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
기간 한정 음악 친구
택시를 타고 어리바리하게 현오 형에게 이끌려 온 곳은 꼬마 빌딩 1층.
방음이 완벽한 연습실이었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 나도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현오 형이 데려온 연습실엔 숙식 공간이 딸려 있었는데, 연습실이 메인이라고 알려주듯 생활공간이 상대적으로 좁은 구조였다.
곳곳에 엿보이는 생활감이나 갑자기 나를 초대한 걸 보면 한 층 전체를 차지하는 프라이빗한 연습실을 장기 렌트한 듯했다.
아이돌 연습실은 이렇게 생겼나?
눈치껏 주변을 살피자 현오 형이 어디선가 의자를 끌고 와 자리를 권했지만, 나는 의자에 앉는 대신 바이올린을 내려두고 서성거렸다.
연습실의 특이한 점은 한쪽 벽을 도배한 거울이었다. 바닥 재질도 조금 달랐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무용 전공 연습실이 이런 형태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녹음실 차리려다가 그만둬서 처치 곤란이란 느낌으로 구석엔 컨트롤러와 믹서, 디지털 피아노 등이 처박혀 있었다.
오른쪽 벽엔 현이 풀린 다양한 브랜드의 기타가 주르륵 세워져 있고 반대편엔 보컬 연습실이라고 적힌 문이 있었다.
문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정말 기본적인 물건만 갖춘 것 같았다.
앰프와 오디오는 정석적인 제품이었고, 이 연습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물건은 바로 고가의 스피커였다.
이 스피커 소리 들어보고 싶었는데.
덥석 사긴 비싸기도 하고 집에 다른 모델이 있어서 필요하다고 말씀드릴 수 없었다.
스피커 앞에서 얼쩡거리자 현오가 물었다.
“그 스피커가 마음에 들어? 한 곡 틀어 줄까? 추천곡 있어?”
개인적 견해론 스피커 성능 확인엔 즐겨 들었던 곡이 좋다. 같은 곡을 다른 스피커를 통해 전달받으면 그 차이를 세세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디오와 연결된 노트북으로 쇼팽 녹턴 2번과 현오 형의 노래 한 곡을 직접 골랐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녹턴의 곡조. 집에 있는 스피커와 비교했을 때 공간감이 달라서 확실히 구분할 순 없어도 소리가 전체적으로 약간 화려해졌다. 이야기의 뼈대나 등장인물이 같아도 성격이 밝아진 느낌이랄까.
아마 이 스피커는 아이돌 댄스곡에 더 특화되어 있을 터다. 나라면 그렇게 세팅했을 테니까.
“우리 2집 타이틀인 세미콜론이야.”
둥둥?
그루브한 기타 리프와 함께 곡이 시작되었다. 속도가 빨라지며 하나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바로 직감했다.
이게 현오 형의 목소리구나!
말할 때와는 음색이 달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리 달라도 같은 계통에 있는 목소리라서.
다른 멤버들의 것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하나씩 추가되며 조금씩 음악이 고조되겠다 예상하던 순간 내 예상을 벗어나는 EDM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박자가 점차 빨라지며 다들 신나게 랩을 뱉어내고 음색을 뽐냈다.
생각보다 노래 좋잖아?
신선한 전개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시원함이 있었다.
그중에 돋보이는 하나의 목소리.
다만, 멤버들에게 맞춰 자제한 기색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 그룹의 음악에서 하나만 유달리 튀면 조화를 깨뜨리니까.
그렇지만 현오 형의 독보적인 목소리가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멤버들이 조금 더 실력이 좋았더라면. 프로듀서가 그들의 실력을 한계까지 끌어냈다면. 그게 아니라도….
현오 형이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머리를 맴돌았다.
세미콜론(Semicolon)이라는 곡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서정적인 가사를 살리기 힘든 빠른 비트였다.
현오 형의 또렷한 발음 덕에 가사는 귀에 꽂히듯 들려서 더 아쉬웠다.
삶이라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 달라는 응원을 이렇게 신나게 연주한다니. 초반 리프를 떠올려보면 편곡 전엔 부드러운 발라드였을 가능성도 있다.
현오 형의 노래를 제대로 듣기가 어려웠다.
분명히 내 애청 기준을 훌쩍 넘어설 텐데. 물론, 나를 만족시키는 기준에 개인적인 목소리 취향이 들어갔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뭐, 정 안 되면 내가 해버리면 되지.
나는 벽에 놓인 어쿠스틱기타 하나와 피크를 잡았다.
이 브랜드는 오랜만에 써 보지만 상관없다.
순식간에 튜닝기 없이 현을 조여 조율을 해버렸다. 그리고 자세를 딱 잡고 방금 들었던 곡의 노래 전주를 어쿠스틱 버전으로 편곡했다.
원곡보다 발라드의 색채가 강하게. 조근조근 읊조리듯이.
현오 형이 나를 미지의 생물처럼 보는 듯하지만, 착각이겠지.
