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69
크라운 오브 아이돌 (3)
하루하고 반나절. 1차 경연이 시작하기 전에 크라운 오브 아이돌에 출연하는 선배들과 안면을 익히고 이야기도 나눠봤다. 지나가다가 안부를 묻는다거나 별 의미 없는 질문들을 던지면서 말문을 트니 금방 어색함은 지워졌다.
경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아선지, 아직은 서로 자유롭게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이미 자기들끼리 인맥이 형성되어 있는 선배님들도 있어서 끼어들기가 조금 어렵긴 했지만, 우리 그룹엔 사교성으로는 최강인 초록 형이 있었다.
초록 형은 중간에서 우리 멤버들을 선배들과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을 맡았다. 덕분에 나는 여러 형들과 친해져서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었다.
공감대가 많아서 쉽게 친해질 수 있었겠지만, 주어진 시간이 짧았던 것 치고는 커다란 성과였다. 특히 나처럼 관계를 만들기 어려워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고도 얻기 힘든 기회였다.
평온하고 자유롭던 시간이 지나가고 1차 경연 당일.
참가자들은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풀어져 있던 모습을 보다가 프로 아이돌 같은 모습을 보니 그 차이가 엄청나게 느껴졌다.
“미리 말씀드렸던 대로 1차 경연의 주제는 identity. 각 팀은 정체성을 주제로 경연을 펼치게 됩니다. 경연 순서를 정할 대표를 그룹 별로 한 명씩 뽑아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그룹은 리더가 나왔는데 우리 그룹의 대표는 나였다. 테오라 멤버 중에 제일 운이 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홍오란이 이런 쪽으로 약하다는 점은 인정하겠는데, 내가 그 정도로 강운의 소유자라고…?
멤버들이 원하는 순서는 다섯 번째나 마지막이었다. 무대가 압도적이라면 사실 순서는 크게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각 팀의 1차 경연 무대를 보고나서 투표를 시작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기억에 잘 남는 후반부 순서가 유리하다는 걸 부정하긴 힘들다.
나를 내보낸 멤버들은 결과가 어떻든 불평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원하는 순서가 당첨됐으면 좋겠다.
각 그룹의 대표들은 최정상 MC님 맞은편에 서서 투명한 통 안에 있는 공을 뽑았다. 공을 뽑는 순서는 눈치껏 정했는데 내가 꼴찌였다. 아무래도 나이나 경력 순서가 아니었을까. 설마 눈치 게임은 아니었겠지…?
꼴찌가 된 것에 불만은 없었다. 다들 뽑고 나서 남는 숫자를 받게 되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마지막 테오라 함이원 씨까지 공을 뽑았습니다. 그럼 공을 열어 숫자를 확인해주세요.”
내 공 안에는 들어있는 숫자는 5. 멤버들이 원했던 5, 6번 중에 하나가 걸렸다. 첫 번째는 티오티 선배님들이었고, 마지막 순서는 밀키독 선배님들이었다.
음악방송이나 행사, 축제를 다니면서 다른 아이돌의 무대를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심혈을 기울인 무대는 사실상 보기 어렵다. 잠을 줄여가면서 여러 스케줄을 돌다 보면 무대 하나에 온 힘을 다하는 건 인간의 체력으론 불가능하다고 몸으로 깨닫게 되니까.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맞춰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가슴이 벌써 두근댔다.
수년간 쌓인 경험으로 선보이게 될 최고의 무대가 얼마나 멋질지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1차 경연의 준비 과정은 따로 촬영했으니 편집한 분량이 경연 앞부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경연을 위해 준비된 공연장으로 이동해주시면 됩니다!”
무대 세트장엔 객석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런 경연 프로그램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빠져선 안 되는 재미. 특별히 관객을 일반인 반, 아이돌 팬 반으로 대동했다고 들었다. 아이돌 팬 관객은 여섯 그룹의 팬을 같은 비율로 받았다고 했다.
우리로서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마 관객이 많지는 않겠지만, 관객 앞에 서는 무대와 텅 빈 무대는 각오부터 다르니까.
단체로 이동한 공연장은 조용했다. 리허설을 하고 나서 경연이 진행되기 직전에나 관객이 들어올 예정이라 공연 관계자분들만 묵묵히 일을 하고 계셨다.
