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186
전지적 과대 시점
“재수한 형들도 많고 삼수한 형들도 있는데 왜 과대가 나냐고.”
“난 알 거 같은데? 다들 눈이 제대로 달려 있긴 하네.”
투덜대면서도 일 처리는 완벽하게 하는 것만 봐도 과대 하나는 잘 뽑았다 싶었다.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이었던 경력이 있어선지 과대 배수호는 일의 우선순위를 알고 있었고, 놓치기 쉬운 부분은 직접 꼼꼼하게 검토했다.
신입생 환영회 당일인 오늘까지 별다른 트러블이 없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선배들이 조언해주긴 했어도 과대와 부 과대가 된 신입생 둘이서 신입생 환영회를 기획한 거나 다름없었었다.
선배들이 과대가 하는 행동을 보다가 슬슬 발을 빼는 걸 봤을 때부터 부 과대는 눈치챘다. 배수호는 일복이 터진 놈이라는 걸.
불평을 늘어놓긴 해도 친구로 지내기에 괜찮은 놈이었다.
“너 먼저 안에 들어가서 정리하고 있어.”
“오케이.”
모임 장소를 찾기 쉽게 술집 문에 ‘법학과 신입생 환영회’라고 대문짝만하게 적어놓긴 했지만, 밖에서 아직 오지 않은 참석자를 기다리다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배수호는 벽에 기대 휴대폰으로 참석자 명단을 훑었다.
시간이 다 되어가는 터라 참석 의사를 밝힌 사람들은 거의 다 모인 상태. 그런데 ‘그놈’이 아직 오지 않았다.
“주인공이라 늦게 등장한다 이건가.”
스케줄 때문에 늦을 수도 있지만, 배수호의 심기는 삐딱 선을 탄 지 오래여서 부정적인 쪽으로 해석했다.
세 명의 동기를 더 들여보내고 술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캡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마스크까지 낀 사람이 술집 간판을 확인하더니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주인공이 등장한 것 같았다.
3월 초라 아직 춥다고 해도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꽁꽁 싸맬 정도는 아니니까.
“…법학과 맞죠?”
“아, 네. 안녕하세요.”
“일단 들어가요. 시간 다 됐으니까.”
얌전히 뒤를 따라오는 아이돌이라니. 배수호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신입생 환영회엔 활발하게 활동하는 선배들도 참석하는 편이라고 하는데 한국대, 그중에서도 법학과는 선배들의 참석률이 저조했다.
과 활동을 활발하게 참여할 만큼 활동적이면서 신입생까지 챙길만한 여유가 있는 선배는 얼마 없었다.
그나마도 교수님들께서 참석하신다고 전달하자 마지못해 온 거였다.
배수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앞에 나서서 신입생 환영회를 진행했다.
여러 명이 모인 지하 술집이고 각자 떠드느라 목소리를 높여도 주변에 전달이 잘 안 되는 듯했지만, 할 일은 다 했으니 알 바 아니었다.
함이원이 자기소개할 땐 무슨 일이라도 터질까 조마조마했지만,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익룡 울음소리가 술집이 떠나가라 터져 나왔던 것만 빼면.
중간중간 아이돌이 앉아있는 자리를 힐끔댔지만, 함이원이라는 녀석은 가만히 앉아서 친해져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기와 선배들에게 적당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술을 사양하면서 적극적이다 못해 공격적으로 말을 거는 동기와 선배들을 튕겨내는 게 보였다. 심지어 교수님에게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모태 철벽이라도 되는지 함이원은 견고하게 울타리를 치고 그 안으로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고 있었다.
술 게임을 연습하고 오기라도 했는지 무패 행진을 이어 나갔고, 은근하게 던지는 술 권유도 잘 피해 갔다.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
이대로만 끝난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한동안은 과 모임이 없을 테고, 축제 기간은 바쁠 테니 부딪칠 일이 없었다.
‘우리 학교 축제에 초대 가수가 된다고 해도 그건 내 소관이 아니지.’
