펜을 들고 입을 꾹 다물고 한참을 써 내려간 후 고개를 들었더니 숙소 거실에 나만 남아 있었다.
집중할 수 있도록 멤버들이 조용히 자리를 비켜준 거구나. 현이도 어느새 방으로 들어갔는지 무릎 위가 가벼웠다.
밖은 이미 깜깜해진 후라서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왔다. 가사가 든 노트를 누구에게 빼앗길까 꼭 안아 들고.
* * *
회의를 거쳐 ‘탈출 혹은 탈피’라는 컨셉이 확정됐다. 영어로는 ‘Escape or Ecdysis’. 앨범명은 임시로 이라고 지어졌다.
탈출과 탈피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벗을 탈’을 써서 다양한 각도로 해석의 여지를 뒀다.
미니 앨범에 수록될 2곡을 마저 확정하는 과정에서 한 곡이 추가됐는데, 그 곡이 바로 내가 여름휴가를 간 바닷가에서 즉흥으로 불렀던 팬송이었다.
그 곡을 앨범에 집어넣을 계획은 없었다. 뉴튜브 채널이나 라이브 방송에서 공개할까 하긴 했지만.
여행 가서 찍은 셀프 캠 영상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일이 진행됐다.
즉석에서 내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회사 직원끼리 돌려보다가 사내에 자자하게 퍼져서 그렇게 되어 버렸단다.
영상제작팀에서는 얼씨구나 환영했다고 전해 들었다. 영상을 조금만 편집하면 뮤직비디오로도 손색이 없겠다며 기립박수를 쳤다고.
“이원 형! 내가 코티지면 이거 보고 웃으면서 운다!”
즐거워하길 바라며 만든 곡인데. 웃으면서 울기까지 한다고?
코티지들이 박하 말대로 반응한다면 내 표현 방식의 문제일까, 아니면 의사소통에 오류가 생긴 걸까?
예상과 실제가 어긋나는 일이 자꾸만 생긴다.
“안무 시안은 내일부터 확인해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날 때쯤 안무와 관련된 공지가 있었다. 타이틀곡이 선정됐을 때부터 안무를 의뢰해서 시안이 대부분 도착했다는 이야기였다.
저번과 달리 이번엔 초록 형이 따로 안무 시안을 만들겠다고 미리 선포했다.
다른 시안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초록 형의 안무가 타이틀곡의 안무가 될 가능성도 있다.
초록 형은 우리 멤버들에게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다.
단순히 정으로 우리 테오라의 미래가 걸린 문제를 좌우하진 않겠지만, 왜 우려하는지는 알 것 같아서 다 같이 맹세했다. 냉혹한 시선으로 볼 것을.
“냉혹, 하게 볼 것까진 없는데…?”
“우리는 더 냉혹해져야만 해! 다른 사람에게 오해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의도는 알겠는데…. 하, 이번에 본 안무가 되긴 어렵겠네.”
“웬일이야? 초록 형이 자신감 상실이라니?”
그러게? 박하가 가진 외모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초록 형의 춤에 대한 자신감 또한 드높았다. 굳이 겉으로 드러내려 들지 않아도 은은하게 풍기는 자신감을 몰라볼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춤만 관계되면 쫄린다고 해야 하나.”
공감할 수 있다. 내가 노래에 있어서 항상 완벽을 추구하듯이, 초록 형에게 춤이 그런 거겠지.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평온할 수 없었다. 타인의 평가가 신경 쓰이고, 몇 번이고 재차 확인해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다.
“엄살이라고 이해할게! 이러고 나중에 확인해보면 엄청난 녀석이 나올 테니까!”
“괜한 걱정으로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각자의 성격대로 ‘좋은 안무가 나왔을 거다.’라는 믿음을 보였다. 나도 멤버들처럼 초록 형이 멋있는 안무를 짰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컨셉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안무 그 자체의 완성도는 높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초록 형은 자기 성격대로 안무를 짜는 편이니까.
데뷔 앨범 작업을 할 때는 이유를 모르고 받아들였지만, 이젠 그런 치밀함이 성격의 반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원아, 녹음은 언제 하는데?”
