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76
합격을 축하합니다
“정규 타이틀은 더 신중하게 결정해야지.”
멤버들의 판단엔 아무래도 사적인 감정이 섞여 있지 않을까 싶어 관계자분들에게 들려주고 반응을 살펴보기로 했다.
멤버들은 더 확인해볼 필요도 없다고 했지만.
“별로라고 말하긴 힘들 거 아니야.”
“왜 말 못 해?”
그게 진실이면 발전을 위해서라도 꼭 말해줄 거란다.
홍오란은 쓴소리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니까 다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무서워서?”
“무섭긴 개뿔. 널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긴 하겠냐?”
왜, 있을 수도 있지…. 너무 단호하게 없다고 하니 서운하기까지 하다.
“다양한 반응을 확인해서 나쁠 건 없잖아.”
편곡에 도움이 되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고, 어느 부분에서 호불호가 있는지도 알 수 있다.
“회사 뒤집힌다는 데 한 표.”
초록 형의 예언은 고스란히 이루어졌다.
아직 앨범 작업에 돌입하지도 않았는데 타이틀이 거의 확정되어 버렸다. 데모곡들을 모집하기도 전인데.
타이틀 중심으로 곡을 만들어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A&R 팀장님은 빼도 박도 못하게 타이틀로 밀고 가려는 의지로 가득해 보이셨다.
일관된 감성의 곡을 뽑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나온 곡들을 편곡해보는 방향으로 가면 괜찮지 않을까?
“이러다가 우리 정규 앨범 엄청 빠르게 나오게 되는 거 아냐?”
정규 앨범은 곡 수가 많은 만큼 완성도를 고려해서 천천히 준비해보자고 하셨었는데.
테오라는 느긋해질 수 없는 운명일지도?
“빈둥댈 성미들도 아니니까 그러려니 싶기도 해. 나를 포함해서.”
초록 형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함이원 같은 천재형 인간도 열심히 하는데 발맞춰가려면 다른 사람은 죽어라 하는 게 맞지.”
“인정! 우리가 이원 형 따라가려면 잠도 자지 말아야 해. 흑흑!”
“다들 진짜….”
“그러니까 우리 잠이라도 재우려면 적당히 쉬어가면서 하라고.”
세끼 밥 잘 챙겨 먹고 충분히 자라는 말을 이렇게 길게 늘이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는데.
겸사겸사 나를 놀리면서 충고도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려는 걸까. 그렇다면 그 치밀함이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이원 형, 오늘 무슨 날이게!”
“무슨 날이야?”
“진짜 모르는 거야? 대학 합격 발표일이잖아!”
“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어차피 조금 늦게 확인한다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내게는 아이돌이라는 본업이 더 중요했다.
“이원 형은 이럴 때 보면 대담한 거 같기도 하고 무심한 거 같기도 하고 그래! 나 같으면 막, 막!”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루하루 세다가 시간 단위 분 단위로 세면서 발표 시간만 기다렸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노트북을 열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조회하기 버튼을 누르려는데 팔이 잡혔다.
“천천히 해줘! 나 간 떨어질 것 같단 말야!”
다른 사람 합격 발표로 떨어질 간이면 그 간은 도대체 얼마나 나약한 거지.
그 정도면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나랑 일심동체 수준이 아닐까? 나는 아니고, 박하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꾸물거릴 필요 있나.”
나 대신 오란이 클릭해서 결과를 확인했다. 로딩 없이 바로 결과가 떴다.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한 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합격이었다. 예비순위에 들어가는 것도 생각했는데.
“합격! 합격이야! 이원 형 축하해!”
“이원아, 진짜 축하해. 올해부터 나랑 같은 대학생이네.”
“한국대 현역 아이돌. 멋진데?”
한국대 출신 배우나 가수는 있지만, 한국대에 들어간 현역 아이돌은 없었다. 마케팅용으로 쓸만한 문구 같긴 하다.
“축하한다, 함이원.”
“Congratulations. 이원. 집에 전화해 봐. 기뻐하시겠다.”
나보다 우리 부모님을 더 챙기는 지온의 조언에 따라 통화부터 했다.
