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5
세계관, 그리고 테오라
아이돌에게 있어 세계관은 스토리텔링을 만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 세계관은 아이돌의 컨셉, 곡, 뮤직비디오 등으로 연결될 수 있었고, 팬들을 몰입시킬 수 있었다. 새로운 단서와 해석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고 다른 아이돌 그룹과 차별화를 시킬 수 있는 개성이 되어주기도 했다.
“세계관을 먼저 정하면 그룹의 이름이나 컨셉을 정하기 쉽지 않을까 해서요.”
“세계관이라….”
선배 아이돌 그룹 SEED는 이렇다 할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아이돌이 소수여서 딱히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듯했다.
“세계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 드리자면 그 의의는….”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반드시 세계관을 짜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열정적인 설명이었다.
“우선은 가볍게 세계관을 짜봤어요. 빅뱅 이론을 기반으로 해서 빅뱅으로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을 시기에… 6명 각자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도록 6개의 별이라는 관점에서… 이후에는 이 여러 개의 별이 상호작용을… 여기에 요즘 핫한 평행우주로 불리는 이론을 퓨전해서… 이런 식의 세계관입니다. 어떠신가요?”
아….
대강 알아듣겠지만, 왜 이런 세계관을 구성하고 우리에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닌지 다들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떠난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한 번에 설명을 마친 게 대단하다고 생각될 만큼 복잡했다.
“이게 무슨, 내용이라고요?”
“…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요. 저만 그래요?”
“외계어 하시나 했는데요….”
“요즘 복잡한 세계관이 추세라니까 만들긴 해야겠는데, 팬들은 이걸 왜 좋아한대요? 어디서 포인트를 잡아야 해요?”
이 세계관이 우리의 컨셉에, 곡에, 뮤직비디오에 적용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납득하지 못하는 세계관 속 이야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표현해낼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관을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을까?
세계관이 있어서 좋은 점은 스토리텔링, 즉 재밌고 생동감 넘치는 스토리를 곁들여 팬들에게 우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세계관이 우리를 나타낼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우리만의 특징과 세계를 녹여낼 수 있는 도구.
하지만 그 세계관이 어려워질수록 아이돌과의 연결이 흐릿해졌다. 세계관이 아이돌에게 녹아들지 못해서 따로 놀기도 했다. 아이돌을 좋아해서 세계관을 공부하는 경우는 그렇다 쳐도, 세계관은 떼놓고 그냥 아이돌만 좋아하기도 했다. 열심히 이런 세계관이라고 소개해도 깊이 파고드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세계관이 없어도 별문제 없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룹도 있었다.
나는 손을 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죄송하지만, 이 세계관 너무 난해하고 어렵습니다.”
“이게 요즘 유행이라 신경 써서 만들었는데 이원 씨는 어느 부분이 맘에 안 드실까요?”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네.”
“직관적이지 않아요. 복잡하기만 하고 재미없어요. 한 마디로….”
“구리다네요.”
“오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물론 의미는 통하지만 저렇게 격하게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상처받지 않으셨을까.
“저, 그게 아니라 저희끼리 얘기를 나눠보고 내린 결론은, 다양한 컨셉을 시도해보고 싶고, 소화해낼 자신도 있다는 거였어요. 세계관이 거대하면 어떻게든 적용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이득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 부분은 차차 채워갔으면 좋겠어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흙 속에 묻힌 이름 모를 씨앗처럼 단순하게 표현해도 충분할 것 같아요.”
“흙 속의 이름 모를 씨앗.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
대표님이 중얼거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내 아이디어를 낼 기회가 온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저희 그룹 이름을 테오라라고 지어봤습니다. 흙이나 땅, 대지를 뜻하는 테라(Terra)와 무한함을 상징하는 뫼비우스의 띠(∞)를 합쳐서 테오라(Te∞rra)입니다. 테우라라고 읽어도 상관은 없고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모태인 대지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의견을 내고 나니 후련했다. 내 의견이 채택될지 여부 보다는,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는 점이 중요했다.
