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79
새장 안의 카나리아
정현오가 사망했다고 적힌 종이 쪼가리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얻으려고 몇 년을 참아왔는데! 드디어 고지에 다다랐다고 여겼는데!
그간 기다려온 결과가 죽었다는 소식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누구 맘대로 죽어! 누구 맘대로!”
원하는 대로 탄탄대로를 달렸던 인생에 처음으로 오점이 생겼다.
“이럴 수는 없어.”
미리 내게 얘기라도 했다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의사를 데려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려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다니!
뒤늦게 방향을 잃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 목소리의 가치를 알아보고 마땅한 값을 치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단 한 명밖에 없다. 그 아까운 보물이 완전히 사라진 셈이었다.
디지털로 변환된 소리에는 기본적으로 노이즈가 들어간다.
마이크도 전기 신호로 변환해 소리를 증폭시키긴 하지만, 음원이나 TV,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하는 것보단 변질되는 정도가 약하다.
현장에서 정현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건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이었다. 직접 두 귀로 들어야 차이를 알 수 있으므로.
정현오 하나를 찾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다른 스페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살아있을 때 찾을 수나 있을까. 회의적이기만 했다.
귀찮음 따위 감수하지 않고, 참지도 않고 가진 권력과 재력을 마음껏 휘두를 걸 그랬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 목소리의 주인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노래 부르는 마리오네트로 만들어버렸을 텐데. 그랬다면 잠깐의 즐거움이나마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인내한 대가가 고작 이런 결과라니. 억울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를 보는 것처럼 모든 게 허탈했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나실 것 같습니다.”
“내버려 둬. 임 비서.”
의욕을 완전히 잃은 채로 시간을 대충 흘려보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속물들이 무슨 일 있냐고 걱정할 정도였으니 표가 나긴 했던 모양이다.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몸은 착실히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지만, 손에 넣고 싶었던 목표가 사라졌다는 건 그렇지 않아도 지루한 인생을 더 따분하게 만들었다.
혹시나 하고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자리를 기웃거리며 귀를 기울이다가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대표님,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프로그램 제작비 이대로 괜찮겠습니까? 검증된 PD가 준비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과도한 금액을 투자하시는 건 아닌지….”
“됐어. 버츄얼 가왕으로 쏠쏠하게 벌어다 준 직원한테 격려 차원에서 투자할 만한 금액이니까. 요즘 슬슬 지 PD 노리는 제작사 나온다는데 단속해둬야지.”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좋고, 안 되면 제 분수를 알고 찌그러질 테니 좋잖아?”
“옳은 말씀이십니다.”
대표실에서 나와 시찰 겸 방송국을 천천히 돌았다.
처음엔 아부하러 들러붙는 인간들이 있었지만, 내가 그런 행동을 혐오한다는 게 알려진 후로 싹 사라져서 한결 편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아, 그 사극은 편성 어떻게 됐어?”
“2월 편성으로 가닥이 잡혔습니다. 수목 10시 30분으로 잡힐 것 같습니다.”
“문제는 없고?”
“사전제작이라서 이미 촬영은 끝났고….”
보고하는 비서의 목소리 너머,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음악 전문 채널이다 보니 실내 세트장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흔히 듣는 노래와는 뭔가 달랐다.
벽으로 막혀서 선명하게 들리지 않아서 확신할 순 없지만, 내 감이 말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인해보라고.
홀린 듯이 그 소리를 따라갔다.
“대표님 어디 가십니까?”
임 비서가 경로를 벗어난 나를 불렀지만, 소리의 출처를 찾아내는 데 급급했다.
왠지 원하던 목소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트장 객석 방향 문을 힘주어 열었다. 두꺼운 문에 막혀 있던 소리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
이거다. 바로 이 소리다. 막혀 있던 속이 뚫리는 것처럼 시원한 쾌감이 느껴지는 소리!
“그럼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잖아.”
버츄얼 가왕 세트장의 객석 방향에서 들어와서 지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정체가 보이진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해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는 내가 찾아 헤매던 목소리였으니까.
무슨 이유로 죽음을 위장했는지 몰라도 서류를 조작하는 것쯤은 의외로 간단했다. 돈만 주면 뭐든 해주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네.”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그 누구보다 편법에 익숙한 내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다니.
오랜 기다림 끝에 듣는 깨끗하고 맑은 목소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하게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대표님…?”
“이 목소리 모르겠어? 정현오잖아.”
“대표님, 정현오는 이미 죽었습니다…. 비슷한 목소리일 겁니다.”
“아니야. 음이 조금 낮아지긴 했어도 이건 정현오 목소리야. 나는 알아.”
목소리에도 지문처럼 고유한 형태가 있어서 완전히 똑같은 목소리가 존재하기는 어렵다.
10만분의 1의 확률로 같은 목소리가 있다지만, 그런 특이한 경우를 만나는 건 더 어려울 테니.
“…제작진에게 확인해보겠습니다.”
자기가 조사해 만든 보고서 내용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임 비서는 틀렸다.
사람의 귀가 그 미세한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할까. 못 믿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만은 확신할 수 있다. 저 목소리가 정현오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 * *
“…정현오가 아니라고?”
“네, 정현오가 아니라 함이원이라는 아이돌이었습니다. ”
버츄얼 가왕 출연자 신상은 기밀처럼 취급받지만, 음악 전문 채널 M.com의 실질적 오너가 궁금하다는데 끝까지 버틸 제작진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대표님, 정현오는 사망한 게 맞습니다.”
