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75
일기 속의 파편
현오 형은 항상 어른스럽게만 보였었다.
단지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라 자기 꿈을 명확하게 알고 그 꿈을 향해 노력을 멈추지 않는 점이 존경스러웠다.
가혹한 현실을 경험했으면서도 타인에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그 단단한 심성도.
내가 현오 형의 나이가 됐을 때, 형처럼 멋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오 형이 남긴 일기에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원이와 친해질수록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 쓰리도록 슬프다.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게 아니라면 시간이 천천히 흘러줬으면.…
무섭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살갗으로 느껴져서 더 무섭다. 죽고 싶지 않아…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냥 전부 회피하고 있었을 뿐이다.
병원에서는 젊어서 암이 더 빠르게 전이됐다고 한다. 이제는 마약성 진통제로 견디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다.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일도 거의 다 끝나간다.
아파 보이는 안색을 화장으로 어떻게든 가렸지만,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머리도 안 빠졌는데. 눈치가 빨라도 문제다.
내 죽음을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서서히 인연을 놓고 싶다. 아니, 솔직하게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살려달라고 매달리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내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데, 이름을 남기진 못해도 오래도록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아니다. 기억이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그때는 이미 내가 죽은 후일 텐데.
장례까지 다 준비해뒀으면서 이제 와 무슨 변덕일까. 마지막이 가까워져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나. 사후세계가 있든지 없든지 난 여기서 끝인데.
다들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거고 난 그 목적지에 조금 일찍 도착할 뿐인데.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바보 같네, 나…]
바보 같지 않다. 죽음을 각오하기엔 턱없이 어린 나이였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막상 죽음을 앞두게 되면 세상이 야속하고 억울하게 느껴질 터였다.
왜 하필이면 나인지, 왜 나를 이렇게 일찍 데려가려 하는 건지 누구든 울분을 터뜨리지 않을까.
친한 친구, 같은 그룹으로 활동했던 멤버들, 아니면 나한테라도 털어놓지. 그랬다면 그 막막하고 무서운 그 심정을 조금이라도 같이 나누고 공감해줄 수 있었을 텐데.
소울메이트라고 여겼던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한참 어린 동생에게 의지하기는 어려웠겠지만….
“난 받기만 한 것 같아. 그렇지? 형….”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내색하지 않았을 뿐, 현오 형도 고민하고 겁먹고 방황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왜 형의 고민을 들어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일기는 끝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다. 이 일기를 다 읽고 나면 나는 조금이나마 현오 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도?
“형을 궁금해하기엔 너무 늦었을까.”
이제 와서 너무 늦었다고 해도 반드시 현오 형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다.
나는 일기를 펼쳐둔 채로 내면으로 침잠했다.
* * *
현오 형의 흔적을 되짚어가는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테오라 멤버들은 분주했다.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밀린 일들을 전부 끝내버리겠다는 각오가 엿보였다.
그간 못 만났던 친구들을 만나고, 은행이나 학교에 다녀오느라 숙소를 들락날락했다.
멤버들이 각자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목격담과 사진이 쏟아졌다.
“어디 갔다 오는지 말 안 해도 다 알겠네.”
누가 연예인 아니랄까 봐 행적을 낱낱이 드러내고 다녔다.
다들 나름대로 못 알아보게 가리고 다니는데도 전부 들켰다.
스타의 아우라가 진짜로 실존하는 걸까?
“이원 형! 작업실 안 갔네? 숙소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조금 있다 가려고.”
“곡 작업에 너무 빠져있는 거 아니야? 어제도 밤늦게 들어오던데!”
복잡한 머릿속은 이제 거의 다 정리되어가는 중이었다.
두서없는 상념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반짝이는 영감을 받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그 속에 있었다.
이 영감을 토대로 음악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게 테오라의 앨범에 어울릴만한 소재는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영원한 이별을 할 때의 자세 같은 무거운 주제를 아이돌 앨범에 넣기는 어려우니까.
그저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정규 앨범에 들어갈 만한 곡은 아니고, 개인적으로 써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게 쉴 새 없이 뽑아내고도 더 작곡하고 싶은 게 나오는구나! 역시 아무나 창작자가 될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박하 너는 친구들 잘 만났어?”
“응. 친구들끼리 다들 알음알음 알고 지내는 사이라 한방에 해치웠지!”
어제 안 들어왔던 걸 생각하면 밤새 잠도 안 자고 놀다 왔겠지?
회포를 하루 만에 풀기는 힘들 것 같긴 하다. 아이돌로 자리 잡은 박하는 축하받느라 바빴을지도.
“이제 다 놀았으니까 공부하려고!”
“공부? 아, 검정고시?”
“응응!”
저번엔 일정이 안 맞아서 시험을 볼 수가 없었는데 이번엔 미리 공부해두고 시험 치는 하루만 스케줄을 빼겠다고 했다.
“바쁜 와중에도 무려 수능까지 치른 이원 형도 있는데! 나도 이 정도는 해야지!”
열심히 공부하겠다면서 열정을 불태우는 박하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참! 합격 발표는 언제야?”
“곧이야.”
만약 이번에 한국대에 가지 못하면 다시 도전하지 않고 아이돌 생활에 전념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법을 공부해 보고 싶긴 해도 꼭 대학에서 공부하란 법은 없으니까.
“크! 미래의 한국대생! 나 검정고시 공부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도 돼?”
“얼마든지.”
자고 일어나서 명료한 정신으로 공부해야겠다면서 박하가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고양이용 장난감으로 현이와 놀아주다가 작업실로 향했다.