세미콜론(Semicolon)의 인트로를 연주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반주에 맞춰 노래해달라고. 난 연습실을 찾아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래, 노래 불러 달라고 했지. 어쩐지 운명 같다. 이 곡을 노래하는 게. 하필 지금 이 가사로….”
전주를 다시 반복하는 동안 현오 형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 입술이 떨어지고 감미로운 음색의 목소리가 노래를 시작했다.
Semicolon, semicolon, non-period 아직 시간은 멀고 멀고 멀었어
더 기다려줘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어
아! 이게 내가 기다렸던 목소리다. 위로하듯, 안아주듯 귓가에 속삭이는 따스함.
Semicolon, 너의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어
마침표가 아니라 comma of your life
랩파트는 가성으로 처리하는구나. 잘 어울린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활짝
해맑은 하늘이 기다리고 있어
작은 새들의 지저귐은 어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시간
가장 예쁜 옷으로 갈아입어
첫눈에 웃음 짓게 될 너
바람에 지쳤다면 날개를 접고
잠시 내 품에 쉬어가도 좋아
수많은 별빛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인간의 신체 기관에서 나오는 소리에 불과한데도,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울고 싶어졌다.
표현력이 좋아야만 현실처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살아 숨 쉬는 캐릭터들과 진심이 담긴 스토리가 있어야 소설이 재밌는 것처럼, 표현력이 좋아야 감동을 줄 수 있었다.
현오 형의 노래는 충분히 내 마음을 움직였다. 언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절절하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진짜 목소리를 듣기 때문일까? 아니, 그보단 형만의 독보적인 호소력 때문일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non-period
그 속에서 작은 희망을 찾아줘 제발
Semicolon, 너의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어
마침표가 아니라 comma of your life
Semicolon, semicolon and semicolon ;
소리가 작아지다가 은은한 마무리까지.
전율이 돋을 정도로 합이 좋았다. 주선율을 건드렸는데도 어긋남 없이 맞춰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기타 반주를 잊어버릴 뻔한 찰나는 바로 머리에서 지웠다.
기대만큼, 아니 기대 이상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소름 돋을 만큼 울림이 짙었다. 이 여운이 오래도록 지속될 것 같았다.
어쩐지 말할 때의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아우라가 있더라니. 괜히 현오 형에게 노래해달라고 부탁해버린 게 아니었다. 나한테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다!
절로 들썩이는 어깨. 움찔거리는 발가락. 이건 잔뜩 떠들어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몸짓이다.
내가 간절히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은 무척 드물다. 그런 나를 안달 나게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형을 인정할 수 있었다.
“…어땠어? 진심으로 불렀는데. 어째 무대보다 네 앞이 더 떨리지? 보컬 흔들리진 않았지? 그나저나 네 기타실력 무슨 일이야? 난 어디 가서 기타 친다고 입도 뻥긋 못하겠다. 게다가 방금 즉석에서 뜯어고친 거 맞지? 와- 진짜 천재를 여기서 보는구나!”
내가 극도로 말하는 일을 줄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텐데도 질문이 넘쳤다. 아무래도 흥분해서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현오 형도 신났구나. 나 혼자만의 만족이 아니라서 안도를 느꼈다.
그런데. 이 실력을 두고 망했다고? 왜? 아이돌판은 도대체 무슨 마계야…?
어깨에 멘 스트랩을 통해 기타의 무게가 느껴졌다.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말이 잔뜩이었다.
입술이 근질거렸다. 어차피 기타를 든 상태니까 충동에 한 번 더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주먹을 쥐었다 편 다음 유명한 곡의 한 소절을 연주했다. 현오 형이 이걸 알아채 줄까?
디리리딩 딩~
“이 노래! ‘즐거움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지~ 너와 함께 노래하고 싶어~’ 음…? 혹시 이게 네가 하고 싶은 말이야?”
눈치가 빨라서 좋았다. 처음 시도해봤는데 한 방에 성공했네!
“이렇게 대화 나누면 되겠다! 나도 즐거워! 더 노래하고 싶긴 한데 정말 학교에 안 돌아가도 돼? 어른으로서 양심에 찔리는데.”
난 재빨리 기타를 연주했다. 국민 트로트 가수가 불렀던 오래도록 사랑받는 곡을.
디리링~
“아하하! ‘괜찮아요~ 나는 자유로워요~ 어쩌면 이게….’ 아 이 뒤 가사는 아니구나? 그래 그 뒤 가사는 좀 그렇지.”
트로트 창법으로 꺾기까지 하진 않아도 되는데. 참고로 그 뒤 가사는 ‘이게 마지막일지라도 온 생을 다 바쳐’였다.
말하지 않아도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니!
내가 떠올렸지만, 정말 획기적인 발상이다. 이걸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도 운이 좋았다.
보통은 원곡도 아니고 기타로 치환된 멜로디를 곧바로 알아채지 못할 테니까.
“우리 진짜 잘 통한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지? 이원아, 친구 할래? 우리가 9살 차이여도 문제없잖아. 내가, 음. 유학 갈 거라 반년 정도밖에 시간이 없지만…, 그전까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기간 한정 음악 친구. 나쁘지 않다.