호들갑스러운 축하는 없었지만 은은하게 기쁨이 묻어나는 대화가 오갔다.
“준현 형한테도 연락해. 안부 전할 겸. 회사에서도 알아야 할 문제 같으니까.”
전화를 걸어서 한국대 합격 소식을 알렸더니 어디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숙소라고 했더니 바로 오겠다는 대답으로 전화가 끊겼다.
“…바로 여기로 오시겠다는데?”
담당 아이돌의 대학 합격이 휴가를 반납해야 할 정도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매니저 입장에서는 다른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현 형이 숙소로 찾아왔다.
“다들 휴식 잘 보냈나? 다크서클이 조금 가신 것 같긴 한데.”
“준현 형은요?”
“물론 잘 지냈다. 심심해서 회사에 잠깐 나갈 정도로.”
매니저 형은 내가 만든 임시 타이틀곡도 들었다고 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심심해서 회사 나가는 사람이 있다구요?”
“휴식기도 일주일만 쓰고 돌아온 너희들이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을까.”
그 아이돌에 그 매니저였다. 정곡을 찔려서 뜨끔했는지 멤버들이 화제를 돌렸다.
“이원이 합격 소식 때문에 오신 거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일단 한국대 합격 축하한다. 회사 차원에서 홍보할 테니까 알아두고.”
“네.”
“이원이만 잠시 밖으로.”
“우리는 알면 안 돼요? 이원 형이랑만 비밀 만들다니. 힝!”
“박하준. 징징거리지 마. 따로 할 말이 있나 보지.”
입술이 삐죽 나온 박하를 뒤로 하고 잠시 숙소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공기가 우리 둘을 맞았다.
“안 그래도 이원이 너 지목해서 들어온 개인 스케줄이 놓치긴 아까워서 한번 얘기라도 해볼까 했다. 버츄얼 가왕이라서.”
“아, 그 프로그램이요.”
버츄얼 가왕. M.com에서 재방, 삼방으로 우려먹는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이름값도 외모의 영향도 없이 노래만으로 실력을 겨루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선입견 없이 음색과 가창력을 선보일 수 있다는 장점이 뚜렷했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만큼 보안이 중요해서 출연이 결정되면 같은 그룹 멤버들이나 가족에게도 숨기는 게 원칙이었다.
버츄얼 가왕에 등극하는 것만으로 아이돌에 대해 편견이 있는 대중들에게도 가창력을 인정받을 수 있고, 가왕의 정체에 대한 추측성 기사나 게시글들이 잔뜩 올라오기 때문에 화제성도 최고 수준이다.
그만큼 노래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저를 지목해서 섭외 왔다구요?”
“그래. M2A에서 널 눈여겨봤다던데. 거절해도 되고 나중으로 미룰 수도 있으니까….”
“출연할래요.”
“더 고민해보고 대답해도 된다만.”
“고민해도 똑같은 대답일 거예요.”
목소리만으로 평가받아보고 싶고, 증명하고 싶다.
내게 목소리를 선물해준 현오 형은 단지 상황이 안 따라줬을 뿐, 실력이 모자라서 무명돌이었던 게 아니었다고.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다. 마침 앨범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라 시간도 여유로웠다.
만일 가왕까지 간다면 일정이 살짝 꼬이겠지만, 나에게만큼은 그걸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럼 그렇게 하자. 스케줄 확정되는 대로 얘기해주마. 나머지 멤버들한테도 비밀 지키고.”
매니저 형은 회사에 있을 테니 필요할 때 연락하라면서 떠났다. 숙소 안으로 들어오니 밖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버츄얼 가왕 얘기를 해줄 순 없어서 개인 작곡 의뢰가 들어왔다고 얼버무렸다.
거짓말이 잘 먹히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버츄얼 가왕까지 생각하진 못할 테다.
어차피 내가 출연한 ‘버츄얼 가왕’이 방영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아무리 버츄얼 캐릭터에 가려져 있다고 해도, 멤버들이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만약 못 알아챈다면 그땐 진짜 서운할지도?
멤버들이 다른 단서 없이 목소리만으로 버츄얼 가왕에 나온 가수가 나라고 알아챌 수 있다면.