이번 앨범의 메인 프로듀서는 바로 나. 전에 만나 뵀던 프로듀서님이 나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아주셨다.
“사흘 후. 녹음 기간을 일주일로 잡고 있어.”
짧은 시간 내에 컴백 준비를 하려니 일정이 뒤죽박죽돼서 뒤늦게야 본 녹음을 하게 됐다.
가사가 나온 직후 바로 녹음을 들어가려고 했더니 멤버들이 연습 시간을 달라고 아우성쳐서 그렇게 됐다.
“일주일…? 일주일이라고?”
“이원아,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은….”
데뷔 앨범은 세 곡이 전부였고, 경험 많은 프로듀서님이 주 역할을 맡아주셔서 비교적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반면, 이번엔 다섯 개나 되는 곡을 녹음해야 한다. 연습 시간도 전보다 대폭 줄었다. 곡 자체의 난도도 저번보다 높은 편이다.
적어도 내 곡들은 듣는 사람은 단순하다 느껴도 부르는 사람에겐 어려운 곡. 빠른 템포에 박자를 맞춰야 했고, 반복적인 가사를 들려주면서도 지루하지 않도록 스킬을 발휘해야 했다.
“너무 짧았나? 이주일?”
“이원아! 그거 아니야! 지지!”
지, 지? 서혼 형이 다급해서 말이 헛나왔나? 왜 다급한 목소리였는지도 모르겠는데, 지지라니? 어린 애들한테나 하는 소리 아닌가, 지지는.
“지?크크?! 어울, 큭, 너무 잘, 어울려!”
“뭐가 어울려!”
“함이원이 테오라 공식 애기 아니겠냐. 지지라고 해도 바른 말이지. 암.”
“녹음 때 두고 봐.”
홍오란에게 할 수 있는 협박이 고작 이것밖에 없어서 아쉽다. 마음 같아선 당장 팬카페 계정을 삭제해버리고 싶은데!
“그래도 정규 앨범도 아닌데 이주는 너무 길지 않을까? 일주일이면 충분할 것 같아. 아니, 넘쳐!”
과연 일주일로 완벽하게 녹음을 마칠 수 있을까? 곡당 연습 시간이 줄어들어서 나올 실수를 고려해서 녹음 기간을 길게 잡아뒀는데.
멤버들이 자기 노래에 대해 자신감과 확신이 있다면, 여유를 둘 필요는 없긴 하다. 그런 거라면 나도 기준을 높여서 녹음을 시작해야 할지도.
“이원, 살려줘.”
짧고 굵은 지온의 간청에 멤버들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죽일 생각 없는데?”
“Oh, God! 자각 없음?”
지온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더니 독일어로 무언가 중얼거렸다.
“포기해, 포기.”
손사래를 치는 오란 옆에 박하가 바짝 붙어서 서로 어깨를 토닥였다. 녹음 기간에 관한 이야기와 살려주겠다는 말밖에 안 했는데 어쩌다 의기소침한 분위기가 됐지?
“다들 우리 프로듀서님 말릴 생각 대신 연습이나 더 하도록 해. 구르는 만큼 앨범 퀄리티가 올라간다면 얼마든지 굴러야 마땅하지. 그게 아이돌인 우리의 숙명이야.”
“하, 함이원 디렉팅은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던데.”
자기가 해야 할 일은 군말 없이 해내는 오란에게 이런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니.
충격적이다.
내가 그렇게 악독한 짓을 했을 리 없다. 말도 안 된다. 그냥 내 일에 충실했을 뿐인데 어째서.
“감이 잘 안 오긴 하지.”
“초록 형…?”
디렉팅이 그렇게 추상적이었나? 최대한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풀어서 얘기한 건데.
“친절하게 설명해주긴 하는데 그걸 노래에 바로 적용해서 바꾼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거든. 그 차이가 본인에게 와닿지 않는다면 더더욱.”
새로운 방식을 찾아봐야 하나. 고민을 멤버들에게 털어놓자, 기겁하면서 결사반대했다.
뭐? 색다르게 힘들어지기 싫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