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53
가족인데요? (1)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엄마와 내가 받은 오해를 풀 수 있을까.
이번 상황극의 포인트는 ‘우연’. 회의 끝에 전시회를 좋아하는 지인과 같이 방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멤버들과 함께 갤러리에 우르르 가면 의도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떻게든 티는 나겠지만, 노골적으로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멤버들은 스케줄이 빌 때 각자 관람하러 오겠다고 했다. 전시회는 모름지기 느긋하게 봐야 하는 거라나?
“지인 중에 전시회 좋아하는 분 있어?”
다행히 내 협소한 인간관계 안에서도 전시회, 뮤지컬 같은 문화생활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
“규영 형을 부르려고. 가끔 클리어리 형들이랑 같이 있는 단톡방에 전시회 일정 올리기도 하는데, 이번에 아빠 전시회도 올라왔었어.”
“원래부터 가고 싶어 했던 전시회라면 흔쾌히 가자고 해주겠네. 그 전시회가 너희 아버님 전시회라는 사실은 모르고?”
“응. 말한 적 없어.”
자랑하는 것 같아서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면 더 좋은데? 리얼한 반응을 보여주실 테니까.”
규영 형도 이젠 배우로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은 눈꺼풀의 미세한 떨림, 커지는 동공 같은 반사적인 신체 반응을 하나하나 제어할 수 있는 수준까진 아니었다.
연기로 느껴지지 않는 날것의 반응이 나와준다면 더 좋다.
“딱 좋네. 팬들이 어떤 인연으로 알게 됐는지 궁금해할 테니까 규영 형님한테도 도움은 될 거고.”
“바로 얘기해볼게.”
규영 형은 안 그래도 가려고 했다면서 초대권이 생겼다는 이야기에 반색했다. 초대권이 있으면 작은 선물과 작은 책자 형식의 팸플릿을 받을 수 있었고,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전시회장에 입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일 오전에 시간 괜찮대. 엄마도 11시쯤에는 시간 비울 수 있다고 하셨고.”
“하늘이 도와주나? 일이 착착 풀리네.”
정해둬야 할 사항은 다 정해뒀으니 내일 잘 대처하기만 하면 된다.
운명이 걸린 대단한 작전도 아닌데 왜 이렇게 두근거릴까? 음모를 꾸미는 흑막이 된 기분이다.
이래서 초록 형이 계략을 꾸밀 때마다 즐거워했나? 중독성 있는 설렘이다.
“이원. 전부 무찌르고 와.”
내일 만날 사람 중에 무찌를 상대는 없지만, 그래도 의미는 통했다. 내가 맡은 역할을 잘 해내면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고 동조한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으리라.
출격 준비 완료!
* * *
아빠의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는 종로에 있었다. 나는 라이브 방송을 켤 준비를 하고 규영 형의 차에 올라탔다. 멤버들은 따로 오기로 했고 나는 규영 형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규영 형, 라방 켜도 될까요?”
“얼마든지.”
예고하지 않은 라이브 방송이라 시청자 수는 평소보다 천천히 늘어났다.
“안녕하세요! 테오라 함이원입니다. 오늘은 멤버들 없이 저 혼자 라방하는 날이에요.”
– 안녕! 이원아!!
– 혼자라도 좋아 자주 와 주라ㅜㅜ
– 잘 지냈어? 어디 아픈 데 없고?
– 꽃다발은 왜 들고 있어요?
– 이원이 어딨지? 난 꽃밖에 안 보이는데!
– 차 안이야? 테오라 차 아닌데?
– 운전 누가 해?
“운전은 제 지인인 형이 해주고 있어요. 같이 전시회 가기로 해서요! 꽃다발도 그래서 샀어요. 코티지들한테 인사해주세요, 규영 형.”
카메라를 운전석 방향으로 돌렸다.
“안녕하세요. 배우 겸 엔터테이너 태규영입니다. 이원이가 전시회 초대권이 있다고 해서 같이 가고 있습니다.”
– 태규영??
– 엥?
– 이원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
–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배우잖아?
– 우리 애한테도 연예인 지인이 생겼어요!
– 두 사람 접점 없어 보이는데
– 어떻게 알게 됐는지 짐작도 안 된다ㅋㅋㅋ
“규영 형, 팬들이 형이랑 어떻게 알게 됐는지 궁금하대요.”
“전에 버츄얼 가왕에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까 ‘친구의 친구’라 친해졌어요.”
우리를 연결해준 친구가 누군지는 언급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넘겼다.
