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77
버츄얼 가왕 (1)
달의 연가는 30년도 전에 나온 노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올 타임 레전드라고 불리는 국민가수 강범재 선배님의 히트곡이기도 했다.
웬만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도 시도조차 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 남자들의 노래방 금지곡이랄까.
노래의 음역이 특출나게 높지는 않았다. 대신 가성과 진성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듯 오가야 했다.
잘만 부르면 최고지만 자칫하면 지루하게 들리기도 하는 까다로운 곡.
강범재 선배님은 독특한 음색을 지닌 데다가 선배님 특유의 감성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 곡을 완벽하게 소화한다면 그 자체만으로 감탄을 자아낼 수 있다.
그래서 작정하고 이 곡을 골랐다. 제작진 쪽에서 다른 곡으로 하지 않겠냐는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이 목소리에 담긴 본질을 보여주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긴긴밤 나를 기억해주신다면 저 달에 연모를 담아 보내겠소
앞이 가로막힌 세트에는 관객석과 판정단 석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모니터가 달려 있었다.
음방 무대에서 보는 것보다 더 자세한 반응을 볼 수 있어서 신기했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들려주는 기분.
노래에 푹 빠진 이들을 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감동적이었다. 음악의 힘은 손에 잡히진 않아도 한계가 없다.
달의 노래를 전해 듣는다면 생각해주오 나의 차갑고도 뜨거운 연정이라고
절절한 사랑 노래라서 그러한 장르의 책과 영화를 보며 감정을 잡아봤는데 다행히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다.
노래가 모두 끝나고 토크 타임이 이어졌다. 버츄얼 캐릭터 뒤에 있는 가수의 정체를 추리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였다.
“병약한 꽃선비 님, 쉽지 않은 곡을 선택하셔서 쪼금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첫 소절부터 제 걱정을 날려주셨어요.”
“이분은 현역 가수분이실 것 같네요. 나이는 최소 40대? 농익은 감성을 보나 잘 단련된 성대를 보나 최소 20년 경력은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40대? 아무런 편견 없이 목소리만 들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나와 현오 형의 목소리를 높게 평가해주시는 것 같아 감사했다.
“목소리 자체는 싱싱하거든요? 어리게도 들리고. 그런데 어린 가수가 이 곡을 이렇게 살릴 수가 없어요. 특히 강약 조절은 타고난 재능으로 커버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들 하거든요.”
“작곡가님은 그럼 병약한 꽃선비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알려지지 않은 재야의 고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정도 실력이 되는 분들은 떠오르는데 이런 목소리는 못 들어본 거 같거든요. 나이는 30대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현오 형과 내가 노래한 시간을 따지면 30대라고 유추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정체가 밝혀지면 다들 놀라시겠지? 갓 스무 살이 된 사람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원곡에 묻히지 않고 개성을 담아서 자기 걸로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거든요. 그래서 전 병약한 꽃선비 님의 노래를 더 들어보고 싶네요.”
“저도요. 숨겨둔 내공이 어마어마하실 것 같아요.”
내 정체가 드러날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몇 명의 가수가 언급됐으나 확실한 반박 근거가 나와서 전부 후보에서 탈락했다.
게스트들의 추리가 끝날 즈음, 한 명의 게스트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 목소리를 듣자마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알기론 이 목소리 주인이 한국에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더 지켜보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분이 누구신가요?”
게스트는 최정상 MC님의 질문에 노코멘트라고 대답하곤 마이크를 내려뒀다. 마지막에 화면에 잡힌 게스트의 얼굴에 숨을 멈췄다.
그 게스트는 현오 형과 같은 클리어리의 멤버였으므로.
* * *
현재 클리어리 멤버 대부분은 연예계 활동을 그만둬서 행적을 알아내기 어려웠다. 단 한 명을 빼곤.
‘태규영’이라는 본명으로 활동하는 선배님은 이제 아이돌이 아니라 연기자가 되어 있었다. 영화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다작을 하는 감초 조연이었다.
