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79
어느새
더위가 차츰 가시고 차가운 공기가 몰려왔다. 언제 더웠나 싶게 추워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테오라는 언제 가을이 왔다 갔는지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겨울을 맞이했다.
“첫눈이다! 봤어? 저기 눈송이 떨어지는 거 봤냐구! 사진, 아니다 영상 찍어야겠지? 팬들한테 보여줘야지~”
박하는 밴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서 휴대폰 카메라로 바깥을 찍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눈이 이제 막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타이밍이라 카메라에 담기는 어려워 보였다.
“팬들한테 보여줄 거면 좀 더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펑펑 내려야 예쁘게 찍힐걸.”
서혼 형은 차창을 전부 살펴서 어디가 제일 잘 나오는지 대신 확인해줬다. 깨어 있던 멤버들도 서혼 형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입만 벌리지 않았을 뿐 먹이를 조르는 제비들 같아서 뭔가 웃겼다.
“좋았어! 지금부터 눈도 안 깜빡이고 대기할 거야!”
박하는 바쁜 팬들을 위해서 대신 첫눈을 포착해내겠다는 포부를 보였다. 바쁜 걸로 치면 우리도 만만치 않을 테지만, 팬들을 위하는 박하의 마음이야 백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대가 없이 우리를 좋아해 주는 코티지들, 입덕 부정기로 허우적대고 있을 미래의 팬들, 그리고 테오라에게 호감을 느껴주는 사람들까지.
테오라를 지탱해준 팬들과 지켜봐준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력 없이 얻을 수도 없지만, 단지 우리의 노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팬들은 아이돌의 존재 의의 그 자체. 팬들이 주는 사랑의 일부만이라도 돌려주고 싶다는 이 마음은 당연했다.
다음 주 스케줄을 확인하던 초록 형이 인상을 쓰면서 안경을 벗었다.
“후, M.com에서 열어주는 콘서트가 미뤄진 건 그렇다 치는데 그걸 글로벌 K-pop 콘서트로 퉁 치다니. 생각할수록 기막히네. 진짜.”
의 우승 특전은 두 가지. 하나는 이미 촬영을 끝낸 단독 예능, 또 하나는 콘서트.
‘단독’ 콘서트라고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해석되게 널리 알렸으면서 막상 단독 콘서트를 열어주는 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애초에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뒀던 걸지도?
“공연 시간은 더 할당해준다지만 단콘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데 말이야. 쯧.”
글로벌 투어 콘서트 형식이라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듯했다. 크오아에서 우승하지 않았어도 초대받긴 했겠지만….
“우리를 서운하게 해서 좋을 일 없을 텐데.”
테오라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그룹이었다. 멤버들의 평판도 좋은 만큼 그룹이 휘청거릴만한 사건을 일으킬 위험도 적었다.
미래가 창창한 그룹과는 관계를 잘 만들어두는 편이 좋을 텐데.
M.com처럼 거대 모기업을 뒷배로 두고 있으면 별로 상관없으려나?
“요즘 M.com이 좀 어수선하다는 얘기가 나오던데 그것 때문인가.”
“초록이는 모르는 소식이 없구나.”
“이 정도로 뭘. 이 소문은 업계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걸.”
업계가 어떤 업계를 가리키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크오아도 성공했는데 왜 어수선해? 축제 분위기라면 모를까!”
“M.com 경영진 문제라더라.”
M.com의 대표는 재벌 3세지만 능력 있다는 평을 듣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일관성 없는 간섭을 해서 직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고 했다.
“직원들은 적당히 듣는 척하면서 뭉개고 있다는데,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 더 이상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야.”
“우리가 크오아 촬영하고 있을 때도 그래서 이상했나? 윗선에서 개입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겠지.”
복잡한 사정까지 자세히 알 필요 없다면서 초록 형이 짧게 요약해서 말해줬다.
어차피 우리 머릿속은 팬들 생각에 이미 포화 상태라 그 정도가 딱 좋았다.
“단독 예능 방영 날짜 정해졌는데, 시상식이랑 겹치겠던데?”
