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36
팬 미팅 준비
류도후 선배님이 한 행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기강 잡기’일까.
연예계에서 지내다 보면 견제나 뒷말, 헛소문, 기 싸움 같은 사건은 일상이 되어 나중엔 코웃음으로 넘겨버릴 내공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그만한 내공을 갖지 못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 볼 작정이다.
비꼬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던 건, 대꾸할 입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혹시 나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멤버들에게까지 여파가 미칠까 걱정되어 참았을 뿐이다.
나 혼자 감당할 수 있으면 모를까, 멤버들을 피해 입히면서까지 기분대로 굴만큼 바보는 아니다.
진짜 복수는 그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를 박탈하는 게 아닐까.
돈이 최고라고 여기는 사람에게서 돈을 빼앗아 거지로 만든다면? 그만한 고통이 또 있을까?
류도후 선배님은 무엇을 최우선순위에 둘까? 고민을 길게 해보지 않더라도 답이 나온다.
바로 ‘인기’.
그 선배님에겐 인기가 권력이면서 사람의 가치를 재는 척도일 것이다.
그래서 나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같은 그룹 멤버들을 신하처럼 끌고 사라졌겠지.
스물셋은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해지지 못했을 나이. 어릴 때부터 연습생 생활을 해왔다면 더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래도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구분할 수 있는 나이이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성인이다.
최고의 복수는 선배님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기로 눌러버리는 것이다. 즉, 테오라가 류도후 선배님을 뛰어넘는 갓 아이돌이 되면 된다.
“…간단하네?”
자판기 주변 복도를 빙빙 돌다가 무슨 일 있냐는 관계자분의 걱정을 샀다. 아무 일도 없다고 얼버무린 후에야 대기실로 돌아왔다.
“난 또 함이원이 가출한 줄 알았네.”
나에게로 집중된 시선을 견디며 테이블 위에 음료수를 올려뒀다. 계속 불편하게 안고 있었던 터라 팔이 불편했다.
서혼 형이 자기 몫의 초록색 캔을 들다 말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이원아, 애기 취급이 그렇게 싫었어? 음료수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만큼? 우리가 자제할게.”
아예 하지 않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다니. 솔직함이 지나치다.
그런 이유로 방황하진 않았지만, 여기선 그런 걸로 해두어야 한다. 아니면 다섯 명이 매섭게 추궁할 테니까.
지금도 미묘한 이상을 감지한 것 같다. 단언할 수 없는 육감 같은 걸까.
왜 나만 빼고 멤버들만 가졌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자판기 냉장 기능이 꺼졌나 봐.”
“웃기시네. 내가 아까 대기실 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어디서 구라치려고 해?”
홍오란은 언제 또 그걸 확인했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거짓말도 해본 사람이나 그럴듯하게 내뱉는 걸까.
나는 얼굴에 기분이 잘 보인다고 하니 완벽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날은 까마득한 것 같다.
“몇 가지만 물어볼게. 대답해줄 수 있지?”
서혼 형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서혼 형에게 대답해주지 못할 내용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서혼 형이 기특하단 눈빛을 보내왔다.
이러면 내가 혼자 대기실 밖으로 나간 의미가 없는데!
초록 형이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팔짱을 끼었다.
“위험하거나 힘든 일이 생기진 않았지?”
위험하지도, 힘들지도 않다. 조금 짜증도 나고 화가 치밀어 오를 뿐.
“아니야.”
“진짜네.”
아, 초록 형이 인간 거짓말 탐지기였나! 진실, 거짓으로 나눠 판단할 수 있는 대답을 유도한 건가.
“우리한테 나중에 말해줄 거지?”
“…응.”
언젠가 말해줄 날이 오겠지.
과하지 않으면서 정당한 복수를 할 방법은 한 가지 외엔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솔직하게 말한다 해도 당장에 마땅한 해결책이 나올 것 같지는 않고.
시원하게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괜히 부정적인 기분을 느끼게 하기 싫다. 그게 가벼운 짜증이나 답답함일지라도.
멤버들에게 털어놓지 않고 개인적인 장기 목표 하나를 몰래 꿍쳐두려는 것뿐이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고 하니까.
