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48
건강 검진과 첫 촬영
앨범 준비엔 여유가 있었다.
좀비 드라마 촬영 일정이 2월 초부터 시작되고 한동안은 빡빡하게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추가 촬영은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드문드문 나가면 될 거라고 했다.
그러니 적어도 2월 말은 되어야 앨범 준비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전에 건강 검진부터 받아야 하고.
준현 형이 바로 건강 검진을 예약하는 바람에 홍오란의 생일 전날에 건강 검진을 후다닥 하게 됐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 싫다는 말도 못 하고 다녀와야 했다.
다른 멤버들은 특히 전날의 금식을 끔찍해했다. 그나마 대장 내시경은 이번에 포함되지 않아서 두 끼의 금식으로 끝낼 수 있었다.
박하는 울상을 지은 채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태연하게 검사를 받을 거라 생각했던 지온까지 질색했다. 귀찮다는 이유를 댔는데 과연 그게 전부인지는 지온만 알 거다.
“힘들었어어….”
데뷔가 확정된 후에 정밀 건강 검진을 했었는데 그땐 아무것도 모른 채 검사받아서 그랬는지 지금이 더 힘든 것 같았다.
초록 형은 작년에 병원에 실려 왔을 때 정밀 건강 검진을 해둬서 이번엔 몇 가지를 빼놓고 할 수 있었다. 좋다고 하기엔 조삼모사 같은 상황이었다.
수면 내시경을 끝내고 나와서 대기실에 모였다.
지난 건강 검진 때엔 수면 내시경으로 했었는데, 맨정신으로 위 내시경을 하면 목에 상처는 덜 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끝까지 고민하다가 멤버들이 전부 수면 내시경으로 한다길래 맨정신으로 하는 건 다음 기회로 미뤄두고 같이 한숨 자고 나온 차였다.
“준현 형, 저 수면 내시경 할 때 헛소리 안 했어요?”
혹시 내가 헛소리를 했다면 다음엔 진짜로 마취 안 하고 내시경 하는 것도 고려할 생각이었다. 엄청난 비밀 같은 건 없긴 하지만, 혹시나 부끄러운 소리를 할지도 모르니까.
“초록이 넌 온갖 음식 이름을 끝도 없이 나열하는 바람에 간호사가 귀여워했었다. 나머지는 조용하거나 웅얼거려서 뭐라고 하는지도 잘 안 들리는 수준이었고.”
“왜 나만….”
“그만큼 평소에 먹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있었다는 뜻 아닐까!”
정말 박하의 해석대로라면 무시무시한 식욕이었다. 우리의 직업 특성상 가끔 식이 조절을 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마저도 다른 아이돌 그룹에 비하면 거의 안 하는 수준이었다.
본격적인 활동기에 들어가면 소모하는 에너지만큼 채워 넣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맘껏 먹게 해주기도 했다. 테오라 전담 요리사 지온이 있어서 영양과 조화를 따져 아침부터 세 끼 꼬박꼬박 챙겨 먹고, 간식이며 야식까지 빼먹지 않는데….
정말 ‘위 대(大)한’ 초록 형이었다.
“다 들켜버린 김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초록아, 우리 위 내시경 해서 죽 먹어야 하는데….”
잔인한 진실을 알려주는 서혼 형의 목소리에 초록 형이 실시간으로 좌절했다. 간신히 밋밋한 흰죽 대신 맛있는 죽을 먹는 걸로 타협한 후에 정신과 상담도 마쳤다. 건강 검진 수준의 가벼운 상담이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탈출이다!”
병원에 갇혀있다가 탈출한 느낌이었다. 의사 선생님도 간호사님도 전부 친절했지만, 그래도 병원에 익숙해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병원 특유의 냄새, 조용한 듯 우울한 분위기. 아니, 그냥 병원 자체가 싫은 걸까.
병원에 좋은 기억이라곤 없어서 오고 싶지 않았지만, 이마저도 누군가에겐 복에 겨운 소리일 것이다. 건강을 챙길 여유마저 없는 사람이 더 많을 텐데 말이다.
현오 형에게도 체계적으로 건강 검진을 시켜주는 소속사가 있었더라면 지금과는 결과가 달랐을까? 허무한 가정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쨌거나 건강 검진할 때 병원에 오는 걸로 충분하다. 병원에 오지 않으려면 건강해지는 수밖에 없겠지?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라는 조언을 따라야 할 타당한 이유가 생겼다.