하고 싶은 말을 참기가 의외로 어려웠다. 여태까지 쭉 참아오기만 해서 그럴까? 돌려 말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직설적으로 튀어 나가곤 했다.
“이거 우리 엔터 이름이랑 소속 아이돌 그룹 이름까지 고려해서 나왔습니까?”
“네. 대표님.”
“우리 회사가 하눌이고 남자애들이 SEED, 여자애들이 Cornel이니까. 하늘과 씨앗, 나무, 그리고 대지. 포부가 상당히 크긴 한데 결이 같네. 꽃 정도론 마음에 안 찼나?”
“코넬 선배님들 그룹명이 산수유나무꽃의 꽃말 때문에 지어졌다고 들어서요. 꽃이랑도 관계가 있으니까요.”
산수유나무꽃의 꽃말은 영원불멸의 사랑. 그것 때문에 산수유나무의 학명이 붙여졌다.
“의미 좋고, 발음 괜찮고, 우리 엔터 소속이라는 느낌도 나고. 다들 어떻습니까?”
다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대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계관은…. 너도나도 대단한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경쟁하다가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른 엔터 대표들이랑 대화를 해봐도, 해야 하니까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더라고.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대세라잖아. 따라야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이런 세계관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팬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아티스트까지 이런 생각이라면…. 이번엔 방향을 바꿔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직원들이 생각에 잠겼다. 대세에 따르지 않는다는 건 모험이지만, 손해를 볼 것 같진 않다고 판단하는 직원들이 다수였다.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한 대표가 결단을 내렸다.
“세계관은 다시 만들어보죠. 우리 애들 그룹명에 맞게. 대신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고 쉽게.”
“…알겠습니다. 대표님.”
단숨에 기획을 바꿔버리자 담당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납득하지 못 했지만, 대표님의 지시에 토를 달 순 없어서 억지로 대답한 것 같았다.
“그룹 이름 따로 생각해 온 사람 있을 텐데 말해봐요.”
“생각은 해왔는데 테오라보다 별로네요. 그냥 묻어두렵니다.”
그때 박하가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저는 박하스라고….”
“안 돼!”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안 된다고 외쳤다. 나도 동참했다. 아니, 그룹 이름을 어떻게 쓰려고 저렇게 지어?
박하가 자기 마음대로 박하와 아이들을 생각했다가 나온 이름 같았다. 박하s.
“박하야. 네가 이렇게 이기적인 줄 몰랐어. 우리의 존재는 S밖에 안 되니?”
초록 형이 상처받은 연기를 하면서 박하를 타박했다. 서혼 형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쳤네.”
“Bacchus? 술의 신?”
오란이 한 마디로 짧게 소감을 던졌다. 지온, 제톤은 바쿠스로 잘못 들은 듯했다. 바쿠스도 부적절하긴 한 것 같다. 술의 신 이름을 가진 아이돌 그룹이라니. 왠지 불길했다.
“농담이었어. 농담이에요오.”
과연 농담이었을??싶긴 했지만 믿어주기로 했다.
이 이외에도 최강소년들, G단, 스카이프린스, 반젤이 후보로 나왔다.
최강소년들과 스카이프린스는 말 꺼내기 무섭게 탈락했다. 그리고 G단은 쥐단으로 읽혀서 탈락이었다. 가이아의 G에 단체를 뜻하는 단을 붙였다는데 아무도 설명은 듣지 않았다.
반젤(B-angel)은 끝까지 후보에 남았다. 그러나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제톤이 철자가 악한, 불량배라는 뜻이라며 마음에 안 들어 했고, 의미가 밝혀지자 멤버들 전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보이엔젤, 소년천사라는 뜻이라나. 흑역사가 될 것 같았다. 어디 가서 소개하기도 부끄럽고….
결국, 우리 그룹의 가칭은 내가 제안한 ‘테오라(Te∞rra)’가 되었다. 가칭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큰 이변이 없다면 이대로 확정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룹명, 예명은 대략적으로 정해졌고, 세계관은 수정이 필요하고, 컨셉에 대해 이야기만 나눠보면 되겠네요.”