10년까지 걸리진 않을 거라 믿는다. 군자가 아닌 나는 10년까지 인내심을 발휘하진 못할 것 같으니.
“그럼 이번만 넘어가 줄까!”
초록 형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서혼 형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다.
본인이 알아서 어련히 잘 처리하겠거니 여기는 지온, 여전히 못마땅해 보이는 홍오란.
가만히 보고 있던 박하는 흐음, 하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때로는 거친 세상도 경험해야 하는 법! 이원 형도 알게 됐구나!”
괜히 걱정했다….
그래도 비밀로 한다는 1차 목표를 이뤄서 만족스러웠다. 되갚아준다는 장기 계획까지 성공한다면 짜릿하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 * *
류도후 선배님과 부딪친 이후로 다시 마주칠 일은 없었다. 이제 막 인지도를 얻고 있는 테오라와 마지막 불꽃을 피우기 위해 한창 콘서트 투어로 정신없을 프케이 선배님들의 동선이 겹칠 리 없었다.
아마 프케이가 해체를 정식으로 알리고 나서 한참 지난 후에나 마주치게 될 터다.
이것저것 정리할 일도 많을 테고, 제대로 개인 활동을 하려면 준비 기간이 필요할 테니까.
우리는 우리대로 팬 미팅을 빙자한 팬 콘서트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테오라 모두가 최대한 넓은 장소를 원해서 신인 아이돌의 팬 미팅치고는 넓은 곳을 대관하게 됐다.
대형 공연장은 현실적으로 걸리는 부분이 많아서 차선책으로 온라인 팬 미팅을 겸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회사 측에서 약간의 금액을 입장료로 받고 생중계를 볼 수 있게 할 계획이라고 했다. 나중에 동영상도 판매할 거라고 들었고.
팬 미팅에 참석하지 못한 코티지들은 안정적인 고화질 영상으로 화면 너머에서나마 우리를 만날 수 있다.
일방적인 만남이라 아쉽지만, 그만큼 더 재밌는 무대를 기획할 생각이다. 나중에라도 팬들이 테오라를 꼭 만나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게.
“날짜랑 장소 나왔으니 팬 미팅 공지 곧 올라갈 거다. 코티지 1기에 가입한 팬들 대상으로 조만간 티켓팅도 시작할 거니까 알아두고. ”
코티지 1기 모집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팬 미팅을 한다고 하면 놀라겠지? 깜짝 선물을 받는 기분 좋은 놀람이었으면 좋겠다.
“팬 미팅 프로그램 자료 줄 테니까 참고해서 아이디어 생각해두고.”
매니저 형은 스스로 프로그램을 짜고 싶어 할 우리를 잘 안다.
결국은 다른 아이돌 그룹과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구성하게 될 가능성이 크긴 하겠지만.
아는 맛이 무섭다는 게 바로 이럴 때 하는 얘기겠지. 김치찌개가 한국인의 영원한 소울 푸드라고 불리듯이.
결과와는 별개로 테오라의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재밌을 것 같다. 소풍 가기 전의 어린아이가 이런 기분이려나?
“주목! 팬 미팅 아이디어 회의가 끝난 다음에 팬 미팅을 위한 꿀팁 강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박하준. 너 무슨 수업 못 해서 죽은 귀신 들렸냐? 왜 우리를 못 가르쳐서 난리야?”
“그래서 홍오란 씨. 내 강의 안 필요하시다고요?”
오란은 이마를 짚으면서도 차마 필요 없다는 소리는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팬 문화에 해박한 박하가 풀어주는 ‘팬 미팅 잘하는 법’이 유용하지 않을 리가.
물론 학생에게 질문 폭탄을 던지는 박하의 수업 방식은 유용함과 별개로 피곤하긴 했다.
박하를 제외한 멤버들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이미 두어 번의 수업을 겪어본 터라 앞날이 훤하게 예상됐기 때문에.
그래도 박하의 수업은 참아낼 가치가 충분하다. 우리 중에 팬의 입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박하니까.
“다들 동의했다? 좋았어!”
박하의 강의 계획 때문인지, 팬 미팅 아이디어 회의가 길어졌다. 오란과 지온도 평소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조금이라도 강의를 늦추려는 발버둥은 스케줄 틈틈이 이어져서 하루를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박하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삐진 박하를 풀어주느라 또 진땀을 뺐다.