“건강 검진도 해치웠겠다, 내일 계획이나 짜볼까?”
생일 파티라고는 해도 생일인 멤버가 좋아하는 메뉴로 밥 한 끼 먹는 게 전부인데 초록 형에겐 즐거운 이벤트인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나 내일 점심 먹고 돌아올 거니까 참고해. 하룻밤 자고 형이랑 점심 먹고 오게.”
하나뿐인 가족과 생일을 축하하고 싶다면 기꺼이 양보해줄 수 있었다.
범무 형이 동생 생일을 의미 있게 보내게 해주고 싶다고 지난주부터 톡으로 이것저것 물어오기도 했다. 나보다는 친형인 범무 형이 홍오란을 더 잘 알 텐데도.
범무 형 같은 형이 생긴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해줄 수 있다. 나한테 동생이 있었다면 범무 형같이 섬세하고 다정한 형이 되어줄 수 있었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답은 알 것 같다. 아니오.
“그럼 저녁에 외식할까. 오란이 네가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그러던지.”
똑 부러지게 말하라는 박하의 투덜거림에도 오란은 꿋꿋하게 이것도 저것도 좋다는 자세를 유지했다. 저쯤 되면 일부러 고집을 부리는 거였다.
박하와 오란의 힘겨루기는 병원에서 나오는 길에 팬과 마주쳐 잠시 중단되었다. 한껏 사이좋은 척을 하던 둘은 팬과 헤어지자 바로 서로를 향해 으르렁댔다.
…둘 다 즐기는 거 아니야?
정말로 사이가 나쁘다면 저렇게 호흡이 착착 맞을 수가 없다. 오래 알고 지낸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나 보다.
이제는 일상처럼 느껴지는 광경을 구경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다른 멤버들도 둘을 보고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나이로 따지면 둘이 우리 그룹에서 제일 어리긴 하지만, 저렇게 아빠 미소를 지을 것까진 없지 않나?
설마 나도 저런 표정인가…?
믿고 싶지 않지만 얼떨떨하게 더듬어본 내 얼굴엔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저 둘을 보고 흐뭇해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이해 가지 않는 현실에서 고개를 돌렸다.
* * *
홍오란의 생일이 지나가고 드디어 본격적인 드라마 촬영이 시작됐다.
중간에 주, 조연들이 모여서 대본 리딩도 했고, 돼지머리를 두고 고사도 지냈다.
카메오로 잠깐 촬영에 참여했을 땐 이런 과정을 전부 생략했던 터라 신기하고 낯선 경험이었다.
드라마 제작진, 배우분들과 인사하고 몇 마디 형식적인 대화를 조금 나눴을 뿐이지만 어색함은 확 줄어들었다.
가뜩이나 바쁜 아이돌이 연기에 제대로 집중할 수나 있겠냐는 고까운 시선으로 우릴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겉으로 크게 드러내진 않았다. 까칠한 태도 정도라면 이미 면역이 돼서 웃는 얼굴로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참고로 원작인 웹툰의 제목이자 드라마의 가제였던 ‘최초의 좀비’는 그대로 유지하는 걸로 결정됐다.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딱딱하고 밋밋하다는 평이 다수 나왔지만, 대체할 제목을 찾지 못한 탓이었다. 그만큼 핵심을 담고 있으면서 원작 팬에게 직관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제목이 없었다.
원작에선 우리나라 전역을 종횡하는 스케일이었지만, 시간과 예산, 장소 대여 문제로 강원도청의 협조를 얻어 촬영하게 됐다.
도심 한복판을 배경으로 찍어야 할 땐 CG를 입힐 예정이라 CG 세트장과 강원도를 오가는 일정이 될 듯했다.
서혼 형과 지온, 그리고 나는 촬영 시간보다 이르게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새벽인데도 현장은 분주했다.
스탭 한 분 한 분에게 싹싹하게 인사한 후에 대본을 다시 들춰봤다.
아역배우 출신이면서 연출을 배우는 학생이기도 한 서혼 형은 도움이 필요한지 묻더니 눈 깜짝할 새 일을 마무리 지었다. 촬영장에 익숙하다고 해도 관심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지온과 나는 얌전히 있었다. 어설프게 나서봤자 방해만 될 것 같아 가만히 있기로 했다. 우리는 서혼 형이 아니라서 함부로 모르는 일에 끼어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좀비들의 움직임을 총괄하는 안무 감독님을 돕게 된 초록 형은 안무 감독님과 이모, 조카 사이가 되어 있었다. 촬영 일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바쁘게 돌아다니더니 이런 속셈이었나?
