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18
친해지기 대작전
뮤비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오란에게 걸린 ‘말 걸기 금지’는 풀어주지 않았다. 촬영장에선 감독님, 스탭들과 소통만 원활하면 괜찮았다.
홍오란 한 사람과 직접 대화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렇지만 때때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래도 다신 심한 장난 안 친다고 말 안 해?
홍오란이라면 끝까지 항복 선언을 안 하고도 남는다. 애초부터 패배가 정해진 싸움이었나?
불리한 싸움을 시작해버렸다는 생각에 속이 끓었다.
홍오란이 순순히 받아들였을 때부터 의심을 해봐야 했는데. 어수룩했다.
서혼 형이 알려준 비법을 빨리 사용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쉬는 시간이라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은 간식을 흡입하는 중이었다. 회사 차원에서 보낸 간식은 커피와 베이커리 메뉴.
샌드위치와 토핑이 잔뜩 올라간 크로플을 먹는 분들이 보였다. 더운 데 고생한다고 과일빙수까지 보내서 촬영장 바닥에 아예 돗자리를 펼치고 먹는 중이었다.
밭일하다가 새참 먹는 농사꾼들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밌었다. 오란의 위치를 확인한 뒤, 그 사이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초록 형에게 슬쩍 다가갔다.
“…혹시 홍오란 형님 번호 줄 수 있어?”
“범무 형 번호는 왜?”
홍오란네 형 이름이 범무구나. 법 관련 일을 하는 엘리트가 떠올랐다. 이름만 들었을 땐, 홍오란과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듯했다.
“친해지고 싶어서.”
“아하.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오란이네 형님 번호가 알고 싶으시다?”
“다 눈치챘으면서.”
입술을 길게 늘인 초록 형은 부정하지 않았다. 뜬금없는 행동을 하는 인과를 눈치껏 알아챌 수 있는 능력자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어떤 면에선 편하긴 하다.
“연락처 보냈어. 범무 형도 이원이 너 궁금하다고 했는데 잘 됐다. 형한테도 네 번호 넘길게.”
“나를 궁금해해?”
“홍오란의 불운 체질을 없애준다는데 안 궁금하겠어? 지금까지 오란이가 어땠을지 가장 잘 아는 가족인데.”
“그렇겠구나….”
증거도 없는 추측에 불과하지만, 내가 자기의 불행을 중화한다고 오란 본인이 믿으면서 친형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형님도 동생의 말이라면 믿어줬을 테고.
홍오란에게 가장 영향력이 센 사람을 한 명 꼽자면 바로 범무 형님일 터다. 까칠한 오란이 애틋함을 느낄 단 한 명이었다.
서혼 형이 내게 알려준 비법도 다른 게 아니라 ‘범무 형님에게 이르기’였다. 고자질이라 내키지 않아 했더니, 서혼 형은 오란네 형님과 친해지라고 팁을 전수해줬다.
공통점이 되는 대상, 오란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놓게 될 거라면서.
오란네 형에게 친한 동생이 되면, 형바라기 오란이 자동으로 행동을 사릴 거라면서.
시도해봐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이번 도전이 성공한다면 앞으로의 긴 시간을 오란의 장난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근데 오란이 갑자기 장난을 끊으면 서운하려나?
…다시 생각해보니 장난의 정도가 약해지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게 좋을 듯했다.
친구가 단 한 명뿐이었던 나에게 장난은 친한 친구의 증거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목적을 가지고 범무 형과 친해지려니 미안함이 앞섰다. 하지만 계기가 어떻든 오란의 가족이면 내게도 가족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좋아. 홍오란보다 더 친한 동생이 될래.”
오란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해도, 더 잘 통하는 동생이 될 수는 있다. 이건 성향의 문제라서.
“꼭 그렇게 됐음 좋겠다. 오란이가 샘나게.”
“반드시.”
자기 형이랑 더 친하다고 질투하는 홍오란을 상상했더니 의지가 마구 솟구쳤다. 두고 보자, 홍오란!
두고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지만, 내가 예외가 되어 주겠다.
범무 형님은 한창 업무를 하고 있을 시간인 것 같아서 우선 톡만 보냈다. 간단한 소개를 덧붙인 인사를.