“그래? 팬들한테는 연말 선물이 되겠다! 테오라 단독 예능도 나오고! 상도 받을 테고!”
“이왕이면 가요대상으로 말이지?”
“물론!”
멤버들과 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이제는 그 꿈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테오라 팬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에서 우승한 이후로 ‘테오라’는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것 같았다. 어떤 채널을 틀어도 테오라 멤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고, 알고리즘의 바다 속에도 테오라 영상이 꼭 하나씩 끼어 있었다.
머글들에게도 테오라가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인지도는 순식간에 올라갔고, 해외 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대략적인 팬덤 규모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실력파라는 인식과 1군이라는 인정을 얻어내기까지 했으니 각종 시상식에서 ‘가요대상’에 해당하는 상을 받는 건 정해진 수순으로 여겨졌다.
“테오라가 대상 못 받으면 누가 받겠냐구!”
바닐라진 같은 최정상 그룹과 활동 시기가 일부 겹치긴 했지만, 테오라가 올 한 해에 보여준 임팩트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앨범 초동이나 팬덤 규모는 아직 테오라가 부족할지 몰라도 추월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M.com 보다가 MBS 보면 딱 맞겠지?”
“뭘 고민해? 둘 다 틀어두면 되지!”
M.com에서 방영되는 테오라 단독 예능과 MBS 시상식 날짜가 겹치는 바람에 행복한 고민을 할 뻔했다.
TV와 노트북으로 두 채널 전부 틀어두는 걸로 극적인 타협을 이룬 우리는 먼저 TV 채널을 M.com으로 고정해뒀다.
테오라의 인기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광고가 끝도 없이 나왔다.
“이런 거 보면 테오라 성공했다니까!”
“우리 애들 광고 많이 찍었으니까 부자 됐겠지?”
“그럼! 그전에도 굵직한 광고 찍었었는데 지금은 뭐, 말해 뭐 해~”
진짜 눈만 뜨면 테오라 얼굴이 보인다는 얘기가 과장이 아니었다. 어딜 가도 테오라 멤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TV나 뉴튜브는 말할 것도 없고 버스 정류장 광고, 건물에 크게 걸린 광고판, 캔 커피 겉면….
코티지들은 테오라가 광고한 것만 먹고 입고 사용해도 생활할 수 있겠다고 감탄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아파트 광고에까지 진출해버려서 정말로 의식주를 전부 충족시켰다.
“단독 예능 프로그램은 오랜만이다. 자컨이나 예능 게스트로는 자주 나가긴 했지만.”
“근데 예고편 보니까 힐링 예능이 아닌 것 같던데…?”
다른 아이돌이 주로 촬영했던 단독 예능들의 주제는 ‘힐링’이었다.
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단독 예능에서라도 편하게 쉬기를 바랐다. 얼굴만 봐도 재밌어하는 팬들에겐 굳이 특별한 컨텐츠가 필요 없기도 했다.
“우리 애들을 굴리겠단 속셈은 아니겠지?”
한 그룹만 출연하는 단독 예능이 팬덤 장사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시청률에 환장하는 M.com이라면 일반 시청자들까지 잡겠다고 나서도 이상하지 않았다.
“설마! 이거 우승 혜택으로 얻은 스케줄이잖아?”
“방심하면 안 돼. 다른 곳도 아니고 M.com이라고!”
“곧 알게 되겠지.”
“제발 논란만 일으키지 마라!”
기나긴 광고가 끝나고 프로그램 제목이 크게 떴다. ‘테오라의 씩씩한 여행’이라는 제목이 나오더니 중간에 ‘무전’이라는 단어가 추가됐다.
“뭐야!”
밋밋했던 제목이지만 그래도 여행 컨텐츠라 조금은 안심했건만. 그 앞에 ‘무전’이 붙으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쩐지 뜬금없이 씩씩하다는 수식어가 붙더라니.
“돈도 없이 여행시키겠다고? 요즘 세상에 무전여행이 웬 말!”
“그러니까!”