말재간도 좋아서 각종 예능에 활발하게 출연하는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 예능들 가운데 하나가 ‘버츄얼 가왕’이었던 모양이다.
고정 출연진 리스트에는 없었는데 공교롭게도 타이밍이 겹쳤다. 마치 우리가 만나기를 바랐다는 듯이.
같은 그룹 멤버였고 현장에서 노래까지 들었으니 현오 형을 떠올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지.
현오 형은 외국에 나가 있는 걸로 되어 있을 테니 확신까지는 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국에 들어왔다면 자기에게 연락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확신이 태규영 선배님에겐 있을 테니까.
토너먼트식 경연에서 탈락하지 않아서 정체가 당장 밝혀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출연진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뜻하지 않은 유예가 생긴 셈이었다.
회피할 방법은 있다. 친구 목소리인 줄 알았다면서 말을 걸어와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것.
하지만 현오 형과 내 인연을 숨기는 비겁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다.
우리의 비밀을 세상에 밝힐 생각은 없지만, 내 은인인 현오 형을 그림자 속에 숨겨둘 생각은 없었다.
이미 신인상을 탈 때도 현오 형의 이름을 언급했던 적이 있기도 하고.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스케줄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밴 안이 조용했다.
“…탈락할 수도 있는 거다. 혼자 서는 무대가 낯선 탓도 있을 테고.”
매니저 형은 내가 기분이 다운되어 있자 버츄얼 가왕 1차전에서 탈락했다고 오해한 듯했다.
다른 멤버의 스케줄이 있어 촬영을 지켜보지 못한 탓이었다.
“탈락하진 않았어요. 다음에도 나가야 해요. 조감독님이 일정 조정 때문에 따로 연락드린다고 하셨어요.”
“그럼 왜….”
“그냥, 생각이 많아져서요.”
준현 형은 더 말을 걸지 않고 운전에만 몰두했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았다.
경쾌한 노래는 흘러나오고 있는데 복잡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태규영 선배님에게 현오 형에 대한 진실과 거짓 중에 어떤 걸 말할지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한동안 심란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려운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 * *
버츄얼 가왕이 물꼬가 되어서 슬금슬금 테오라는 스케줄을 받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유명 프로나 조건 좋은 CF 같은 것들이었다.
“테오라 몸값이 이렇게 올랐어? 확 현실로 느껴지네.”
홍오란은 광고비 금액으로 인기를 실감하는 듯했다. 전보다 10배는 뛰어서 놀랍긴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치킨이라구! 무려 치! 킨!”
박하는 다른 것보다 인기 스타만 할 수 있다는 치킨 광고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운 것 같았다.
“치킨 마음껏 먹어도 되는 건가.”
먹다가 배불러서 뱉는 참사는 초록 형 사전에 없겠지.
치킨 광고 찍을 날만을 기대하는 멤버가 있는가 하면, 무슨 치킨이 맛있는지 먹어보고 소스를 비슷하게 만들어보겠단 멤버도 있었다.
반응 하나는 다양해서 재밌다.
“어차피 일하게 된 김에 팬들이랑 소통이나 할까?”
한동안 SNS에 사진을 올리는 정도밖에 하지 않았으니 팬들은 우리 소식이 궁금할 거다.
“좋아. 가볍게 수다나 떨까? 참. 이원이 대학 합격 소식도 안 알렸지?”
“응응! 코티지들이 알면 깜짝 놀라겠지?”
“당연히.”
“좋아, 그럼 다들 미모 점검하고 와. 그대로도 좋긴 한데, 미모에 흐트러짐이 없는 게 좋지.”
“누구한테 밀릴 미모는 아니지만, 이원 형이 있으니까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미모 점검, 미모 점검!”
미모라고 꼭 집어 얘기하는 초록 형이나 자기 입으로 미모를 자랑하는 박하나 다들 대단하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그러는 건 좋은데 거기에 나는 안 끼워 넣지 않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에휴.