“아까 다양한 컨셉을 해보고 싶다고 했었죠? 그건 받아들일게요. 그래도 데뷔 앨범의 컨셉은 한 가지로 정해야 해요. 세계관 나오는 거 보고 정할까요?”
비주얼 디렉터라는 분이 물었다.
깐깐한 선생님을 연상케 하는 여자분이었다. 세련된 외모와 말투 때문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목소리가 흔치 않은 하이톤이라 기억에 남았다.
“아뇨. 들어갈 메시지는 이미 나왔고, 직관적이어야 하잖아요. 그럼 틀은 금세 머릿속에 그려지죠.”
“그렇게 금방요? 와 역시 능력 있는 분은 다르네요. 그럼 대충이라도 말씀해주실래요?”
어렵게 짜온 세계관을 퇴짜맞은 시나리오 라이터는 능력 있다는 칭찬에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그녀는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떠올린 내용을 풀어놓았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그러니까 인류가 사라진 종말 이후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 세계에 여기 있는 분들이 새롭게 깨어나는 거죠. 인조인간, 유전자 변이. 어떤 이유에서든요. 이게 끝이에요. 종말의 원인은 알 수 없고, 여러분은 지식은 충분하지만, 아무것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린아이나 다름없습니다.”
“천재적이세요! 왜 이런 세계관인지 알겠어요! 기본적 지식이 주입되어 있고 어른의 몸으로 태어난 거나 다름없으니까 다양한 감정에 대해 배우거나 얘기할 수 있고,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죠. 문명의 흔적에서 영화나 책, 기록을 찾았다 치고 새로운 내러티브를 끼워 넣을 수 있죠. 한국적인 이야기도 얼마든지 추가할 근거가 있고요. 종말의 원인이 좀비나 드라큘라였다는 식으로 넣어도 되고요.”
비주얼 디렉터라서 그런지, 컨셉을 넣을 방향을 단번에 캐치했다.
“아 다만, 초반에는 일반적인 사랑 얘기는 어렵겠어요. 인간이 남자애들밖에 없는 데다 그런 세계관이면 생존이 먼저 아니에요?”
“세계관에 너무 몰입하셨어요. 그것도 스토리를 만들기 나름이고요.”
“흐음…. 첫 번째 앨범은 탄생, 혹은 시작을 다루면 좋겠어요. 그것에 대한 설렘, 기쁨, 그런 식으로요. 청량 계열의 곡이 어울리겠네요. 아련청량? 아니면 세계관이 세계관이니까 몽환청량 정도….”
뒷부분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비주얼 디렉터님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듯했다. 집중하는 중이라고 보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다른 직원분들은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량’은 어느 때나 인기 있는 컨셉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어리니 그 나이에 맞는 컨셉이 더 잘 어울렸다.
“큰 얼개는 나왔군요. 그럼 다음으로 진행해야 할 사항은?”
“곡을 받아서 선정하는 일입니다. 여러 곡을 받긴 했는데 퀄리티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좋은 곡만 들어오면 빠르게 진행될 겁니다. 아직은 여유가 있으니 더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기다려야죠. 좋은 곡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신인 개발 팀장이 의견을 추가했다.
“대표님, 앞으론 연기 연습을 시켜둬야 할 것 같습니다. 뮤직비디오 찍기 전에 기본은 하게 해둬야죠.”
“연기 수업도 커리큘럼에 있지 않나?”
“기본적으로 개인 선택에 따라 듣게 되어 있고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멤버도 있으니까요.”
내 얘기구나. 연기는 해본 적 없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죠. 그리고 애들 피부나 체형 관리도 본격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좋아. 지금도 잘 생겼다만 더 잘생겨지면 금상첨화지.”
해야 할 일이 자꾸만 늘어났다. 하지만 그게 데뷔로 가는 길이라면 기꺼이 감수해야지.
아이돌이 되는 길은 정말 쉽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