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7
각자의 눈에서 (2)
적당히 서로 이득을 주고받을 것. 그것이 나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암묵적 조건이었다. 한쪽이 심하게 손해를 보지만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참아줄 요량이 있었다.
함이원의 눈치를 봐선 이 조건을 금방 어길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의외로 서툴긴 해도 인간관계에 진심이었다. 저절로 마음이 쓰이는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상처가 있는지, 겁을 먹고한발 한발 조심스레 다가오는 모습이 내게는 훤히 보였다. 사정이 있겠지만, 그 모습을 보는 나는 어쩐지 초조해졌다.
길고양이를 길들이는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와도 되는데. 더 가까이 와. 무서운 사람 아니야, 하고.
함이원은 연습에 영혼까지 쏟아붓는 타입이라 보는 사람을 더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옆에 있다 보면 괜히 춤에 관한 조언을 한다거나 잔소리를 하게 됐다. 그런 행동이 일상으로 자리 잡아가던 어느 날은 함이원과 둘이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 그 마음이 춤으로 드러나니까.”
“응….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 난 마음이 보였구나…. 춤도 음악처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인데, 내가 잠시 잊었어.”
“아.”
함이원이 별 의도 없이 내뱉은 감상이 새삼스럽게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내가 초심을 잃었었나.’
그간 선생님들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하면서도 왜 아쉬움이 남는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스스로 얻어야만 하는 깨달음이라 그토록 안타까워했던가.
‘가르치면서 배운다더니.’
깨달음의 영향은 월말 평가에서 바로 나타났다.
“…한 꺼풀 벗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 드네요.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어요?”
각성의 계기가 없으면 실력이 제자리걸음, 아니 뒷걸음치는 사례도 종종 접했다. 그러니까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나는 함이원에게 커다란 도움을 받은 것이다.
내 기준에서 인간관계는 ‘서로’ 이득을 주고받아야 성립한다. 그러니 나는 빚을 진 셈이다.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아줄게.’
어쩌면 나 같은 사람은 약삭빠른 사람이 아니라 호구를 무서워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기분 좋은 오산이었다.
* * *
[서혼]성향에 따라 자신의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속에 모든 사정을 감추고 있는 사람이 있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우연히 광고 모델로 캐스팅되면서 아역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내가 TV에 나온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연기가 재밌었고, 연기 후에 주어지는 칭찬 또한 달았다. 내가 없어서는 안 될 특별한 아이가 된 것 같아서 신이 났다.
그러나 작은 배역에서 시작해 주인공의 아역이 되면서 뒤늦게 이 세계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
‘아니, 그전에는 아빠가 내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주셨던 거겠지.’
보호자 겸 매니저가 되어주던 아빠가 가게를 맡기로 하면서 엄마와 동생들이 있는 여수로 내려가셨다. 그 뒤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소속사에서 붙여준 매니저는 아빠와는 달랐다.
아역들 간에 기 싸움이 벌어져도 방관했고, 뇌물을 주지 않아 오디션에서 탈락했음을 내가 눈치채든 말든 신경 하나 쓰지 않았다. 나는 그저 돈 벌어오는 도구에 불과했다.
돌이켜보면, 그 매니저는 연기만 잘하면 모든 일이 말끔히 해결된다는 식으로 나를 채근했다.
‘연기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연기뿐인데.’
어릴 때는 순진하게 그 말을 믿었다. 태어날 때부터 아팠던 막내를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스스로 빚어낸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까지 의무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막내는 큰 수술을 마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물론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검사받아야 하고, 다시 수술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당장은 안심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제야 전신을 지배했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그 여파는 몸으로 나타났다. 곧바로 쓰러져서 일주일간이나 앓았으니까.
그 후 연기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연기가 한순간에 지겨워졌다.
맨날 괜찮다고만 했던 내 상태를 뒤늦게 알게 된 부모님은 소속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여수로 나를 데려갔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학교만 다니는 거야. 혼아, 알았지?”
고작 중학생인 아이가 번아웃 증후군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부모님은 제발 쉬기만 하라고 빌다시피 부탁했다.
한동안은 그저 멍하니 지내다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자 운동을 권유받았다. 나는 금방 헬스에 푹 빠졌고, 새로운 학교에서 친구들을 사귀면서 아주 평범한 학창 생활을 보냈다. 그러다가 힙합을 좋아하는 친구와 만나게 되면서 랩을 배우게 됐고….
“너는 래퍼보단 아이돌이다. 배우로도 경쟁력 있는 얼굴이 아깝기도 하고.”
“아이돌?”
생각해보지도 않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를 본격적으로 힙합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할 순 없겠어. 아이돌 래퍼는 그나마 나을 거 같다.”
“그렇게 안 어울려?”
“어. 넌 너무 여려. 조폭들 사이에 신부님이 들어가는 격이지. 결이 달라, 결이.”
원래 크리스천이라 랩에서도 성당 다니는 티 내냐는 말을 들었던 터라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친구도 뭘 몰라서 아이돌 래퍼를 추천했던 거지만, 그때는 ‘나는 아이돌 래퍼가 낫겠구나.’ 싶었다.
휴식을 취하면서 새로운 흥미를 얻었고, 연기를 제대로 배워보면 어떨까 싶어졌다.
연기가 싫어졌다기보단 힘들어서 아무것도 할 의욕이 안 생긴다는 쪽이라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연출 쪽으로 연기 공부를 병행하며 아이돌 래퍼가 되겠다고 하자 부모님은 걱정부터 앞세우셨다.