우리가 너무 과했나….
방에 들어와서 잠깐 서혼 형이랑 얘기를 나눴는데, 내일이면 언제 삐졌냐는 듯이 평소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했다.
평소엔 쾌활한 박하지만, 이따금 여린 구석을 보일 때가 있어서 마음이 쓰였다.
“약하게 보이기 싫어하지. 박하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장난치는 걸 더 좋아할 거야.”
박하는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이미지를 가지고 싶은 걸까.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매일, 매시간 유쾌하게 살기는 힘들 텐데. 그런 점을 고려하면 박하는 계속 에너지를 쓰고 있는 셈이다.
아이돌로서 장점인 듯하지만, 그 상황을 줄곧 버텨낼 수 있을지가 문제다.
아직은 괜찮겠지만, 유심히 살피는 게 좋겠다. 씩씩한 것처럼 보여도 박하는 우리 테오라의 막내니까.
동생이라는 존재가 낯설어서 서혼 형이 동생을 대하는 모습을 참고하기로 했다.
당연히 홍오란은 제외다.
* * *
서혼 형의 예상대로였다. 다음날이 되자 박하는 언제 삐쳤었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오늘 스케줄 끝나고 비는 시간에 숙소에서 박하의 명강의가 있겠습니다! 필기도구, 아니다. 영상으로 찍어줘! 나중에 코티지한테 보여줄래!”
“그걸…?”
“코티지들이 보면 찬양할걸! 두고 봐!”
이래 봬도 박하는 경력직 강사다.
테오라 멤버들에게 셀카 잘 찍는 방법을 알려준 적도 있고, 유튜브 개인 영상으로 검정고시 공부 영상을 찍어 올렸었다.
검정고시 전문 강사님이 알려주신 비법을 흡수해서 개인 뉴튜브 영상에선 어엿한 선생님으로서 꽤 수준급의 강의를 선보였다.
공부했던 내용을 복습하는 차원에서 박하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원래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하니까.
박하 선생님은 팬들에겐 친절 그 자체였다.
자신만만한 박하답지 않게 공부 영상을 찍을 땐 기합이 팍 들어간 모습이었다. 잘못된 내용을 알려줬다가 혹시 팬들의 성적에 악영향이라도 줄까 봐 걱정됐던 걸지도.
“…그런데 왜 우리는 차별해?”
우리 멤버들은 왜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지? 팬들은 당연히 상냥한 태도로 대해야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온도 차가 너무 크다.
“…어, 내가?”
“몰랐다고?”
옆에서 듣던 오란이 불쑥 끼어들었다.
“난 잘 가르쳐주려고 한 죄밖에…!”
“죄를 저지른 건 아나 본데?”
오란이 핵심을 지적했다.
그럼 박하가 수업 때마다 몸이 베베 꼬이는 우리를 알면서도 일부러 방치했다는 뜻? 이건 배신이다!
나는 어제 박하가 침울해 보여서 반성하기까지 했는데! 어제의 내 걱정을 돌려줬으면 좋겠다.
“아니! 아니야! 내 기준에서 제일 효율적인 교육법이라고 판단했어!”
박하가 발뺌해보려고 노력했지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줄 멤버들이 아니었다.
“그럼 다음에 강사님 오시면 너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쳐주라고 부탁드려도 되겠지? 응? 박하야.”
초록 형은 한다고 하면 하는 사람.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그대로 이뤄지는 수가 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끝내 항복을 선언한 박하가 바닥에 엎어져서 좌절했지만 아무도 달래주지 않았다.
“나빠, 박하.”
지온의 팩폭에 엎드린 박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우는 척을 그만둔 박하가 시선을 피했다.
“오해하지 마! 원래 내가 가르치는 스타일이 그러니까! 이원 형 흉내를 내 보니까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과해져서 그렇지….”
거기서 내가 왜 나와?!
알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좁혔더니 옆에서 서혼 형이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앞으론 최고의 강의로 보답하겠다고 약속할게! 진짜야!”
어차피 다들 박하의 즐거움 하나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얼마나 대단한 강의를 해주는지 봐야겠네.”
“얼마든지! 나만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