답은 언제 올까? 방금 보냈는데 자꾸만 폰을 확인하게 됐다. 일단 뮤비 촬영이 끝나지 않았으니, 거기 집중하면서 이 초조함을 잊기로 마음먹었다.
옆에서 초록 형이 몸을 떨며 큭큭대며 웃었다.
“왜 자꾸 웃어?”
“크큭. 이원아, 뭘 그렇게 긴장해? 누가 보면 좋아하는 여자한테 연락하는 줄 알겠다.”
“나이 차 한참 나는 형님에게 친해지려고 먼저 다가가는 건 처음이라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오란의 가족이라는 점도 긴장감을 늘리는 원인이었다. 내가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오란과 사이가 틀어질까 싶기도 하고.
“우리 교실로 나 찾아왔을 때도 이랬어?”
“그때? 그때도 긴장했어. 먼저 찾아가는 건 처음이라서.”
“표정 관리를 잘했나? 난 그때 이원이 네가 태연해 보였는데.”
“절대 태연하진 않았는데.”
태연하고 여유로워 보였다면, 작전 성공이었다. 어설픔을 감추려고 온 힘을 다했으니까.
“얼른 작전 성공해서 이 냉전을 끝내주면 좋겠다.”
“미안. 불편해?”
“다 싸우면서 크는 거지. 나는 이원이가 이기길 응원할게.”
초록 형의 응원을 받으니 기운이 났다. 멀찌감치서 오란이 힐끔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신경 쓰이긴 하나. 매몰차게 고개를 돌려주는 걸로 대응했다.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 * *
예정된 뮤비 촬영 기간은 3일에서 최장 5일. 셋째 날인 오늘은 CG 세트장에서 벗어나 폐허 같은 지역으로 촬영 장소를 옮겼다.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은 폐 공사장은 언뜻 인류가 멸망한 세계를 연상케 했다.
“날씨가 딱 좋네요! 비라도 오면 어쩌나 했는데.”
사진 속 한 장면 같은 하늘이었다. 뭉게구름이 있는 새파란 하늘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졌다.
맹 감독님이 어떤 그림을 원하시는지는 콘티에 전부 나와 있었다.
우리 테오라의 세계관은 인류만 사라졌을 뿐, 생명력이 넘치는 세계였다. 테오라 멤버들이 새로이 탄생하기도 했고, 동식물까지 전멸한 세계도 아니었다.
오히려 인류가 사라짐으로써 다른 생명들이 번성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현이도 출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촬영 첫날과 둘째 날엔 현이가 촬영에 따라올 필요가 없었는데, 오늘은 현이와 동행했다.
영특한 고양이 함현은 뮤비 촬영장에 오자마자 인기묘가 되었다.
처음 현이를 만났을 때와 달리, 잘 먹고 잘 지내서 윤기가 도는 풍성한 털과 초롱초롱한 눈은 미묘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야옹하는 울음소리도 다른 고양이에 비해 유난히 낭랑했다. 멤버들은 메인보컬인 내 고양이라서 그렇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우연이겠지만, 그래도 은근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똑똑하다는 점이 촬영장에 있는 관계자들의 감탄을 샀다.
웬만한 고양이들은 통제가 되지 않는 편이라 내 말에 잘 따라주는 현이가 신기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
현이를 안고 있는 내게 맹 감독님이 다가왔다.
“고양이가 협조적이라 오늘로 촬영 끝낼 수 있겠군요. 전문 동물 배우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정말로.”
“칭찬 감사합니다, 감독님.”
맹 감독님은 영화를 찍을 때 개를 출연시킨 적이 있었는데, 계속 NG를 내는 바람에 고생했다고 하셨다.
어려운 장면도 아니었고, 얌전하고 훈련 잘된 개를 섭외했는데도 불구하고.
“빈말 아닙니다. 이원 씨가 고양이 키운다고 들었을 때, 등장시키면 어울리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많이 고민했습니다. 고양이란 동물의 습성을 익히 아니까요.”
고심 끝에 결정하셨던 거구나. 현이가 협조해주지 않았다면 중간에 고양이 등장 씬이 삭제됐을지도 모르겠다.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 탈을 쓴 AI 같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던데요. 아마 뮤비 나오면 화제 될 겁니다. 무슨 CG가 저렇게 자연스럽냐고.”
보통 고양이는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실제로 고양이를 섭외해서 촬영이 지연되는 것보다 CG 처리하는 편이 예산이 절약될 수 있었다.