오늘 보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믿을 정도였다. 초록 형의 수완이라면 나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겠지만, 기막힌 사교성이긴 했다.
“분장부터 하겠습니다! 먼저 오신 분들 먼저 이쪽으로 와주세요! 단역분들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조감독님의 우렁찬 외침을 따라 준비된 천막에 들어섰다. 서혼 형을 따라서 어색하게 천막을 젖혔는데 안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이 드라마의 원톱 주연인 강백 선배님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밑 작업을 받는 팔을 보느라 눈을 내리깔고 있던 강백 선배님이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오디션이나 대본 리딩하면서 뵀을 때보다 눈빛이 훨씬 강렬하게 느껴졌다.
현장에선 원래 이렇게 분위기부터 달라지는 분이실까.
“오늘이 첫 촬영입니까?”
우리에겐 오늘이 첫 촬영. 그렇지만 드라마 첫 촬영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기도 했다.
“긴장 풀고 나한테 보여줬던 만큼, 딱 그만큼만 현장에서 보여주면 됩니다. 물론 그 이상이면 더 좋고. 응원할 테니까 잘해봐요.”
일단 오디션이나 대본 리딩에서 선보였던 연기는 선배님의 기준에서 나쁘지 않았나 보다. 빈말이라고 하더라도 연기로 차별한다는 강백 선배님 입에서 응원의 말이 나온 걸 보면.
“특히 혼이는 중요한 역할이라는 거 잊지 않았지? 광기를 터뜨려야 하는 악역이니까 연기 끝나면 바로 몰입에서 빠져나오고.”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혼 형에겐 말을 편하게 하고 계셨다. 아역 시절의 서혼 형과 만났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그만큼 연기력을 인정한다는 뜻일까? 두 가지 전부일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수 있었다.
“이전에 특수 분장을 해본 적은 있고?”
특수 분장까지 해야 할 일이 어디 흔할까. 얼굴에 하는 페이스페인팅도 아니고. 보통은 평생에 한 번도 경험해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서혼 형도 피나 생채기 같은 가벼운 분장이 고작이었다고 했다. 아역에게 특수 분장까지 시킬 만한 드라마 자체가 거의 없기도 했다.
“단단히 각오해둬라. 지금 우습게 봤다가 호되게 고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특수 분장이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캐스팅을 고사했을 거라는 진담 섞인 우스갯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단다. 아마 강백 선배님도 그 무리 가운데 한 명이지 않을까?
이 영화 출연진 중에 강백 선배님이 제일 고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주인공이라 카메라에 자주 잡히는 만큼 촬영 때마다 누구보다 꼼꼼하게 분장해야 할 테니까.
강백 선배님 옆에서 우리도 차례대로 분장을 받았다. 특수 분장을 맡은 분장사분들은 하품을 연거푸 하면서도 노련한 손놀림으로 우리를 좀비로 변화시켰다.
의상으로 가려지지 않은 얼굴과 목, 손과 팔은 어느새 핏줄이 검게 도드라지고 살 썩은 내가 날 것 같은 너덜거리는 피부로 뒤덮여 있었다.
“끝났으니까 일어나셔도 돼요. 촬영 전에 격하게 움직이지 마시구요. 혹시 리터치할 부분 생기면 얼른 여기로 오셔서 말씀해주세요.”
거울에서 눈을 떼고 돌아봤더니 지온과 서혼 형으로 보이지 않은 좀비가 거기에 있었다.
서혼 형은 눈동자를 작아 보이게 하는 사백안 렌즈까지 껴서 인간 같지 않았다. 낯설기도 하고 끔찍하게도 보이는 외형이었다.
“이원이 분장이 제일 심플해서 그런가? 좀비 분장을 했는데도 미모가 안 가려지는걸?”
“이원, 나르시시스트다워.”
뒤에 ‘좀비’라는 단어를 빠뜨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마치 내가 원래 나르시시스트라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으니까.
“좀비 분장도 했겠다, 초록이부터 놀라게 해줄까?”
드물게 장난기 넘치는 서혼 형이 먼저 제안했다. 쓸데없이 연기력을 낭비하겠다는 의미였지만 거절은커녕, 흥미가 생겼다.
초록 형을 놀릴 기회는 자주 오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