차곡차곡 쌓아둔 이야기들을 터뜨려야 할 때였다.
* * *
하루에 한 곡, 많게는 세 곡까지도 한꺼번에 세상으로 끄집어냈다.
마음에 차는 곡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폐기해버린 곡도 있었다.
내가 작업실에 은둔하기 시작하자 걱정됐는지 멤버들이 번갈아 방문해서 외로울 새는 없었다.
그 와중에 멤버들이 내가 작곡한 곡들을 듣고 다른 것들을 들려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어때? 그냥 곡 자체로 평가해줘. 우리 앨범에 넣을 생각은 딱히 없으니까.”
“이원아. 이 음악들이 하나의 주제로 이어지는 거지?”
서혼 형은 감수성이 예민했다.
가사가 붙여지지도 않은 음의 나열에서 공통되는 심상이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주 희박한 비율이라는 것 정돈 알 수 있다.
“그렇게 들려? 맞아.”
“전체적으로 무거운 안개가 깔려있다고 할까. 일관성이 느껴졌는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구나.”
“그래서 어떤데?”
“좋아. 이원이 너한텐 너무 당연한 말인가?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아. 분명히 밝기만 한 곡은 아닌데 들을수록 매력적이라고 해야 하나.”
한 번에 바로 귀에 꽂히진 않더라도 들을수록 빠져든다면 성공이다.
주제 자체가 심오하고 무거워서 혹시나 거부감이 들면 어쩌나 싶었는데.
안심하고 나머지 악상도 풀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매니악한 곡은 안 쓰는 거야, 아니면 안 들려주는 거야? 우리 그룹 앨범에 넣을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내가 듣기엔 충분히 넣을만한 곡들로 추린 거 같아서.”
“…예리해. 혼이 형.”
매니악한, 다르게 표현하면 극소수의 마이너한 취향들만 열광할 법한 곡.
떠올리지 않았을 리 없고, 정리해서 내놓기는 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 선뜻 들려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굳이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길고 긴 음악의 역사상 내 곡과 비슷한 유형의 곡이 유명해진 적이 없었다는 사실로도 결과는 뻔했다.
게다가 슬픔과 공포가 짙게 깔려 있어서 감수성이 예민한 서혼 형에게 들려주기는 더욱 꺼려졌다. 혹시나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
“그보다는…. 이거라면 적당히 들을 만할 거 같아.”
헤어짐에 대한 곡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이별 곡과는 궤가 달랐다.
부정적인 감정을 걷어내고 블랙코미디처럼 해학을 담아서 밝게 색칠해봤다.
데모곡이 재생되는 동안 괜히 바쁜 척 돌아다녔다.
내가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여줄 수 없을 테니까.
“이원아.”
“응?”
“이거야!”
“…?”
“우리 타이틀곡!”
“…이게? 우리 정규 타이틀이 되기엔 한참 부족하지 않아?”
질문을 던지자 서혼 형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나를 응시해왔다.
이 곡이 우리 정규 타이틀 감으로 쓸만하다고? 진심으로?
이제껏 타이틀이 됐던 곡들은 작곡할 때부터, 아니 그 전에 상상의 파편일 때부터 가능성이 보였던 것들이다.
성공 가능성까지 점치지는 못했어도, 아이돌에게, 그리고 우리 테오라에게 딱 어울리는 곡이라는 점은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무거운 주제를 밝게 풀어냈을 뿐, 여전히 ‘아이돌스러움’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아이돌이 낸 앨범에도 도발적인 곡들은 존재하긴 했다. 다른 가수도 아니고 아이돌이라서 소화할 수 있는 곡도.
내가 아이돌 음악을 좁게 한정 지어왔던 걸까?
“여러 사람 의견을 들어보는 게 빠르지 않겠어?”
수긍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서혼 형은 멤버들은 작업실로 불러 모았다.
각자 자기 일정이 있었을 텐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실 안이 붐볐다.
“요즘 이원이가 곡 쏟아내는 건 다들 알지?”
“그럼! 그래서 우리가 이원 형 무리 못 하게 감시하고 있잖아!”
“무슨 일 생겼어? 다급한 목소리던데, 형.”
“테오라에게는 중요한 일이야. 일단 이원이가 들려주는 곡들을 전부 들은 후에 이야기하자.”
서혼 형의 재촉에 아까 들려줬던 순서대로 노래를 재생했다.
그렇게 노래가 전부 끝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잠깐의 정적 후에 멤버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피려는데 그보다 빨리 달려들었다.
“이거 뭐야. 뭐냐고! 마지막 곡!”
설마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닐 테고. 초록 형이 목소리를 높일 만큼 마지막 곡이 충격적이었다는 뜻?
“와! 와아아! 와! 우와!”
박하는 아예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나 보다.
“우리 잘 불렀어. 서혼이 아니었으면 이런 보물이 묻혀버렸을지도.”
영구 삭제해버리지는 않았을 거다. 습작으로 남았을 수 있긴 해도.
“한 번 더 틀어. 함이원.”
명령에 가까운 발언에도 전혀 기분 나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홍오란까지 안달하게 할 정도라는 사실에 으쓱해졌다.
정작 나는 멤버들이 감탄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원곡은 전혀 다른 곡이었다. 헤어짐의 처절한 슬픔을 담았다가 나도 다시 듣기 싫은 곡이 되어서 뼈대만 남기고 전부 뜯어고쳤다.
연습용이라고 치고 색다른 시도도 해보면서 이리저리 가지고 놀았는데 의외의 결과물이 나와버렸다.
이런 게 바로 우연의 산물인가?
“정규 타이틀은 정해졌네.”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