“마침 규영 형이 가고 싶다던 전시회 초대권이 생겨서 동행하게 됐어요.”
“제가 수더분해 보여도 나름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거든요. 박물관이나 전시회 가는 것도 좋아하고 뮤지컬, 연극 보는 취미도 있어요.”
– 솔직히 그런 거 하나도 관심 없을 거 같이 생겼엌ㅋㅋㅋ
– 함이원 데뷔할 때부터 스폰서 있었다며?
– 뭐래
– 팬 아닌 사람 꺼져라
– (먹이주기 금지)
– 그거 앎? 태규영 전직 아이돌이었어ㅋㅋ 전직 아이돌 vs 현직 아이돌 조합
예상대로 스폰 건을 빌미로 분란을 일으키려는 채팅을 치는 사람이 나타났다가 강퇴당하는 게 보였지만, 못 본 척 무시했다. 어차피 곧 밝혀질 일이었다.
규영 형은 운전하느라 못 봤는지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떻게 알아봐 주시네요. 연습생 생활 짧게 하다가 데뷔해서 아이돌 생활을 하기도 했었죠…. 망돌이어서 모르시겠지만요. 아이돌 안 했으면 아마 미술 쪽이나 연기 쪽으로 진로를 잡지 않았을까요?”
– 진짜 아이돌이네? 클리어리? 근데 이 사진들은 뭐ㅋㅋㅋ
– 아직도 어리둥절
– 예능에서 태규영 봤을 땐 까불까불하는 것만 보였는데
– 함이원 인맥 리스트가 갱신됐습니다! 친한 형 +1
“도착했네요. 전시회장 안쪽으로 이동할게요. 사실 전시회장 내부에서 라방해도 된다고 사전에 허락받았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방송 켜봤어요.”
애초에 아빠 전시회는 사진 촬영이 허용되는 전시회이기도 했다.
– 와! 내 돌은 라방에서 전시회도 보여준다!
– 어떤 전시회야?
– ㄷㄱㄷㄱ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낫겠죠?”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 앞에는 아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의 이미지를 사용한 플래카드가 크게 걸려 있었다. 이라는 문구와 함께.
“지수함 작가님 전시회 예전에 우연히 다녀온 적 있는데 너무 좋았었거든요. 그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할까요? 작품 갖고 싶었는데 그땐 컵라면도 손 벌벌 떨면서 사 먹을 때였어서…. 돈 많이 벌어서 그림 척척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었어요.”
아빠의 그림을 향한 극찬에 내가 다 쑥스러워졌다.
– 지수함 작가? 내가 엄청 좋아하는 화가님인데!
– 꽃다발 산 거 보면 이원이 아는 작가님인가?
– 검색해보니까 알 거 같음 SNS에서 봤어
– 작품 가격 계속 올라가더라 옛날에 그때 샀어야 했는데!
– 이원이 따라서 다녀와야겠다ㅎ
그런데 규영 형도, 우리 팬들도 역시 아빠를 ‘지수함 작가’로 알고 있구나.
아빠는 본명 그대로 활동하지 않고 하지 않고 일부러 성을 뒤로 배치해 ‘지수함’이라는 이명으로 활동하셨다.
영어 이름 철자 사이에 하이픈을 넣지 않고 일부러 ‘Jisuham’으로. 그래서 아빠가 지 씨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엄연히 아빠가 유도한 착각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조금 재밌었다.
“특별히 해설이 필요한 그림들은 없어요. 자유롭게 보고 느끼고 즐기면 돼요.”
모던한 스타일의 갤러리는 입구부터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그림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보통보다 작품 배치 간격이 좁았고, 작품이 눈높이 아래위로 자유분방하게 걸려 있었다.
규영 형은 팸플릿을 야무지게 챙기곤 그림에 빠져들었다.
“코티지들 감상할 수 있게 한 바퀴 천천히 돌게요.”
조용히 움직이면서 카메라에 작품들을 담았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라는 전시회 주제가 왜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림 속엔 아빠가 사랑하는 것들이 잔뜩 담겨 있었으니까.
엄마와 나, 현이와 주황이가 메인이었고 거기에 아빠가 만들어주시는 달콤한 디저트와 정원의 꽃들이 끼어들었다.
실사체 화풍이 아닌데다 보이는 그대로의 색채를 사용하지 않아서 그림의 모델 중에 내가 있는 것을 알아보긴 힘들었다.
“여기까진데 어땠어요? 각자 감상할 시간은 충분했어요?”