띠딩~ 딩 디링~
이번에는 락이다.
“‘친구여~ 우리에게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 나도 동의해. 너 현명한 선택한 거야. 내가 인생 선배로서 말하는데 마음 맞는 친구 사귀기 진짜 어려워. 너무 꼰대 같았나? 어쨌거나 잘 부탁해. 친구!”
딩- 딩딩딩~
“이게 무슨 곡이더라? 아! ‘잘 부탁해요~ 나의 사랑을~’”
내가 뚱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잘 부탁해요.’까지였냐고 능청을 부렸다.
아무래도 기타 버전으로 편곡하니 약간 딜레이가 생기는 것 같다. 기타를 한동안 안쳐서 실력이 녹슬었거나.
기타를 제자리에 놓아두고 구석에 박혀있는 디지털 피아노를 옮겨왔다.
기타보단 손에 익은 피아노가 편하지.
나중에 듣기론, 내가 태평하게 만족스러워할 때 현오 형은 조금 울고 싶었단다.
바이올린에 이어 기타, 피아노까지 섭렵하려는 이 천재 녀석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너무 버거운 친구를 사귄 건 아닌가 싶어서.
…그 정도로 천재라는 평가는 오버 아니야?
* * *
완벽한 무대를 보여주겠다면서 현오 형은 거울 앞에 섰다. 나를 맞은편에 둔 형은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췄다.
해체한 지 반년. 그전에도 제대로 된 활동은 오래 못했을 텐데. 그동안 꾸준히 연습했는지 노래에 흔들림이 없다.
원곡에 맞춰 격한 춤을 추면서 노래까지 부르다니 감탄스럽다.
경험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격렬한 움직임으로 차오르는 숨과 노래의 호흡을 맞추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을지.
탄탄한 발성과 체구에 비해 우렁찬 성량이라….
잘 나가는 남돌 그룹 멤버 중 한 명이 최근에 음주 운전해서 난리라던데. 차라리 형이 그 자리에 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멤버들과 함께 고생하면서 정이 너무 많이 들어서 형제 같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 얘기하는 형을 떠올리고 헛된 생각을 접었다.
호구나 다름없는 형이 자기 이익만 따져 행동하는 모습은 상상되지 않았다.
수다쟁이인 형 때문에 나는 자연스레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아이돌 생활은 데뷔한 게 다행일 정도로 전형적인 망돌 루트를 탔다고 한다.
연습생 땐 데뷔 직전까지 갔다가 엎어지고, 회사가 쫄딱 망하기도 하는 바람에 여러 기획사를 전전했단다.
그러다 힘없는 중소 엔터에서 겨우 데뷔했고, 여러 번 앨범이 엎어진 끝에 간신히 2집을 낼 수 있었다고.
2집 타이틀곡은 알음알음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방송 출연은 안 돼서 작은 행사를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고 했다.
뜰 기회가 와도 같은 그룹 멤버들이 시비에 휘말리고, 소속사 문제가 터지고, 잡혔던 스케줄이 갑자기 취소되는 등 별의별 일이 다 생겼다고 했다.
지원이나 수습은 못 해줄망정 소속사 자체도 문제투성이라 없는 셈 쳤다고 한다.
내내 방치했으면서 정산금액에선 다 뜯어가는 양아치였다나.
재능도 넘치고 감탄할만한 미남은 아니어도 평균 이상. 소속사도 잘못 만났고 멤버 운도 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여러모로 잘못 끼워진 단추.
현오 형은 해체밖에 방법이 없었다면서 그의 아이돌 경험담을 마쳤다.
“지금 돌이켜봐도 진짜 우여곡절이 많았어…. 불운의 연속이었지. 누가 아이돌 하지 말라고 말리는 것처럼. 그래도 끝까지 버텼고 여기까지 왔네. 쉽게 포기했더라면 희망고문 당하는 시간은 단축됐겠지만 해볼 만큼 해봤다는 점에서 후회는 없어. 온 힘을 전부 쏟아부어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왕좌는 좁고 모든 아이돌이 성공할 수는 없으니까.”
음악과 춤에 열정이 있는 현오 형이라면 솔로 댄스 가수도 어울렸을 것 같다.
“…솔로는요?”
“음. 솔로 가수로 데뷔하자는 제안도 여럿 받아서 고민해봤는데…. 난 아직 좀 부족한 것 같아. 유학 가서 공부 더 해보려고.”
말을 마친 현오 형은 음료수라도 사 오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와…. 지금도 충분히 대단한데 얼마나 더 실력을 키우겠다고 유학을?
뭐 나쁜 생각은 아니다. 망해버린 그룹에 대한 마음 정리도 할 겸 새로운 환경에서 공부해보는 것도 좋은 선택 같았다.
얼마나 긴 유학이 되든 형이 돌아올 날을 고대하며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라면 나도 예고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 있을까? 더 오래 걸릴까? 그전까지 자주 만나서 놀면 되겠지.
…친구랑!
학교에서도 친구가 없는 아웃사이더라서 무척 설다.
그 친구가 ‘기간 한정’이라는 점을 까맣게 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