“아직은 텅 빈 무대지만, 여러분들은 곧 여기서 1차 경연을 펼치게 됩니다. 아이돌의 자존심을 걸고 팬들 앞에서 선보이는 의 1차 경연! 그 대망의 무대가…!”
거창한 방송용 멘트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차분히 리허설을 마쳤다. 우리 리허설 전후에 선배님들의 리허설을 잠깐 보게 됐는데 완벽하지 않은 리허설만으로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가 전해졌다.
“와, 그룹 PR로 한발 앞서나갔다고 방심하면 안 되겠는데?”
“아이덴티티가 주제라 그 그룹의 대표곡을 들고 올 줄은 알았는데 이건 좀 반칙 아니야?”
조명, 무대장치, 의상, 수많은 백업 댄서…. 어느 것 하나 화려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우리도 신경은 썼지만, 스케일부터 다른 느낌이랄까.
배정받은 대기실에 모인 우리는 조금 심각해졌다.
“우리끼리 준비할 게 아니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어야 했나?”
“외적인 요소들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제일 중요한 건 전체적인 조화야. 초록아, 난 모든 것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딱 맞아떨어졌을 때 완벽할 수 있다고 생각해.”
“으음….”
“불안해, 초록?”
“위기감은 드네.”
아마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어서 겉으로 대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초록 형은 엊그제부터 크오아가 데뷔한 아이돌들이 경연을 펼치는 프로그램이라 사실상 인기 투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작 3년 차라서 단정 짓기 이르지만, 다른 그룹은 팬층이나 팬덤의 수가 어느 정도 고정된 상태였다.
이 프로그램이 흥행한다면 팬덤이 출렁거리면서 지각 변동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각 팬덤만의 조촐한 잔치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작지만은 않았다.
인기 투표로 끝나게 된다면 우리는 우승하기 어려울 것이다. 크오아 참가자들의 국내 팬 규모는 엇비슷하더라도 해외 팬 규모는 격차가 있었고, 우리는 해외 팬이 적은 축에 들어갔다.
아직 본격적으로 해외 투어를 해본 적도 없는 테오라는 인기 투표처럼 흘러가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불리해지게 된다.
“테오라가 도전자라는 거 모르고 시작한 건 아니야. 근데 물리쳐야 할 상대가 만만하지 않네.”
“무찔러야 하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재밌지 않나?”
한쪽 입가를 삐뚜름하게 올린 지온은 세상을 다 이겨 먹을 것 같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하…. 미안. 내가 꼴사납게 쫄아 있었네. 일당백인 우리 멤버들이 있는데 말이야!”
혼자서는 역부족일지 몰라도 멤버들이 있다. 함께할 때 더욱 힘이 되는 멤버들이.
“지온, 이길 자신 있지?”
“Of course.”
“테오라는 성장캐로 가자! 다른 그룹들은 초반에 집중한다면, 우린 서서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1, 2차 경연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고, 3, 4차 경연을 스스로 준비하는 다른 그룹들. 1차 경연부터 스스로 준비한 테오라. 과연 어느 쪽이 돋보일까.
“뭐, 뒷심 안 빠지면 우린 GG….”
“홍오란! 불길한 소리 금지!”
박하의 손에 몇 대 얻어맞은 것 같은데 타격감이 별로 없어 보였다. 박하 주먹이 그렇게나 솜방망이인가? 아니면 홍오란 맷집이 좋은가?
“끝까지 그 텐션을 유지한다면 뭐, 순순히 인정해야지. 본인들 실력까지 그렇게 출중하다는 얘기니까.”
이 혹독한 세계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거기에 이제껏 뼈를 깎는 고통으로 이제껏 본인들의 실력을 키워오기까지 했다면? 존경심이 저절로 들 것 같다.
“흠, 성장 서사 좋지. 그룹 PR로 떡밥도 던져뒀으니까 눈덩이처럼 잘 굴러가서 커질 수도 있겠어.”
초록 형은 다시 가느다란 눈으로 호선을 그렸다. 돌파구가 보인 모양이다.
어쨌든 우리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었다.
* * *
네 번의 무대가 끝났다.