걱정이 사라졌으니 본격적으로 술판에 끼어들 때였다. 교수님들이 떠난 술집은 난장판이었지만, 원래 혈기 왕성한 나이의 남녀가 모이면 다 그렇고 그런 법이다.
온몸이 새빨개진 녀석들과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정신을 못 차리는 녀석들을 적당히 정리하고 시끌벅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끄러운 테이블의 중심엔 당연히 화제의 신입생 함이원이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서 본 함이원의 외모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인형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하고, 어쨌든 평생 본 그 누구보다도 예쁘고 잘생긴 건 확실했다.
‘이게 연예인 아우라인가?’
모자와 마스크를 벗은 함이원의 피부는 어두운 술집 조명 아래서도 희게 빛났다.
‘불공평하네. 저게 어딜 봐서 스무 살짜리 남자애 피부냐고.’
슬쩍 자신의 볼을 손으로 쓸어봤지만 거칠거칠한 피부만 만져졌다.
이만하면 피부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진정한 ‘피부수저’가 눈앞에 있었다.
괜히 입이 써서 소주를 들이켰다. 물병이 텅 비어 있어서 종업원을 부르려고 하는데 함이원이 앉은 테이블에서 큰소리가 났다.
“X발. 번호 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냐? 좋은 말로 했더니 못 알아먹네? 내가 니 번호 팔아먹을까 봐 그러냐? 야, 어디 비싼 대답 좀 들어보자.”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두 학번 위 선배였다. 어떻게 입학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학점도 개판이라고 들었다.
워낙 여자를 좋아해서 여기저기 껄떡대는 데다 성추행이 성립하기 어려운 미묘한 수준으로 치근덕대는 악질이었다. 법을 법망을 피하는 데 이용하는 쓰레기이기도 했다.
저 쓰레기가 참석한다고 할 때부터 다른 선배들한테 조심하란 경고를 귀 따갑게 들었는데 기어이 사고를 칠 모양이었다.
함이원을 통해 여자 연예인에게 접근하겠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
“연예인이라고 재냐?”
“아뇨. 재는 게 아니라 선배님께 제 번호 알려드리기 싫어서 거절하는 것뿐입니다. 선배님이랑 친해지고 싶은 생각, 전혀 없어서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얘기하는 게 여간 기가 센 게 아니었다.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유리 멘탈로는 어려울 테니 당연한가 싶기도 했다.
“뭐? 이 X 같은 새끼가!”
“욕은 하지 마세요. 존중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도 존중해주셔야죠. 안 그런가요, 선배님.”
“뭐, 이! 와 씨!”
당돌하게 나오는 함이원을 보면서 속으로 박수를 쳤다.
뉴튜브에서 봤을 땐 말랑하고 순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친한 사람들에게만 드러내는 성격 같았다.
함이원을 더 응원하고픈 마음을 고이 접어두고 사람 사이를 헤치며 끼어들었다. 여기서 문제라도 생기면 전부 자신이 뒤집어쓸 터다. 미리 예방해야 할 일이 적어진다.
“이쯤 해두시죠. 후배들 보기 부끄럽지 않으세요?”
“과대라고 뭐 대단한 책임감이라도 있나 본데…!”
술을 꽤 마셨는지 낯짝이 불콰했다. 짝짓기하기 전의 공작새처럼 한껏 세팅한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귀 쪽으로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동영상 찍는 애들 안 보이세요? 인터넷에 퍼지는 거 순식간이에요. 쟤 아이돌이라는 거 안 잊으셨죠? 쟤 팬들이 선배님 신상 털어서 조리돌림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제가 다 선배님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알콜에 녹아버렸던 뇌세포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모양이다.
“크흠! 흠!”
헛기침을 연거푸 하던 쓰레기는 줄행랑치듯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함이원의 전화번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게 찌질함의 극치였다.
앞으로 함이원 그림자도 보기 힘들 테니 더 충돌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인기 아이돌인 저 녀석이 수업에나 멀쩡하게 들어오기나 하면 다행이다.
소란을 일으킨 주범은 튀었지만 함이원 주변은 아까보다 인구밀도가 낮아져 있었다.