“뭐야! 내가 미쳤다고 말하고 싶어? 이미 죽은 사람한테 매달려서?”
보통은 매우 비슷한 목소리로 치부하겠지만, 평범하지 않은 청각으로 그 정도로 쉬이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아닙니다. 제가 감히 그런 생각을.”
“그 목소리는 분명히 정현오 목소리였는데, 정현오가 아니라면…. 임 비서, 정보는 틀림 없지?”
“예. 직접 확인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친구가 전에 가왕이 돼서 오늘 다시 촬영하러 올 예정입니다.”
“…그래?”
좋은 생각이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는 듣기 힘들 거라 여겼던 노이즈에 오염되지 않은 맑은 목소리를 찾아냈는데 하필이면 똑같은 목소리라니.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공교로웠다.
마치 세상이 나를 속이기 위해 거대한 음모를 짜놓은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그 목소리가 정현오가 아니라 다른 놈 목에서 나온다면?
“직접 보고 나서 고민해보겠어. 그 목소리를 어떻게 할지는.”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사람에게서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만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애석해질 거라는 점.
무대와 가까운 관객석 하나를 비울까 하다가 임 비서를 시켜 무대 옆 제작진들만 오갈 수 있는 통로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무대가 진행되는 동안 조용하고 빠르게 돌아다니던 스탭들이 이동에 방해된다는 듯이 짜증을 내려다가 얼굴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굽신거리기를 반복했다.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전혀 관심 두지 못할 만큼 나는 온전히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정현오가 아니었다. 함이원이라는 새파랗게 어린 아이돌이었다.
이제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귀에 들려오는 이 아름다운 소리만이 중요할 뿐.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도 잡음이 없는 목소리라는 것만으로도 좋았을 텐데, 노래까지 잘해서 더 듣기 좋았다.
아니, 듣기 좋다는 표현으로 그칠만한 선율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저절로 흘러나와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도 지금의 환희를 모두 표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가왕 방어전 무대에서 한 곡만 부른다는 게 이토록 아까울 줄이야.
순간 권력이라도 휘둘러서 몇 곡이든 부르게 하고 싶다는 충동까지 일었다.
노래가 끝나고 투표 심사에 들어간 사이, 머릿속엔 상념이 가득했다.
‘…아이돌이라고 했지. 그놈의 아이돌이랑 선택받은 목소리가 무슨 상관이길래?’
왜 또 천박한 아이돌인 건지, 둘 사이에 인과관계라도 있나 싶었다.
춤추고 노래하면서 어떻게든 사람들 관심을 받아보려고 애쓰는 아이돌은 옛날로 치면 광대나 다름없었다.
인기를 얻어보겠다고 무슨 짓이든 하는 아이돌은 주위에 넘쳐났다. 케이블 방송사와 함께 연예기획사 대표도 겸하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하늘의 선택을 받은 목소리가 아이돌에게 있다는 건 불행한 일이었다. 한 그룹에 여러 명이 있어서 한 곡이라고 해봤자 그 목소리를 길게 듣기 힘들다.
차라리 솔로 싱어송라이터이기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짜증이 나진 않았을 터다.
게다가 행사 뛰러 전국을 돌아다니고 인기를 얻으면 해외까지 밥 먹듯이 나갈 게 뻔했다.
정현오가 아이돌로서 빛을 보지 못하게 손을 쓴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만을 위해 마이크도 쓰지 않고 노래를 불러주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안정제 같은 그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들을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왕은! 60초 후에 발표합니다!”
MC의 목소리가 가왕을 발표하기 전 뜸을 들였다.
중간 광고 효과가 뛰어나다는 건 알지만, 알면서도 신경질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가 가왕이 됐을지 귀가 달렸으면 알 수 있는데도 괜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버츄얼 가왕이 M.com의 효자 프로그램이 됐는지 그 이유를 체감했다.
“가왕은! 병약한 꽃선비입니다. 43표 대 57표로 가왕 자리를 유지합니다!”
환호가 쏟아지는 광경을 보면서 세트장을 빠져나왔다. 프로그램 포맷상 더는 노래를 부를 일은 없었다.
“임 비서. 쟤 이름이 뭐랬지?”
“테오라의 함이원이라고 합니다.”
“쟤 어디 소속사야?”
“하눌 엔터입니다.”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 미리 조사를 해둔 임 비서의 준비성은 칭찬할만했다.
“하눌? 거기 배우 전문 엔터 아니야?”
“아이돌도 같이 키웁니다. 씨드와 코넬에 이어 세 번째로 런칭한 아이돌입니다.”
“재정이 탄탄한 곳이라 쉽게 건드리기는 힘들겠는데….”
차라리 상장을 한 곳이라면 나았을 거다. 하눌 엔터는 비상장회사인데다 현금 흐름도 좋았다.
전에 소형 기획사들을 인수해 합병할 때 조사한 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대표님이 원하시는 걸 정확히 알아야 제가 실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현오 때와 같은 불상사는 일으키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내가 원하는 거라…. 저 목소리를 어떻게든 독차지하고 싶어. 자기 의지로 노래하면 더 좋겠고.”
한번 실패해서 더 갖고 싶었다. 내 새장에서만 노래하는 카나리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