우리 순서 바로 앞의 네 번째 무대는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함성의 크기만 들어도 심상치 않았다.
앞선 무대도 전부 엄청났다. 데뷔 후 지금까지의 모든 내공이 담긴 무대였다. 언뜻 보기엔 여유로워 보였지만, 자세히 살피면 목소리에 담긴 호소력이나 동작 하나하나가 오랜 연습의 결과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팬들도 이유까진 알지 못해도 그 깊이를 감지했을 것이다. 이건 본능적인 영역의 문제니까.
“가자. 가서 보여주고 오자. 우리가 테오라라고.”
오랜만에 손을 모아 겹친 우리는 초록 형의 말에 푸스스 웃었다.
1차 경연의 주제는 ‘identity’. 우리는 잠시 승부 같은 것들을 내려두고 우리가 누군지 보여주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아직 테오라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의 머리에 우리가 똑똑히 새겨질 수 있게!
우리가 준비한 노래는 ‘탈출해’와 ‘여름이었다’을 매시업한 곡. 테오라의 정체성이라고 할만한 곡으로 두 곡을 골랐는데, 편곡과정에서 하나의 곡처럼 연결됐다. 가볍게 듣다 보면 두 곡을 매시업해서 만든 곡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통통 튀는 청량함은 여전하지만, ‘탈출해’보다는 청량하고 ‘여름이었다’보다는 파워풀한 곡이었다.
팬들에게 테오라는 밝고 희망찬 이미지이기를 바란다. 지금까지는 원하는 대로 이미지를 그려왔다고 생각하는데 대중들도 우리들의 생각에 공감해줬으면 좋겠다.
푸르게 반짝거리는 바다를 연상하게 하는 무대 세트나 조명은 특별하지 않았다. 특수 효과도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 데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제외했다.
기본 무대에 백업 댄서도 없다. 이 무대를 꽉 채우려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했다.
흰색을 메인으로 파란색과 남색이 섞인 캐주얼한 의상을 입고 무대 전체는 누볐다. 날씨가 더워선지, 움직임이 크고 동선이 빠르게 바뀌는 안무 때문인지 짧은 시간인데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무대를 끝내고 카메라를 보며 숨을 고르다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쳐다봤다. 우리가 춤추고 노래하는 내내 환호성을 쏟아내던 분들은 다들 얼굴에 미소를 그리면서 같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거면 충분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우승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 웃는 얼굴보다도 가슴 벅차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항상 우리를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감사를 담아 허리를 깊이 숙였다.
“테오라의 탈출해&여름이었다 무대 함께하셨습니다. 다음 무대가 준비되는 동안 인터뷰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흐트러진 머리와 의상을 다듬고 관객석 앞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1차 경연 무대를 끝내셨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있는 힘껏 여러분들에게 테오라가 이런 그룹이라고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괜찮았을까요?”
네에?!
마치 포탄처럼 터져 나오는 대답에 깜짝 놀라다가 입술을 늘였다. 이번 무대의 목표는 성공인가 보다.
“두 곡을 매시업하셨는데 한 곡처럼 들리더라고요.”
편곡 담당은 나라서 재빨리 마이크를 잡았다.
“두 곡을 듣다 보니 공통점이 많더라고요. 그리고 전부 제가 작곡한 곡이기도 해서 편하게 작업했습니다.”
“너무 쉽게 대답하시는데요? 누가 들으면 곡이 뚝딱 나오는 건 줄 알겠습니다. 하하.”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멤버들의 고개가 내 쪽으로 쏠렸다. 뭐라고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았다.
“1차 경연에서 몇 등 정도 할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마이크는 오란에게 넘어갔다.
“저희 희망 사항으로는 당연히 1등!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운이 좋으면 3등?”
“테오라는 의외로 당돌한 막내 포지션은 아니었군요.”
“에이~ 쟁쟁한 선배님들이 포진해 계시잖아요! 1등은 어렵죠.”
홍오란 머릿속은 선배님들을 다 제끼고 1등 해 먹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할 텐데. 울상을 짓는 홍오란에게 공감하는 척하다가 참을 수가 없어서 신발 속의 발가락에 힘을 줬다.
연기력이 나날이 늘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