오늘이 아니면 대화를 나눌 기회가 다시 오긴 힘들 거라 생각해 맞은편 빈자리에 앉았다.
“반갑다. 난 과대 배수호야. 너랑 동갑이고. 앞으로 공지 사항 있으면 내가 전달하게 될 거야. 아, 네 연락처는 나만 개인적으로 알고 있고 유출할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걱정 안 해. 난 함이원이야. 잘 부탁해.”
함이원은 실수할까 싶은지 술도 사양하고 있고, 그렇다고 악수하자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함이원이 말꼬리를 늘였다.
“그런데 저기….”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
무슨 거창한 얘?綬?꺼내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지만, 잠자코 기다렸다. 튀김 안주를 하나 집으려고 젓가락을 들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나랑? 굳이?”
“너랑 친구 하면 좋을 것 같아. 그냥 느낌이.”
이 술집에 있는 수많은 학생 중에서 하필 왜 자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엔 함이원이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리는 척할 동기들이 잔뜩인데 말이다.
그래도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말해주니 기분이 꽤 괜찮았다. 첫인상으로 호감을 살만큼 괜찮았다는 얘기니까.
외모 때문에 거리감이 들긴 하지만, 그것만 빼면 성격도 적당히 시원시원하고 적당히 재밌어 보여서 친해지기 힘들 타입은 아니었다.
연예인 친구 하나 생기면 괜히 뿌듯해질 것 같기도 하고.
“뭐, 어렵진 않지. 친하게 지내보자. 너 시간표 어떻게 짰어?”
함이원이 보여준 시간표는 기형적이었다. 누구나 이 시간표를 보면 수강 신청 폭망했구나, 할 테지만 사정을 들어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과제의 늪에서 허우적댈 미래가 훤히 보여서 안타까웠다.
신입생이라도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을 텐데 방송 스케줄과 학업을 병행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 같기도 했다.
“나 과대라서 선배님들한테 족보 꽤 받았는데 공유해줄게. 너 학교 나오기도 힘들 텐데.”
“이러려고 친해지자고 한 거 아닌데.”
“뇌물이야. 앞으로 너한테 부탁하게 될 일도 있을 테니까.”
“고마워.”
옆에서 우리 대화에 귀 기울이던 동기가 은근슬쩍 끼어들어 보려고 했지만, 그 시도는 함이원이 입을 딱 닫아버리는 바람에 무산됐다.
사람을 가리는 듯했다. 자신이 무슨 수로 점수를 땄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술자리가 한창 진행 중이라 하나둘 정신을 놓아갔다. 1차에서 2차로 넘어가면서 인원이 반토막 났다.
공식적인 행사는 2차에서 마무리됐다.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3차를 가든지 말든지 이젠 상관없었다.
2차 술자리가 파했을 때, 모인 사람들을 챙겨야 해서 억지로 정신을 바짝 차린 자신과 술을 거부한 함이원은 멀쩡한 상태였다.
“어떻게 돌아갈 거냐? 콜택시? 너무 늦게 돌아가는 거 아니야? 내일 스케줄은 없는 거지?”
말을 뱉고 나니 아들을 어린이집에 처음 보내던 날의 사촌 형이 떠올랐지만 얼른 지웠다. 동갑인데도 괜히 불안하게 느껴지는 건 전적으로 함이원 탓이다.
“스케줄은 저녁에나 있어서 괜찮아. 어디 들어가서 한잔할래?”
“나야 괜찮은데, 그 멘트는 좀 위험하지 않냐?”
오해받기 딱 좋다. 신입생 환영회 내내 긴장하고 있었는지 철벽 치던 놈이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하다니.
여자였으면 백퍼 그린라이트라고 김칫국을 드럼통으로 마셨을 거다.
‘아이돌 짬에서 나온 바이브인가?’
팬 서비스를 하다 보니 저절로 몸에 뱄는지도 모르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배수호는 그날의 술자리에서 첫인상과 달리 함이원이 얼마나 허술하고 신기한 녀석인지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