– 나 그림알못인데 가슴이 말랑말랑해진다
– 빨간 딱지 저거 판매됐다는 뜻이지? 완판된 거 같은데?
– 하라는 작품 감상은 안 하고ㅋㅋ
– 지수함 작가님이랑 인사하러 가나?
아빠를 찾으려고 했는데 엄마를 먼저 발견했다. 엄마는 언젠가 테오라와 촬영했던 감독님과 함께였다.
어떻게 아는 사이시지? 우리가 데뷔할 때 신세 졌던 감독님이신데? 이 감독님이 찍어주신 영상으로 테오라 데뷔 광고를 했었다.
“안녕하세요.”
“어? 함이원 씨, 오랜만이네요? 여긴 어쩐 일이에요? 전시회 구경 왔어요?”
“네. 초대를 받아서….”
자세히 설명하자면 복잡해서 말끝을 흐렸다.
“이분은 광고 회사 더연 네트웍스의 연진혜 대표님이세요. 이쪽은 아시죠? 테오라 함이원이에요.”
“…안녕하세요?”
예상에는 없던 상황이었다. 일단 소개해주는 감독님에게 맞춰 얼결에 인사는 했는데, 이래도 괜찮은가?
시작부터 계획이 어긋나 버렸다. 앞으로 전부 애드립으로 진행해야 할 수도 있을 듯했다.
“여기서 또 보네요?”
엄마는 여기서도 역할극에 심취하셨다. 의뭉스러운 미소로 말을 걸어오는 엄마에게 장단을 맞춰야 할 것 같았다.
“네. 잘 지내셨어요?”
“둘이 아는 사이였어요?”
엄마는 감독님에게 거짓을 말하는 대신 화제를 돌리셨다.
“어머, 방송 중?”
“네.”
슬쩍 쳐다본 채팅창은 혼돈 상태였다.
팬들은 테오라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기울인다. 이미 내 스폰설을 들어서 알고 있던 사람에겐 ‘광고사의 여자 대표’에게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미 만난 적 있다’라는 발언까지 나왔으니….
– 설마……
– 진짜라면 저렇게 대놓고 아는 척할 리가 없잖아!
– 지능적으로 그런 허점을 노리는 거 아냐?
– 그냥 오해 아님?
– 무슨 얘기 하는 거예요?
– 아니야ㅎㅎ
– 일부러 아는 척하는 거 맞음 테오라 데뷔 광고 어떤 회사에서 담당했게? 저 여대표 회사ㅇㅇ 각이 딱 나오지?
어…? 우리 데뷔 광고도 엄마 회사에서 찍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데뷔로 정신이 없기도 했고, 엄마도 아무 말씀도 없으셨는데….
“이원아? 누구셔?”
사실관계를 어떻게 여쭤볼까 고민하는데 전시회 관람을 끝낸 규영 형이 다가왔다.
이제 우리 관계를 밝혀야 할까 고민하는데 엄마가 먼저 선수를 치셨다.
“더연 네트웍스 대표 연진혜예요. 태규영 씨, 드라마랑 예능에서 잘 보고 있어요. 언제 우리랑 함께 광고 찍을 기회가 생기면 좋겠네요.”
“대단한 분이셨네요. 저도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대표님.”
규형 형은 엄마가 건넨 명함을 보고 우리가 일로 엮인 사이라고 이해한 듯했다. 감독님과 통성명했을 땐 그 오해가 깊어졌다.
“지수함 작가님 작품이 인기가 많긴 한가 봐요. 전시 보러 와서 같은 업계 분들도 뵙고.”
“저도 이 작가님 진짜 좋아하는데 통했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규영 형은 엄마에게 휘말려 한참 지수함 작가가 얼마나 멋진지 토론했다.
엄마….
그 사이 라이브 방송 채팅창은….
– 전부 추측성 발언. 난 함이원 믿어 저런 순둥이가 ㅅㅍ? 진짜면 나 인간 불신 생긴다
– 원래 범죄자가 평범하게 생긴 거 몰라?
– 분탕질 칠 거면 나가! 여기 이원이 라방이거든?
– 전시회 관람 라방 해준다고 해서 좋았는데 이게 무슨 난장판..
분명히 이 라이브 방송을 켠 사람은 나인데 끼어들 틈이 없었다.
‘채팅창 관리자가 XX님을 강퇴했습니다.’ 하는 알림이 계속 올라왔다. 그제야 채팅창이 조금씩 진정됐다.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팬들을 위해서도,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