맹 감독님이 뻐근함을 느끼는지 어깨를 돌리다가 어느새 옆으로 온 서혼 형과 초록 형과 눈인사를 나눴다. 두 형들은 내 어깨에 팔을 걸었다.
“이제 촬영도 막바지네요. 감독님.”
“한두 시간이면 끝나겠군요.”
“뮤비가 나올 날이 기대되네요. 분명히 최고의 결과물이 나올 테니까요.”
감독님이 얼마나 노력해주셨는지 알고 있어서 말할 수 있는 진심이었다.
서혼 형의 진심이 담긴 찬사에 맹 감독님이 시원스럽게 웃었다.
“나도 기대됩니다. 일반적인 뮤비는 찍어봤어도, 짧은 영화 같은 스토리에 CG가 들어간 뮤비는 처음이라서 말이죠.”
영화가 싫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뮤비 감독으로 전향한 감독님은 이번 작업을 하면서 즐거워하셨다. 그 즐거움이 우리에게 전달될 만큼.
편집까지 감독님의 손이 닿아도 CG가 입혀지면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감독님은 색다른 작업을 흥미로워하기도 했다.
맹 감독님에게도 테오라의 뮤비 촬영이 긍정적인 인상으로 남게 되어서 다행이다.
이번 뮤비의 결과물이 흡족하면, 회사에서 다음 앨범의 뮤비도 제안할 가능성이 있다고 들었다. 테오라와 인연을 이어갈 수도 있는 감독님이 좋은 분이라 기뻤다.
“다들 피사체로 흠잡을 데 없는 인물들이어서 촬영 내내 즐거웠습니다. 이번 컨셉이 유독 테오라와 어울려서 더 찍기 편했던 것도 있고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란 씨랑 이원 씨 다퉜습니까? 눈치가 그렇던데.”
감독님이나 다른 관계자분들에겐 들키지 않으려고 나름 최선의 연기를 펼쳤는데. 단번에 들킨 걸 보면 역부족이었나보다.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서 그걸 일하는 곳까지 끌고 온 철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난감하고 창피해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다.
피부가 달아오르는 감각이 시시각각 느껴졌다. 어떻게 멈출 수도 없었다. 아마도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을 게 뻔하다.
점점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평범한 애들 싸움이었는데 눈치채셨어요? 하하.”
“저는 테오라의 원래 모습을 아니까 귀엽게 느껴지더라고요. 친구랑 싸웠던 옛날 생각도 나고.”
“심각한 싸움은 아니에요.”
“그런 거 같더라고요. 다른 멤버들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어릴 때 싸움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죠. 어른 되면 싸움이 화해로 안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
감독님 개인 사정과 연관된 이야기가 슬쩍 튀어나왔다.
싸움이 화해로 안 끝나면 어떻게 끝나지?
“쓸데없는 푸념을 늘어놨네요. 자, 다시 촬영 시작합시다! 각자 자리로!”
남은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돼서 1시간 안에 모든 촬영이 마무리됐다.
이제 뮤비의 완성본이 나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 * *
홍오란의 형인 범무 형은 생각보다 훨씬 젠틀한 분이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는 분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도 시간을 내서 꼬박꼬박 답톡을 보내주셨다.
톡 말투도 상냥하고 친절해서 홍오란과 진짜 친형제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이런 형님 아래에서 어떻게 홍오란 같은 돌연변이가…?
– 범무 형 언제 통화할 수 있어요?
– 약속이 있어서 저녁 8시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아 그때도 괜찮을까?
– 미리 톡 주시면 제가 걸게요
톡으로 얘기해본 게 다였지만 멘토 같은 형이라 점점 톡이 길어졌다. 톡 하는 속도가 느린 편이라 답답해질 정도로. 그래서 통화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범무 형님이 흔쾌히 허락해서 최근 며칠간 꾸준히 통화를 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고 진짜 형 삼고 싶은 형이라서 통화하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오늘은 슬슬 오란과 싸웠다고 상담해볼까 싶어서 먼저 통화를 졸라버렸다.
“야, 함이원.”
개인 연습 시간에 잠깐 범무 형과 연락하려고 연습실에서 나왔는데, 그 사이를 오란이 따라 나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말을 꺼내길 기다렸더니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던졌다.
“야, 함이원 너 연애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