작게 한숨을 쉬었더니 누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범인은 서혼 형이었다.
“언제쯤 돼야 네 미모를 인정할 거야?”
“…인정해. 나 잘 생겼다는 거 인정한다니까.”
“이원아. 모든 행동이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는데?”
수사관도 아닌데 왜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관찰하는지 모르겠다. 그게 연기를 잘하는 비결 같은 거라면 할 말은 없지만.
“그리고 그냥 단순히 잘생긴 게 아니야. 보자마자 같은 인간인지 의심하게 될 정도로 예쁘고 잘 생겼어.”
“표현을 너무 자제한 거 아니야? 역시 형은 절제력이 대단해.”
“…….”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라방은 언제 할 건데?”
심화 버전의 표현이 등장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어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하하, 7시쯤 어때? 팬들이랑 약속 잡아두면 이원이가 작업실에서 일찍 돌아오겠지?”
매일 늦지 않게 오겠다고 하고 12시에 들어오기를 반복했더니 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듯했다.
새벽에 들어오지는 않았으니 늦지 않게 돌아온 거 아닌가 싶지만, 그 말을 멤버들 앞에서 했다간 혼날 테니 입을 다물었다.
“6시 반까지 올게.”
알람을 맞춰두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작업실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서늘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일단 환기부터 시킨 후 전기난로와 가습기를 켰다.
습기에 예민한 장비와 악기가 있으니 오래 켜둘 순 없지만, 목에는 건조함이 좋지 않아서 잠깐씩 켜두는 편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장비 앞이 아니라 소파에 앉았다.
오늘 현오 형의 일기 마지막 페이지를 읽게 될 것이다. 두 장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그만 망설이고 결정해야겠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우물쭈물하는 것도 오늘로 끝이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일기를 마저 읽어나갔다. 일기는 현오 형이 쓰러진 날 전날까지 적혀 있었다.
상태가 많이 악화되어 있었을 테니 꾸준히 쓰는 게 절대 쉽지 않았을 거다.
뒷부분엔 체념과 자조, 그리고 뿌듯함, 희망이 뒤엉킨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죽기 전에 의미 있는 노래 하나는 하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와 내가 형을 오래도록 기억해주리란 그런 희망이 그 속에 있었다.
현오 형은 그 부족한 시간을 쪼개가며 무엇을 적고 싶었던 걸까. 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형이 불시에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 이 기록을 남긴 이유는 뭘까.
마지막 순간까지 미리 세워뒀던 계획대로 움직였지만, 이 일기 내용으로 알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 않았던 만큼, 그들이 영원히 잊지 않기를 바라는 현오 형의 숨겨진 마음을.
“이 일기를 본 이상, 형의 거짓말에 동참해줄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래도 괜찮지, 형?”
적어도 같은 그룹이었던 이들은 현오 형의 죽음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아무리 괴로운 진실일지라도 모르고 지나가고 싶지는 않다.
지독히 주관적인 선택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갑자기 연락을 끊은 현오 형을 야속하게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다면서 서서히 기억 속에서 지워내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가장 원하는 사람이 나니까.
현오 형을 추모해주기를, 그래서 형이 좋아하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나마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나니까.
결정을 내리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뿐해졌다. 다음 버츄얼 가왕 촬영에서 보여줄 무대에도 더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로그램에서 정체를 밝히고 클리어리 멤버였던 태규영 선배님을 만나 진실을 말할 각오를 다졌건만.
다음 촬영에서 버츄얼 가왕으로 등극하는 바람에 기회는 뒤로 미뤄졌다.
혹시 가왕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위기조차 없는 압도적인 표 차로 올라가 전 가왕까지 끌어내렸다.
“병약한 꽃선비 님, 버츄얼 가왕이 되신 소감 한마디 해주시죠.”
“…저를 빨리 이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내 버츄얼 캐릭터를 보는 시선들이 보였다.
좀 재수 없다는 건 알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현오 형의 기일에 형의 나무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