하소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테지만, 화면을 가득 채운 테오라 멤버들의 얼굴에 입이 저절로 다물렸다. 오늘따라 빛이 나는 미모를 감상하는 데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둘 수 없다.
그게 자신이라고 해도!
[테오라가 국내 여행을 해보는 예능을 기획했는데요. 그것뿐이라면 너무 지루하겠죠? 테오라 여러분들에게 진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이번 여행의 테마는 ‘무전여행’입니다.] [네? 무전이요…? PD님, 아니, 작가님? 텐트 짊어지고 걸어서 여행 다닌다고 쳐도 식비는 어떻게 하라고요? 굶으라는 뜻이세요? PD님 그렇게 잔인하셨어요?]먼저 손을 번쩍 든 남초록이 의견을 말했다. 멤버들의 먹성이 얼마나 좋은지는 테오라에게 조금 관심 있다 싶은 사람들이라면 전부 알 정도였다.
그런 그룹에게 무전여행을 제안하다니?
[역시 돈 없이 여행하기는 힘드시겠죠?] [그럼요!]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대답에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제작진도 요즘 시대에 무전여행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테오라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아이돌 아니겠습니까.] […네?]꿈을 현실로 만드는 아이돌이라니. 포장을 그럴싸하게 해두고 고생을 시키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일주일간 여행하면서 돈을 벌어 사용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버스킹을 해서 돈을 벌라는 뜻이죠?] [대신 정체는 숨기셔야 합니다.] [네?! 그건 너무 어려운 미션 아닌가요?]촬영 시기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때라 꽁꽁 싸매는 정도는 이상하지 않다고 쳐도 정체를 숨길 수 있을까? 테오라의 인지도가 이렇게나 올라가 있는데?
TV도 없는 산골에나 가야 할 듯했다. 버스킹은 포기하라는 의미였으니 상당히 험난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괜한 걱정이 아니었어. 어떡해, 울 애기들….”
성실한 테오라 멤버들이라면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내겠지만, 꿀 같은 휴양을 즐겼던 다른 아이돌들을 떠올리면 안타까워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또 재미는 있을 것 같아서 마냥 제작진을 욕할 수도 없었다.
다른 아이돌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호화로운 단독 예능들은 솔직히 노잼 그 자체였으니까.
테오라 멤버들의 표정은 밝았다. 정체를 숨기라는 어려운 미션까지 있는데도 자신만만해 보였다.
[정체만 숨기면 뭘 해도 괜찮은 거죠?] […뭘 하시려고요?] [그걸 미리 말하면 재미없죠. 단순한 확인 절차예요.] […일단 그렇습니다. 테오라 멤버분들의 카드와 현금은 압수됩니다.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따로 챙겨가실 수는 있으며 차 한 대가 제공됩니다. 대신 기름이 떨어지면 알아서 보충하셔야 합니다.] [오! 그러면 할만하죠! 음식 재료만 충분해도 풍족한 여행을….] [다만, 음식의 무게는 20kg으로 제한됩니다.]PD가 다급하게 추가 조건을 걸었다. 남초록이 김샜다는 얼굴을 하자 가슴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테오라라면 먹을 걸로만 차 트렁크를 가득 채워도 새삼스럽지 않다.
차로 이동하면서 눈 붙이는 게 익숙할 아이돌이라 잠이야 차에서 구겨져서 자면 되고, 옷은 최소한으로 챙겨가면 된다.
나름 힐링과 재미 두 가지를 모두 잡으려고 애쓴 구석이 보였다.
[준비 끝내고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저희 촬영팀이 붙을 테지만, 테오라 여러분들도 차 안에 있는 카메라와 셀프 캠으로 촬영해주셔야 합니다.]명랑한 대답과 함께 ‘테오라의 씩씩한 무전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애들이 이 시련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하는 궁금함에 집중력이 확 올라갔다.
짐을 챙기러 숙소로 이동한 테오라 멤버들은 초반부터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데뷔 초반, 개그맨들보다 웃기다는 얘기를 들었던 그때의 테오라가 돌아온 것 같았다.