현오 형과 같은 그룹으로 활동했던 멤버들도 눈치챌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내가 아주 약간 낮긴 해도 현오 형 목소리와 내 목소리는 같은 사람 목소리로 들리니까.
클리어리 형들이 버츄얼 가왕에 나간 내 목소리에서 현오 형의 흔적을 발견해줬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실제로 연락을 받게 되면 덜컥 겁부터 날 것 같다.
공통분모인 현오 형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리 없고, 그럼 나는….
형의 죽음을 알리는 게 나은지 아닌지는 애초에 정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현오 형 자신조차 끝까지 고민했던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에 내가 동참해야 할까. 아니면 늦게라도 진실을 알리는 게 맞을까.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데, 내가 언제까지 완벽하게 거짓말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나 나름의 답을 내기 전까지는 현오 형의 지인들과 만나는 일은 미뤄두고 싶었다.
그러나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 * *
버츄얼 가왕 스케줄은 한참 전에 확정된다고 한다. 아무래도 노래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스케줄을 조율하고 있던 내가 다급하게 출연하게 됐다. 원래 캐스팅을 확정했던 출연자가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흔쾌히 와주셔서 감사하고요.”
무대에서 부를 곡을 정하고 연습 기간도 없이 바로 프로그램에 투입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대신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릴게요. 대기실도 큰 걸로 드리고, 버츄얼 캐릭터도 멋지게….”
“아뇨. 최대한 밋밋하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밋밋하게요?”
“온전히 노래에 집중할 수 있게요.”
“우와…. 자신감 멋있는데요? 알겠습니다.”
버츄얼 가왕 조감독이라 바쁘실 텐데 불편한 일 없게 자주 들러 살펴주셨다.
카페에서 커피를 사다 주시기도 했다. 다른 출연자에게도 정체를 들키면 안 돼서 대기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과도한 친절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실례지만 저 사인 한 장만….”
그러면서 나오는 테오라의 앨범 두 개와 공식 포스터.
“코티지셨어요? 미리 말씀하셨으면 제가….”
“아니, 아니에요. 안 그래도 일정 때문에 곤란하셨을 텐데 제가 감히 먼저 들이댈 수는 없죠. 사인은, 너무 받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요….”
“코티지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환영인걸요.”
“아….”
현기증이 이는지 조감독님이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셨다.
“괜찮으세요.”
“괜, 괜찮아요. 저 완전 쌩쌩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성함이?”
사인 아래 이름도, 코멘트도 정성 들여 적었다.
“감사합니다! 저 촬영 내내 이원 씨 응원할 거예요! 가왕은 당연히 이원 씨 차지겠지만요.”
대기실 밖으로 앨범과 포스터를 꼭 안고 나가는 모습이 조금 뿌듯하기도 뭉클하기도 했다. 자주 만나기도 힘든 우리를 저렇게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팬에게 응원도 받았으니 더 좋은 노래 들려줘야겠다.
가볍게 목을 풀면서 부르기로 한 곡의 도입부를 불러보기도 했다. 평소에도 스케일은 잊은 적 없고, 목 컨디션에 신경 쓰면서 연습도 해왔다.
현오 형이 준 이 목소리가 날 실망하게 할 리도 없다. 그러니 세트장에 있는 게스트와 관객들 앞에서 날것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갑작스러운 스케줄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비밀작전을 수행하듯이 무대 아래까지 이동했다. 여기서도 다른 출연자와 겹치지 않게 동선이 다르게 짜여 있었다.
앞이 스크린으로 된 세트 안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앞만 막혀 있고 옆이나 뒤는 뚫려있는 구조였다.
물론 관객들이나 MC, 게스트는 볼 수 없는 각도였다.
스태프의 손짓에 따라 스크린을 앞에 두고 섰다. 무대에서는 스크린에 나올 버츄얼 캐릭터가 나 대신 움직이게 되겠지.
MC님의 소개가 들려왔다.
“이름 대신 노래를 남기겠다! 병약한 꽃선비가 부르는 달의 연가!”
마이크를 입술 가까이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