옛날보다 훨씬 건강해져서 체력으론 자신 있었다. 쉽게 지치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부모님께는 무작정 참지 않고, 못 버티겠다 싶으면 과감하게 그만두고 학업에 집중하겠다고 말씀드려야 했다. 한번 번아웃을 겪어봤으니 그 정도까지 무리하지 않겠다고도 재차 약속했다.
오랫동안 오빠를 보지 못해서 내게 익숙해지는 데에 한참 걸렸던 동생들은 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소식에 울음을 터뜨렸다.
“혼이 오빠 그럼 언제 오는데?”
“영이도 따라가면 안 돼?”
몸이 약한 영이의 부탁은 웬만하면 들어주고 싶었지만 안 되는 일이다. 정기 검진이 잡혀서 서울에 올라가는 날에나 볼 수 있겠지.
“자주 연락할게. 주아야, 영아.”
“이번엔 TV로도 못 보겠네.”
8살 차이가 나는 둘째 주아는 내가 아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너무 어렸다. 나에 대한 첫 기억이 TV에서 나오는 광고였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 주아야….”
너무 이르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탓에 가족과 보낸 시간이 턱없이 적었다. 동생들이 오빠에게 바라는 거라곤 같이 있어 주는 것뿐일 텐데, 그 단순한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울음바다를 만들면서 서울로 왔고, 하눌 엔터에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목표했던 한예대에 합격했다. 아마 배우 경력을 인정받은 것 같았다.
운동하면서 체력을 길러둔 탓인지 연습생 생활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같은 연습생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좋은 동생들을 만나서 나 자신의 성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 * *
어느 날, 초록이가 새로운 아이를 데려왔다. 함이원이라는 열여덟 고등학생을.
비스크 인형같이 생긴 함이원은 노래가 특기라고 했지만, 노래를 잘 부를 것 같은 외형은 아니었다. 오히려 배우 쪽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눈치가 없어서 뜬금없는 발언을 한다거나 인간관계에 서툰 점이 자꾸 누군가를 연상하게 했다.
바로, 순진하게 사람을 믿고 혹사당해야만 했던 어린 나를.
동질감이 순식간에 움텄다. 그리고 나와 같이 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됐다.
실제로는 고작 3살의 나이 차이지만, 함이원은 순진무구한 내 동생들과 더 비슷했다.
‘연예계의 지저분함을 모른 채 연예계에서 살아남기는 힘들겠지. 그래도 소망하게 되네. 너라도 아무 일 없기를.’
조금 관심을 기울이고, 조금 신경 써주고, 조금 친절하게 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 큰 애를 어린 동생처럼 보살피고 있었다.
“서혼 형. 형 요즘 심한 거 알지? 애가 위태위태해서 신경 쓰이는 건 아는데 그래도 유리 인형은 아니잖아.”
거리감을 잘 재지 못하는 이원이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초록이는 바로 지적해왔다.
“자제할게. 우리 꼬맹이들 같아서 영 안심하고 내버려 둘 수가 없네.”
“함이원이 그런 면이 있지. 주변 사람들을 전전긍긍하게 하는. 그러고 보면 이원이 부모님도 대단하셔. 서혼 형이었으면 극성 부모가 됐을 텐데.”
“하하. 알았어. 조심할게.”
초록이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서 더 자신이 우스워졌다. 부모라 해도 애를 싸고돈다면 바르게 키울 수 없다. 하물며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연습생 형이 그러는 건 지나친 행동이다.
“자식도 언제까지 품고 있을 순 없지. 독립해야 하는 시기가 오니까. 근데 나 왜 벌써 서운하지?”
내 말을 들은 초록이가 신나게 웃었다.
* * *
[오란]홍오란(洪旿爛). 밝을 오에 빛날 란.
밝게 빛나라고 지어준 이름과 달리, 내 삶은 결코 밝지도 빛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둡고 칙칙하기만 했다.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운이 따르지 않았다. 내 차례만 되면 우유가 똑 떨어지고, 친구들과 같이 걸어가도 나만 머리에 새똥을 맞고, 뽑기만 뽑았다 하면 꽝이 나오고.
조심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나마 큰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위로를 들으며 억지로 흘려넘겨야 했다.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다. 가난한 둘이 만나 열심히 가정을 꾸렸으나 내가 태어날 때까지도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빠듯한 살림이긴 했어도 화목한 집안이어서 불만까지 품진 않았다.
‘내가 성공해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우면 그만이지.’
다정한 부모님의 존재만으로도 행운이었음을, 교통사고로 두 분을 잃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불평하지 않았을 거야! 평생 운이 없더라도!”
후회해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미 부모님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었으니까.
부모님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극심한 방황기를 겪었다. 이르게 온 사춘기까지 겹쳐 형이나 주위의 걱정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상이 미웠다. 밉고 원망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뺑소니만 아니었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거라는 의사의 소견은 안 듣느니만 못했다.
뒤늦게 잡힌 뺑소니범은 음주운전 상습범에, 보상조차 바랄 수 없는 빈털터리.
“X발! 웃기지도 않아!”
고작 12년 살았는데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되지 않았다. 살아보지 않아도 희망 따위는 없을 테니까. 사소한 운조차 기대할 수 없는 체질은 희망을 품는 것조차 방해했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비행을 저지를 의욕조차 없었다. 학교에 나가지 않고 골방에서 처박혀 세상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기만 했다.
나쁜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시도할 수는 없어서 악물고 버텼다. 피곤에 찌들어서 쓰러지기 직전이면서도 나를 챙기려 드는 형을 혼자 남겨둘 수는 없으니까.
중학교에 입학해 꾸역꾸역 출석하던 중에 하루는 담임이 나를 급히 불렀다.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교실에서 빠져나와서 본 것은 담임의 심각한 표정.
“오란아. 방금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너희 형이 쓰러져서….”
덜컥.
심장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